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제국주의에 대한 철학적 브레이크
2003  시평 : “생물학적 제국주의에 대한 철학적 브레이크”, 시민과학 46호 (2003년5-6월호), 7-10쪽

생물학적 제국주의에 대한 철학 브레이크



시민과학 원고 (2003년 5월 19일 제출)


<1> 신우생학의 탄생 : 192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는 유색인종과 빈민 유럽인들이 폭증하자, 미국 정부는 앵글로-색슨계가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를 노골화하면서 우생학적 차별을 전제로 한 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11년에서 1931년까지 미국은 30개 주에서 정신박약인의 강제불임법이 법제화되어 있었다. 이런 악법은 60년대 들어와 대부분 폐기되었으나, 버지니아 주는 70년대까지 강제 불임시술을 강행했다. 미국에서만 1910년대부터 25년간 10만 명 이상의 정신박약인들이 불임시술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에서도 그러했고, 스웨덴은 6만 명에 이르며, 악명 높았던 독일은 40만 명 이상을 불임시켰고 나중에 그 대부분을 학살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불행의 흔적은 일종의 생식유전의 강제적인 조절이 실현된 반인류의 역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생식유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잠재하고 있는 체세포복제의 과학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1997년 체세포 복제를 통한 돌리 양의 탄생은 인간복제의 미래를 꿈꾸는 많은 과학 신봉자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었다. 기존의 육종학자들이 해 왔던 생식세포 복제와 달리 체세포 복제란 손오공의 머리 한 올을 입김으로 불어서 수많은 동일한 손오공을 만든다는 이야기와 원리적으로 같다. 이런 유전공학의 성과는 결국 과연 ‘내가 누구인가’라는 극단적인 자아 정체성의 철학적 문제를 미궁에 빠트리게 하였으며, 유전공학의 실용화 단계에서 사회적 책임의 혼란을 유발할 수 있는 생명윤리의 괴멸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현대 유전공학의 흐름은 이런 철학적 고민과 사회적 우려에 관계없이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비관적 미래에 있다. 개인적인 생명복지의 문제를 유전공학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허튼 신념들의 확산은 그 비관을 더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많은 불치병 환자 가족들에게 유전자 치료법이 당장 나올 것이라는 과신과 책임질 수 없는 지나친 희망을 떠 넘겨주고 있다. 더불어 돌리 양의 탄생 때 그렇게 법석을 떨던 매스컴들이 지난 봄 돌리 양이 비정상 비만증과 이상 노쇠현상으로 죽었을 때는 일제히 침묵을 지켰던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2> 유전자 결정론 : 현대의 유전공학 연구는 기본적으로 생명체의 유전자가 세포 차원에서 혹은 생명개체 차원에서 생명체의 특질과 표현 형질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의 틀을 유지한다. 유전자는 32억 개의 염기서열의 암호기호로 된 정보이며, 이 정보는 바로 특정 표현 형질을 발현시키는 잠재적 기능을 유지한다. 유전자 결정론의 의미는 쉽게 말해서 특정 유전자가 각각 특정 부위의 표현 형질 또는 생명 현상과 일대일 대응된다는 뜻이다. 결정론이라는 용어는 매우 철학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분자유전학에서 유전자 결정론의 의미는 과학탐구의 방법론적 목표이기도 한 과학적 환원주의를 대신하는 수사적 개념이다. 생명의 표현 형질은 해당 개별 유전자의 배열구조로 환원되며, 개별 생명체의 특성은 유전자의 총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근거한 설명방식은 유전자 결정론의 핵심적 내용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것이 철학적이건 신학적이건 혹은 경제학적이건 관계없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지니는 유전자에 의해 모두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이 바로 생물학적 환원주의이다. 그럴 경우 인간 생명체란 유전자의 기계적 조립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과학 탐구의 방법론과 그 성과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 제기는 생명윤리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유전자 결정론의 철학적 함정을 놓치지 않고 살피는 일이다.

