과학지식도 사회지식이다
2003  논문 : “과학지식도 사회지식이다”, 문화과학34호(2003년여름호,5월) 68-83쪽

과학 지식도 사회 지식이다.


최종덕


차례
1. 과학 지식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의 허상
2. 과학의 신화화
3. 과학 지식의 평가 - SCI 왕국
4. 생명복제 과학 지식의 횡포
5. 과학 지식의 사회적 책임


1. 과학 지식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의 허상

최근 15년 여 전부터 지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따져 보는 토론 기회가 부쩍 늘어났다. 그 전에는 주로 지식의 내용인 텍스트를 채우는 일만을 해왔다면, 이제는 지식이 얹혀있는 콘텍스트가 무엇이며 왜 지식을 쌓는지를 묻는 질문이 늘었다는 뜻이다. 지식의 콘텍스트를 질문하려면 우선 지식 그 자체도 문제려니와 지식을 갖는 지식인의 역사 인식을 되물어 보아야 한다. 이와 연관한 학자들의 토론은 지식사회학의 시간적 의미와 공간적 의미를 반성하는 역사적인 검토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적 의미란 주로 지식의 근대화 과정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공간적 의미란 지정학적 차이에 따르는 지식 기능의 변화를 문제 삼는다. 여기서 말하려는 지식사회학이란 좁은 의미의 학문 영역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지식 사이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질문하는 넓은 의미의 지식사회학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실증주의라는 명분 아래 삶과 지식 사이를 분리시켜 놓았던 지식의 객관성의 허울을 다시 따져보자는 일이다. 쉽게 말해서 객관성이라는 두터운 외투 속에 숨어있는 지식이 과연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눈감고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지식과 역사와의 관계를 따지는 일이며 기존의 범주에서 볼 때 객관주의와 역사주의 사이의 갈등을 반성적으로 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객관적 지식이란 지식 수용의 방법론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사회와 역사를 도외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주의’의 개념이 서구로부터 반성 없이 수입되면서 너무 쉽게 ‘실증주의’와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실증가능성 혹은 검증가능성의 여부에는 주관적인 가치평가가 개입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 나아가 학문 일반은 반드시 가치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서구 지향적 판단이 내려졌지만, 그런 판단에 따라 많은 지식인들이 몰역사의 그늘에 안주해버리는 반역사적 지식풍토도 같이 생겼다. 그렇게 안주한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논문 편수 채우기 식의 논문 쓰기와 연구비 나눠먹기 그리고 논문결론을 정해 놓고 실험결과를 유도하는 식의 지식유용에서부터 세부전공 나누어 자기 성역 쌓기, 몰래 외국자료 베끼기, 학회 권력 모으기 등을 하고 있으니, 그래서 결국은 지식의 가치중립성 명제는 그 자체로 지식이 될 수 없는 자기모순이 된다. 명분상의 가치 중립적 지식이란 포르말린이 가득 찬 유리병 안의 보존용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식의 역사적 재검토는 간단히 말해서 현실과 이론의 분리에서부터 생겨난 지식의 공허함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역사와 언어가 분리되면서 지식은 정보의 개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지식이 정보의 개념으로 바뀌어가면서 동시에 지식의 역사적 문맥을 묻는 질문이 안타깝게도 소실되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작업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과학기술-공학 지식인에게서 지식의 몰역사성에 대한 비판이 빗겨 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전공학 분야이다. 최근에는 분자유전학과 정보산업의 비약적인 성과가 사회적으로 문제되면서 생명윤리와 정보윤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과학자가 소유하는 지식은 가치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 과학적 성과가 인류의 미래사회에 진정으로 실용적일 수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프랑스에서 탁월한 생물과학의 업적을 보이고 있는 바렐라Francisco J. Varela는 원래 칠레 태생의 분자생물학자이다. 그는 과학자이지만 분명한 철학적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철학적 세계관은 그의 자연과학 탐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호기심이나 과학적 탐구의 사상적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역사와 삶의 공간에 대한 실천적 지표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바렐라는 그의 고향인 칠레의 독재 정부에 대하여 국제적인 비판세력을 구축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나아가 그의 과학적 성과로부터 얻어진 명성은 칠레 민주화 운동의 사상적 후원의 힘이 되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의 사회적 관심과 생물학적 주장에는 일치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그의 생물학 저서인 <인식의 나무>(한국어판, 1995)에서는 생명성의 특징을 인식과 존재 그리고 행위가 하나로 연계되는 생명성의 진화적 틀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사회적 인간으로서 인식과 행위 즉 앎과 실천의 합일성을 강조하는 그의 역사의식과 간접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그에게서 과학적 지식은 당연히 객관적 지식이면서 동시에 사회 통찰의 지식이 되었다.

지식 혹은 지식사회에 대한 토론 공간에서 주로 다루어 온 것은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였지만, 이제는 과학-공학-기술에 대한 지식의 사회적 관계의 문제도 중시되어야 한다. 과학 지식은 여전히 객관성과 실증성 그리고 가치중립성이라는 지식의 막강한 보호막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학 지식에다 경제성이라는 자본의 절대적인 차양막이 더해져서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의 지식이 아닌 지식의 인간이 되는 그런 삶의 위기가 엄습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과학 지식의 문제를 심각히 논의해야만 한다.
2. 과학의 신화화

먼저 우리는 인문학에서 지금까지 다루기를 꺼려했던 과학의 개념 혹은 ‘과학적’ 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문학 내에서도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무의식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인문학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보장받으려는 과학의존적 심리가 밑에 깔려 있으며 나아가 인문학의 신종 권위를 선점하려는 의도로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우리에게 인문학에 최초로 도입된 실증주의는 그것이 학문 방법론이라는 도구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내용까지를 지배해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실증주의와 더불어 환원주의는 가장 강력한 과학방법론의 무기가 되었다. 실증주의와 환원주의는 일선 자연과학 탐구태도로서 훌륭한 방법론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인문학 연구에 그대로 도입될 때 생기는 문제에 대하여 인문학자들 조차도 너무 안이한 태도를 보여 왔다. 실증주의와 환원주의가 방법론으로서 활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계론이라는 서구 전통의 근대적 세계관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근대적 기계론에 대한 치밀한 반성 없이 실증주의와 환원주의를 방법론으로서 수용할 경우, 방법론의 도구적 한계와 왜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가에 대한 내용적 의미를 혼동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방법론으로서 실증주의와 환원주의, 그리고 세계관으로서 기계론이 바로 “과학적”이라는 수식어의 핵심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놓치고서 ‘과학적’이라는 수사학이 도구로 전락될 때, 자칫 과학 지식은 권력 수단으로 변모하며 그런 지식권력의 그늘 속에 지식의 본 모습이 은폐되는 일, 그것이 문제였다.

자연과학의 소산물과 그 자연과학자가 갖는 심리적 배경 그리고 역사적 관점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역사적 관점은 한 개인에게 책임 지워져 있기보다는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전前사회적 사유의 지평선 상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문화사나 정신이념적 세계관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어서, 과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를 하나의 문화적 총체 아래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총체적 시각이 있을 때 비로소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문제가 전통과 현대라는 문제와 혼재되고 상충되는 모순된 현실을 풀어갈 수 있다.

과학철학을 과학사와 분리하여 보아서는 안 된다는 토마스 쿤Thomas Khun의 주장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나는 과학 외적 체계의 관계를 봄으로써 과학의 내적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과학의 내적 변화를 살핌으로써 과학이 그 사회와 연관되어져 있는 상황의 역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유 태도는 과학이 한 개인의 역량에 의한 성과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풍토와 사상사의 흐름을 엮는 통시적인 역사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 개인의 역사성은 사회의 역사성 안에서 파악되어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서구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까지 최고의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과학의 이 같은 영향력은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세계를 설명하는 무소불위의 기준이 되었고, 나아가 또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였다. 이제는 과학의 실제 내용과 관계없이 아예 카리스마가 되어 형식이 내용을, 그리고 권위가 사실을 지배해 버리는 역종속 현상이 자리를 확고히 잡고 있다. 새로운 과학의 신화가 탄생된 것이다. 과학의 개념이 기득권 구조에 의해 도구화되고 수단화되어 가는 상황을 지식인조차도 간과해버리는 상황을 신화화된 과학 최종덕,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휴머니스트사, 2003, 41쪽
이라고 말하려 한다.