유전자 결정론은 철학적으로 유전자와 형질 사이의 관계가 물리적이고 기계론적인 단일한 인과율을 전제로 한다. 그 관계가 정말 단순한 기계론적 인과관계에 그치고 만다면, 유전자 결정론이 맞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생명과학은 물리과학에 환원되거나 흡수된다. 쉽게 말해서 로봇 만드는 일처럼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날이 곧 온다는 뜻이다. 그러면 과학은 신을 능가하는 지구 역사상 최고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5번 염색체 중의 특정 유전자가 천식을 유발하고, 어떤 특정 유전자는 눈의 색깔, 또 다른 유전자는 머리카락의 성질, 11번 염색체 중의 어떤 유전자는 혈액암 유발인자 등의 일대일 대응되는 방식으로 유전자와 형질 사이의 기계론적 인과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표현형질이나 유전병 등의 생물학적 요인이 고유한 특정 유전자에 있다는 생각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정서적 거부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정서적 거부의 극단적 형태는 유전자와 형질 사이의 관계가 아예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학 연구성과의 현실로 볼 때, 그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과학의 현실을 무작정 반대하는 일과 같다. 따라서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건강한 비판은 기계론적 인과율의 허구를 밝히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기계적 인과율만이 인과율의 전부가 아니라는 철학적 안내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인과적 관계인지를 말해야만 한다. 그 관계는 인과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인과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 관계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3> 중층적 인과관계 : 중층적 인과관계의 예를 들어보자. 작년 초 공개된 인간 유전체의 숫자인 3만 5천여 개의 유전자의 수는 그렇게도 복잡한 인간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일대일 대응되는 결정론적 인과관계를 모두 밝히기에는 어림도 없는 작은 숫자였다. 그 반증이 벌써 나타났다. 1998년 중반에 천식 유발인자는 5번 염색체에는 무려 8개의 후보가 있고 6, 12번에도 천식 유전자의 후보가 2개 씩 그리고 11, 13, 14번 염색체에도 그 후보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조차도 아직 완성된 발견이 아니다. 결국 유전자 차원에서도 특정 유전자가 질병 등의 특정 생리학적 현상에 대한 충분 조건이 아니라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전자 결정론을 따르던 기존의 과학자들도 유전자 공학의 과학탐구가 발전하면 할수록 오히려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일대일 대응론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어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유전자 결정론은 과학적 측면에서조차 그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매스컴에서는 유전자에 대한 허구 소설을 여전히 쓰고 있다. 예를 들어 간암을 유발하는 특정 변형유전자를 발견하면 간암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여 장밋빛 희망만 던져주고 있다. 어떤 유전자는 분명히 특정한 생명현상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연관방식이 단순히 일대일 대응되거나 직접적인 인과율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잠재형질과 유전자와의 연관 방식은 매우 복잡한 조합구조를 갖는 유전정보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어서 현재의 과학수준으로는 일의一意적인 해명이 불가능하다.

<4> 분자 생태학-유전자 환경론 : 어떤 특정 유전자의 정보는 형질을 발현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니다. 발현되는 형질은 유전자들 사이의 생태학적 관계의 발현이기도 하다. 유전자들 사이의 생태학적 관계란 결정론적 인과율에 의한 유전자의 기능만으로 결코 해명될 수 없다.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 그리고 유전자의 진화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의 영향력들을 인정하는 유전자 환경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단일한 유전자가 단일한 형질을 발현시키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유사 유전자 결정론의 사례에서조차도 유전자-형질 사이의 단일한 경로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단일 유전자의 단일 형질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 유사한 사례 한 가지를 보자.

중앙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질병이 하나 있는데, 겸형 적혈구 빈혈증이라 불리는 일종의 유전병이다. 이 빈혈증은 어떤 유전자 혈액 단백질의 돌연변이에 기인한다. 단백질 변이는 헤모글로빈의 능력을 감소를 유발하여 세포 조직에 산소를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강한 빈혈 증세와 함께 치명적인 뇌졸중에 걸리고, 살아 남은 어른이라도 심장병이나 성장 저해 현상 등 인체 손상이 매우 큰 유전병이다. 이 유전병의 원인은 특정하고 단일한 유전자의 변형 때문이다. 이렇게 한 특정 유전자가 특정 형질을 유발시키는 유전의 현상을 “단순 형질의 유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겸형 적혈구 빈혈증조차도 사실은 그렇게 간단히 유전자 결정론의 한 사례로 보기 어렵다. 이 빈혈증이 분포된 중앙 아프리카는 원래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이다. 말라리아는 아직도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겸형 적혈구 유전체를 지닌 사람들은 말라리아 병원충에 대하여 강한 저항력은 나타내어 말라리아에 쉽게 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유전체와 어머니의 유전체 반반씩 나눠 갖고 있는 온전한 유전체는 반쪽의 두 유전체가 모두가 겸형 적혈구 유전체일 경우에만 빈혈증상이 나타난다. 한 쪽만 겸형 적혈구인 경우는 빈혈증 발병이 없고 그 대신 말라리아 예방접종 없이도 그 무서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된다. 참으로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아프리카의 거센 풍토병에도 다 살수 있을 만한 자연환경과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결코 인간의 현대 생명공학의 신화인 유전자 결정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유전자는 그렇게 결정론적이고 단순히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나는 생태학적 분자 생물학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본다. 또한 유전자 환경론의 한 예이기도 하다.

염색체의 특정 마디를 부분 교체하여 변형 형질이나 새로운 생명기관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알량한 단순이론으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다. 한 유전자가 아주 먼 과거로부터 밟아온 진화의 역사를 교체할 수 없기 때문에 유전자 결정론은 반드시 한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한 생명의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주는 생명의 씨앗은 두 개체 사이에서 작동하는 유전의 매체로서만 기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체 생명체의 역사를 호흡하는 숨결 한 숨결 하나도 놓치지 않는 생명사의 주체이다. 그런 생명의 작은 씨앗들 사이에 작용하는 것이 바로 생태적 연관성이다. 이제 진화의 결과인 생태적 연결의 생명사를 놓치고 단절된 단위 유전자의 색안경을 끼고서 생명과 자연의 책을 읽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우리는 과학적 결정론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고립된 기계 부속품의 유전자만이 난무하는 그런 생물학적 제국주의의 땅에서 사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끝>
시민과학

되돌아가기

전체목록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