신화 시대가 아닌 과학 시대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과학의 신화가 탄생한 셈이다. 과학을 말하면서도 가장 비과학적인 행태가 우리 시대를 주름잡고 있다. 아주 쉬운 예로서, 중등 교과 과정에서 철학적 반성 없이 수용한 우리의 과학 교육을 볼 때, 물리학이나 수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 방식만을 배우고 그치고 마는 앵무새 학습이 우리가 모두 익히 알고 있는 과학교육의 현실이 바로 그러한 비과학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과학 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과학기술만이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는 난무하지만, 막상 일반인의 과학기피증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신화화된 과학의 한 장면이다. 나아가 과학문화의 몰이해로 인해 앞으로 시장경제의 핵심부문이 될 것이라는 정보산업이나 생명공학에 수반되는 무수히 많은 미래의 윤리적 문제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신화화된 과학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과학은 반드시 인문학적 사유의 통로를 거쳐야만 한다. 인문학적 풍토 역시 밀려오는 과학의 흐름을 반성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지만, 거꾸로 과학기술의 미래는 인문학적 제어 장치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제어장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의 두 가지 사례를 들고자 한다.

3. 과학 지식의 평가 - SCI 왕국

과학 지식의 수준을 평가하는 거의 절대적인 지표로서 국제 SCI (과학논문인용색인, Science Citation Index)를 들고 있다. SCI는 미국의 민간단체인 과학정보재단(ISI)에서 과학기술분야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중심으로 구축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로서, 발표된 논문의 수와 그것을 인용한 논문의 횟수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지수를 가지고 연구집단의 기초과학 수준이나 논문의 질적 가치를 정량적으로 평가한다. 더욱이 논문의 수준을 평가하는 색다른 정량적 평가지수로서 IF(Impact Factor)가 있다. IF 지수는 해당 년도를 제외한 최근 2년간 SCI저널에 인용된 횟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논문인용 횟수가 많으면 그 IF 인용지수가 커진다. 예를 들어 1998년도 세계에서 IF 지수가 가장 큰 학술지는 의학분야의 임상연구 학술지인 Clinical Research 지로서 51이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과학잡지로 알려진 사이언스 지의 IF 지수는 22~25 정도이고, 네이쳐 지는 보통 27 정도다. IF 지수가 27이라면 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최근 2년간 SCI 학술지에 평균 27회 인용되었다는 표시이다. 보통 20 이상이면 최상급 학술지로 평가받는다.

2001년도 SCI 발표논문은 미국 하버드대가 8,500여 편을 발표하여 세계 1위를 차지하였다. 2위의 도쿄대와 6위의 교토대 그리고 7위의 캐나다의 토론토대를 제외하고는 10위권 안에는 모두 미국 대학이다. 특히 상위 2개 대학이 발표한 논문은 우리 나라 전체에서 발표한 논문수 보다 많고, 국내 10대 기관에서 발표한 논문은 미국 하버드대 1개 대학에서 발표한 논문수 보다 적다. 그러나 국가별로는 우리나라가 2001-2002년에 걸쳐 16위를 차지했으며 10년 전에 33위였던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수치 변화가 있었다. 10년 동안 2,000편에서 11,000편으로 늘었으며, 이 수치는 아시아권에서 일본과 중국에 이어 3위 수준이다. 이제 SCI 수치는 국가간 과학 지식의 분야별 연구동향 및 상대적 비교 그리고 연구성과의 소재지 등을 파악하는 직접적인 지표로서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비영어권 학술지 간행 국가에서는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은 비영어권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과학 정책평가가 SCI 지표에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몇몇 대학들이 SCI 상위권에 진입되어 있다. 한국은 현재 SCI에 포함된 국내 학술지 수가 20종이며, 그 중에서도 5종만이 SCI 핵심 저널(Core Journal)에 포함되어 있다. “2001년도 과학기술 논문발표 및 피인용 현황” (과학기술부, 2002) 참조
그러나 프랑스나 스웨덴, 이탈리아 등의 대학에서는 SCI 지표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또한 정보통신 분야에서는 학술지 게재논문도 중요하겠지만, 비중 있는 학술대회에서 미게재 포스터 발표를 더 신속한 연구성과로 인정받는 경향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SCI 의존도가 낮다. 또한 SCI 지표가 기초과학 지식의 평가기준으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학 연구에 더 많이 치중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순수 이학 분야의 이론 연구논문은 게재 수가 적을뿐더러 실험논문이나 조사연구논문보다 인용도도 더 낮다. 또한 논문 작성 과정의 질적인 내용 차이를 무시하고 획일적인 정량적 수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결정적인 약점이다. 예를 들어 수학이나 천체물리학 논문 수는 전기공학이나 물성재료학 논문 수보다 대략 ¼에서 ⅛ 수준이지만 전자신문(2000. 8. 24) 참조
, 그렇다고 질적인 연구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최근 들어 한국의 과학정책 평가는 일본처럼 SCI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으로 급속히 변했다. 따라서 SCI 상위권 진입을 위하여 모든 과학정책 사업이 전개되고 있는 형편이다. 마치 SCI가 한국의 과학연구 수준을 가름하는 충분조건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 근본적인 과학연구 발전을 위해 SCI 지표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SCI의 문제는 세계적으로 안고 있는 것이지만, 최근 들어 한국은 유독히 미국보다도 더 SCI 지상주의가 되어 버렸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SCI 수치 증가도가 세계 1위라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 사실은 과학재단을 중심으로 한 관련 정부기관으로부터 제시된 다양한 연구방식 형태와 비약적인 연구비 증가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몇몇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실험실 연구만을 좇아가는 풍조가 거세졌다는 사실이다. 실험실 연구는 이론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기전이며 협소한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연구개발’(R&D)이나 ‘창의적 연구개발’, ‘공학연구’(ERC;Engineering Research Center) 혹은 ‘지역연구’(RRC)라는 명분의 연구방식 형태는 대개 산학간 핵심기술개발 연구에 치중되어 있으며 특히 ‘특허’ 성과물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초 과학연구(SRC;Science Research Center)와 같은 연구형태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연구성과물의 내용은 대개 공학 지향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정부의 이러한 연구방식 형태로의 유도정책은 결국 순수이론 연구의 허약함을 너무 쉽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총연구비 투자액수 중에서 ‘기초연구’ 투자비율은 ‘응용연구’나 ‘개발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12.6%이다. 미국의 18.1%, 프랑스의 24.4%에 비하면 더 초라하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전체 절대 액수는 상당히 많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연구비 관련 국공립기관으로만 볼 때, 순수이론 연구에도 많은 연구비를 할당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낮은 비율은 아니지만 일선 연구실의 현실적인 연구자 풍토는 앞서 말했듯이 가시적인 실용성 기술개발에만 매달려 있다.

자본과 경쟁만이 살아남는다는 현재의 과학기술 만능주의 시대에서 실용성 기술개발에 치중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순수이론 연구 없이 기술개발에만 매달리는 풍토는 기껏해야 단기적인 성공만을 기대할 수 있으며 후대까지 이르는 장기적인 과학연구의 소홀함을 낳는다. 그뿐만 아니라 일선 연구실에서 혹은 현장 실험실에서는 더 많은 연구비를 따온 연구자만이 우대 받는 기현상이 벌써 뚜렷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풍토에서 가시적인 기대효과를 바라기 어려운 순수이론 연구자의 소외감이 더하며,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순수이론연구 연구실에는 미래의 숙련 연구자가 될 대학원생조차 오지 않는 현상이 이미 생겼다. 이제는 대학원생들도 연구비 많은 교수 실험실로만 몰리고 순수이론 연구실을 외면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국가 전체의 연구인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비는 대폭적으로는 증가하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개별 실험실의 중추 역할을 할 대학원생의 수는 줄어드는 기현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이공계열 대학 진학생의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잘 분석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원인은 이미 앞서 다 말했다. 즉 연구성과를 SCI나 특허라는 정량적 평가기준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구조에서 돈주는 사람이 공짜 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한 대가 혹은 성과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획일적인 정량적 기준으로만 성과물을 기대하는 것은 장기적인 과학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유럽의 과학연구 풍토는 우리와 달라 그곳 역시 SCI 기준을 중시하지만 그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으며 개인 연구자의 성과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실 혹은 실험실 단위로 평가하기 때문에 개인 연구자는 가시적인 성과물을 내야한다는 강박감이 덜하다. 따라서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창의적 연구는 ‘창의적 연구개발’이라는 연구방식 형태를 제공하는 것으로써 그런 창의적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창의적 연구 풍토를 마련함으로써 비로소 연구결과가 산출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외부에서 연구비를 많이 따와야만 대접받는 우리 연구풍토에서 생기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산학관 연구 혹은 ‘지역협력연구’ 등의 명분으로 연구주제는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해졌다. 연구주제의 다양성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연구주제 역시 따라서 다양해졌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실험실을 운영하기 위하여 또는 대학원생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연구자 개인의 실적을 높이기 위하여 억지춘향의 연구주제를 만드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 문제를 한국의 상황보다는 미국의 상황에 빗대어 말하기로 하자. 미국 위스컨신주 연방 상원의원인 프럭스마이어(William Proxmire)는 연구비를 위한 연구, 실적을 위한 연구에 국민의 세금을 투자하는 그런 낭비성 연구비를 경고하기 위하여 일종의 안티연구비 상인 ‘황금양털상(Golden Fleece Award)󰡑을 제정했다. 1975년 제정, 1988년 폐지, 2000년 다시 부활
http://www.taxpayer.net/goldenfleece/about.htm 참조
예를 들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수감자들이 교도소에서 탈출하기를 원하는 이유󰡑등의 연구주제로 지출된 연구주제에 대하여 풍자적인 상을 수여한 셈이다. 그리고 미국의 예산감시단체인 ‘정부예산 낭비를 막는 시민모임’(CACW)이 지역연고나 로비에 의해 수혜된 연구비의 낭비 사례에 수여하는 ‘꿀꿀이 상’(Porker of the month)도 있다. http://www.cagw.org/mediacenter/porker/mc.porker.home.htm 참조
최악의 예산낭비 사례를 달마다 선정하여 주는 상이다. 이런 상들은 일종의 쓸데없는 연구주제에 대한 낭비성 연구비 지급을 경고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상징적 모습이라고 여겨진다. 남의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의 상황에서도 이런 상을 받을 만한 연구주제가 꽤나 있다고 생각한다. 일선 연구자들은 속으로나마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4. 생명복제 과학 지식의 횡포

이제는 과학 지식의 사회적 파장과 기능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주로 생명공학기술과 관련한 과학 지식을 염두에 둔다. 최근 들어 생명복제기술과 관련한 생명윤리 논의가 한창이다. 생명복제 기술의 지향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생식세포가 아닌 체세포를 이용하여 개별 생명체를 똑같이 복제하는 경우이다. 1996년에 태어났던 돌리 양이 그런 경우이다. 체세포 복제란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훅 불어서 자기와 똑같은 생명체를 만드는 손오공의 이야기와 질적으로는 같다. 다른 하나는 이것 역시 체세포 복제이기는 하지만 전체 완전 생명체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안의 특정 장기나 신체부위를 장기이식과 같은 치료의 목적으로 복제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체세포 복제를 하려면 우선 난자를 구해서 그 난자의 핵을 제거한 다음, 복제하려는 대상의 체세포 안의 핵을 난자에 넣은 다음, 이 서로 다른 난자의 세포질과 복제 대상 핵을 전기적으로 충격을 주어서 새로이 결합시키는 어려운 치환 작업을 해야 한다. 그 다음 치환 결합된 난자를 자궁벽에 인위적으로 착상을 시키거나 아니면 인공배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치환과 배아를 배양하는 작업은 어렵기는 하지만 원리적으로 간단하며 대단한 실험 장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관련 연구자가 하려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런 핵치환과 배아세포의 인공배양 작업은 중대한 윤리적 문제, 나아가 인간 정체성 위기의 문제를 야기한다. 우선 치환을 위해 난자를 파괴해야 한다. 현재는 불임치료 지정의료기관에서 사용하고 남은 냉동 보관용 잉여배아를 사용하는데, 그 난자 관리가 선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식치료를 목적으로 특정 장기기관을 복제하기 위하여 핵과 세포질의 인공결합 후에 배아가 세포분열 할 때, 분열 이후 어느 시기부터를 생명체로 간주하느냐라는 논쟁이 따른다. 인공수정부터인가 아니면 수정후 원시선이 발생하는 14일 이후부터를 생명체로 보느냐라는 논쟁은 쉽게 합의를 이뤄내지 못 하고 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복제 생명체가 태어난다면 그 복제생명체가 온전한 생명체로 될 수 있는지 불확실하다. 간단히 말해서 핵과 외부의 세포질이 결합할 때 생기는 면역학적 부작용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 예를 들어 돌리 양이 탄생했을 때는 그렇게 매스컴에서 난리를 쳐대더니, 바로 그 돌리 양이 이상 비대증과 비정상 노쇠현상으로 죽었을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둘째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부작용이 없이 탄생하고 온전히 자라난다 해도, 그 생명체는 누구의 자손인가를 판단할 만한 근거가 전무하다. 만약 인간복제가 가능해진다면, 그 위기상황을 더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나의 몸 세포 한 부분을 채취하여 그 세포를 복제하여 나와 똑같은 나를 탄생시킨다면, 나는 나의 부모인지 아니면 형제인지를 알 수 없다. 더 쉽게 말해서 내 동생이 내 부모이며, 내 부모가 곧 내 동생인 셈이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이야기이지만 오늘의 생명복제 실험실은 현실의 기술로도 그런 일을 실현시킬 수 있으며, 그 사실로 인해 바로 중대하게 심각한 인간위기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인간 자체의 정체성이 붕괴될 수 있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과학 지식의 가치중립성을 논의하는 것은 너무나 사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복제 기술을 옹호하는 공학기술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복제기술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생명윤리법안 마련은 과학발전과 경제적 보상이 엄청나게 보장되는 생명복제 특허 기술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인간의 의료복지를 위하여 생명복제 기술이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장기이식이나 당뇨 호르몬 자연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치료목적의 생명복제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생명복제 기술이 치료목적만을 위해 사용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치료목적의 기술이나 인간복제 기술이나 기술의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놓여있다. 현재 한국의 생명윤리 법안은 몇 년에 걸친 논의 끝에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이 새 법안의 골격은 치료목적 범위 안에서 생명복제 기술을 허용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생명의 존엄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생명윤리법안이 만들어졌다. 이 법안이 마련되기까지 한 편에서는 관련 생명공학기술계와 과기부, 또 다른 편으로서 종교계를 포함한 시민단체들, 그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었다. 그러나 공식화된 갈등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생명복제 기술과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는 생명윤리의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오히려 윤리적인 측면보다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더 심각하다. 생명윤리의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란 다음과 같다. 첫째 법안 통과와 관계없이 진짜 우려할 일은 법을 무시하는 사회적 풍토이다. 낙태법이 거의 사문화된 것과 같이 생명윤리법도 그렇게 될 것 같아 겁난다. 둘째 또 다른 우려는 생명공학 기술이 다른 일반적인 지적 사유물로 전락되는 그런 지적 재산권과 특허권의 영역으로 고착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우려는 생명공학 기술을 둘러싼 국가간 경쟁과 자본기업의 기술소유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유전자의 특정 염기 서열이나 혹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얻은 동물에 대한 정보 특허는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생명복제 기술까지 특허 출원이 된 상태라서 그렇게 우려했던 ‘생명의 상업화’가 가속화될 조짐이 벌써 나타났다. 2001년 5월에 이미 미국의 생명공학 관련 대기업인 제론은 돌리 양을 복제했던 영국의 로슬린 연구소로부터 복제 기술 라이선스를 4,500만 달러에 사들여 영국 특허청에 특허를 신청했다. 로슬린 연구소는 이미 98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세계 100여 국가에 복제기술에 대한 동시 특허출원을 신청한 상태이다. 영국은 세계적으로도 생명의 상업화에 적극적인 무모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무모함은 실제로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특허출원 전쟁에서 독점권에 밀리면 안 된다는 상업화의 강박감이 한국의 생명공학 실험실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복제 소 `영롱이'를 탄생시킨 황우석 교수 역시 복제 관련기술 7가지를 국내 특허로 출원했다. 특정 복제 기술 하나가 60억 달러 정도의 시장성을 갖는다는 경제예측은 생명이 이미 상업화 전략에 희생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상업화의 가속도가 더 커질 것이라는 사회적 예측이 결코 ‘자유로운 과학연구 보장’ 이라는 변명으로 합리화되거나, 혹은 ‘지식의 국가 경쟁력’이라는 변명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불행하게도 벌써부터 생명복제 연구가 상업화되고 있는 조짐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어떤 연구자가 이루어낸 배아줄기세포주의 발견은 참으로 대단한 과학적 성과이기는 하지만, 정식 등록 이후 배아줄기주 하나에 수십만 달러에 해당하는 연구비 지원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허술한 사회적 조정 장치 속에서 이러한 소문들이 돌아다니는 동안 앞으로 특허를 이미 받은 배아 줄기세포의 수입가격은 올라만 갈 것이다. 2001년 8월 미국의 국립보건원 NIH은 금전적 관계가 없는 배아에 대해서만 정식등록을 받아준다고 했지만, 생명공학계에서는 이미 금전적 관계가 주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험용인 배아줄기주 하나 당 5천 달러에 팔 수 있다는 미국의 어느 성공한 실험실의 소문은 곧 미래 상업적 교환가치의 근거가 될 것이 뻔하다.

한국의 생명공학 수준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복제를 한 정도의 기술력으로 급진했다. 따라서 상업화의 위험도 역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한국의 생명공학 기술의 진척도는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눈 여겨 볼 정도가 되어 있다. 그만큼 사회적 조정장치 내지는 규제장치가 시급하다. 국내의 사회적 조정 장치는 일본에서도 부러워 할 정도로 그 규제가 미약하다. 결국 그 조정장치는 일선 공학기술 연구자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그 연구자 개인의 사회윤리적인 자기 조정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구조 안에서 연구자 개인의 조정이 먹혀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각도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사회구조적 문제를 조금씩 건드려야 한다. 결국 일선 연구자와 더불어 종교계, 인문사회학자 및 정부기관과 관련 시민단체 등이 함께 참여하는 합의 장치(Consensus Conference)가 반드시 필요하다.

5. 과학 지식의 사회적 책임

얼마 전에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모 과학고등학교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방문은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미 황폐화된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일종의 대안 형식으로 알고 있었던 과학고등학교에 대한 나의 기대는 무참하게 산산조각 나버렸다. 과학고등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와 같은 특수 목적고 역시 소위 명문 대학을 가기 위한 입시과정이 되어버렸다는 것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수학 시간에 그 많은 수학 문제 자체를 달달 외우게끔 가르치는 교실 현장을 보고서는 나는 너무나 놀라서 당황하기까지 했었다. 그 학생들은 분명히 명문 대학으로 입학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과학기술계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창의성이라는 것은 남의 나라 먼 이야기일뿐더러, 어린 학생들이 성인으로 커가기까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를 배울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과학 지식의 문제는 일반 지식의 문제와 별개인 그런 특별한 논의 주제가 아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말은 지식 자체의 형식론에 국한된 말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인간사회와 당연히 만날 수밖에 없는 의미론적 현실에서, 과학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기술자 개인의 사회적 가치관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과학 지식의 사회적 책임문제를 과학연구자 개인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고 앞서 말했다. 산학관 연구, 응용기술 연구, 지역우수연구라고 말하는 최근의 표제어들 모두는 과학기술의 성과물을 경제사회 및 산업사회에 응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연구성과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부가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지워진다. 과학 지식의 사회적 연관성을 과학연구자 개인의 가치관에만 문제를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해결방식이다. 아니, 진정한 해결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 사회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시민들의 참여가 활발하지만 과학 지식에 대해서 시민 참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 자체가 과학기술 지식의 무책임을 낳게 한다. 그래서 과학 지식에 대한 일반 인문사회학자 및 시민들에 의한 적극적인 감시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참여가 가능하려면 먼저 인문사회 지식과 과학 지식의 만남이 반드시 필요하다. 쉽게 말해서 과학자 및 과학학도들도 철학과 역사 그리고 사회의 문제를 공부해야 하며, 인문학자나 관심 갖는 일반인들도 디지털의 원리나 염색체 배열의 단순 지식에서부터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의 형성배경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로스에라머스 연구소에 원자물리학자인 오펜하임머가 소장으로 취임하면서도 그 자신은 후일 엄청난 역사의 전환점이 되어버린 원자폭탄 개발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를 못했다. 그러나 원폭은 투하되었고 과학자들이 과연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 있는 지를 되물으면서, 그는 답을 풀지 못한 채 인간적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미 국방성에 의해 결정된 원폭 투하 몇 일전까지도 해당 연구소 소장이 그 사실을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 라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펜하임머 개인은 소위 순수과학에 대한 순수성 혹은 가치중립성을 더 이상 신뢰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추후에 말하고 있다. 과학자의 순수한 연구성과와 과학 지식의 사회적 책임문제를 분리하여 말하는 가치중립성의 주장들은 진공실에 갇혀 있는 무책임한 언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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