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론에 대한 몇몇 자연철학적 단상
2003  발표 : “양자론에 대한 몇몇 자연철학적 단상”, 고려대장경 과학과 불교 세미나 미완성 논문(03년7월8일)

고려대장경연구소 과학과 불교 세미나 발표 논문
03년 10월


양자론에 대한 몇몇 자연철학적 단상과 불교


1. 과학의 한계

집에서 밀가루 음식을 만들 때면 반죽해 놓은 밀가루를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반죽놀이를 하곤 한다. 아이들 엄마는 일하는 데 방해만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아예 반죽 한 움큼을 놀이용으로 떼어주고 만다. 우선 반죽이 잘되려면 치대기를 잘해야 하는데, 손으로 대충 밀가루덩어리를 누른 다음에 그 덩어리를 다시 중간쯤에서 한번 겹치게(주름지게) 휙 접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밀기도 하지만 대개는 두세 번을 계속 접어 두툼해진 것을 얇게 눌러 펼치다가 또다시 꺾어서(주름잡아) 접어버린다.
깨반죽을 하기도 하는데, 그 반죽덩어리에 깨를 넣어 다시 계속 접고 밀어서 펼치고 다시 꺾고(주름잡고) 접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반죽덩어리에 깨가 어떤 때는 골고루, 어떤 때는 뒤죽박죽 퍼져 있다. 접혀 꺾여지는(주름지는) 부분도 일정치 않아서 깨가 어디로 분산될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다. 처음 깨를 쏟았을 때 반죽 밀기를 한쪽 방향으로만 한다면 깨의 분포도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반죽을 이른바 ‘단순한’ 반죽 밀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꺾는 작업을 하는 순간에 이 반죽은 깨의 분포를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반죽이 되어버린다. ‘복잡한’ 반죽은 아무리 반죽과정을 거꾸로 해도 원래의 깨 분포상태를 회복시킬 수 없다. 이런 상태의 반죽을 이른바 복잡화된(complicated) 반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복잡성(complex)의 어원도 원래는 ‘con plicare’로서 서로 겹쳐 접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반죽된 밀가루는 우리 자연의 모습을 은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은 원이나 삼각형과 사각형처럼 일정한 기하학적 형상을 가지기보다는 이리 휘고 저리 구부러졌지만 나름대로 질서를 갖는 그런 다양성의 모습들 천지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연은 기하학의 틀 안으로 고정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접혀지고 다시 접혀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모습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복잡하게 접혀진 자연의 속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다시 펼치려고 한다면 원래의 자연의 모습은 간데 없고 틀 속에 가두어진 아주 작은 부분만 보게 될 따름이다. 그나마 펼칠 수 있는 자연의 부분들은 자연의 가장자리에 불과하다. 자연의 그러한 가장자리를 보고 전체를 말하기도 하는데, 이를 우리는 과학법칙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가장자리를 인간의 언어로 언급하는 과학법칙은 자연계의 8~10% 정도만 기호화한 결과라고 쓴 것을 보았다. 어떤 카오스 이론가는 1%도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을 정량적인 비율로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어쨌든 인간언어의 접근은 자연의 맨 끝 깊이 포개져 있는 껍질에도 도달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그 주름을 편다 해도 맨 끝 부분만 겨우 펼 수가 있어서, 그 끝 부분을 가지고서 인간의 기호를 붙이고 인간의 의미를 갖다댈 뿐이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자연의 저 안쪽 부분을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이 접혀지면서 자연의 운동원리 자체가 구겨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접혀지면서 자연의 인과율도 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자연의 인과율을 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줄곧 접혀진 자연의 끝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의 인과율은 별 다를까? 인간을 자연의 한 양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인간의 삶의 인과율 역시 자연의 인과율과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는 할 수 있다. 불교라면 좀 더 강하게 삶의 인과율을 좀 더 강하게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런 인과율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고도 한다. 문제는 자연의 인과율을 통해서 불교의 연기법을 추측하려는 태도가 어디까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논의해야 될 것 같다. 용수 시절부터 해오던 것이지만 말이다. 있다. 우선 현대과학의 첨단을 가는 양자론의 자연철학적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그 논의의 시작을 해보려 한다.

2. 불이(不二) - 두 개처럼 보이는 하나의 양자

1935년 아인슈타인과 그의 두 동료는 물리학회지에 획기적인 논문 한 편을 발표하였다. Einstein/Podolsky/Rosen: "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in Physical Review 47 (1935) p.780 이하 이 논문을 EPR 논문으로 축약하여 부른다.
그 내용은 운동상태에 대한 양자역학의 기술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당시 발표한 실험내용은 실제로 이루어진 실험이 아니라 가상적인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물론 70년대 들어와서 실제의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그 실험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양자와 같은 소립자들은 전하를 띠고 있는데, -½e와 +½e의 짝을 이루는 에너지보존 상태인 e1, e2의 두 입자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쏜다고 하자. 이 경우 한쪽 방향으로 날아가는 상태 S1(입자 e1)에 대하여 전자석을 걸어주면 그 입자는 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당연히 자석의 힘에 의해 휘게 된다. 그런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는 상태 S2 (입자 e2)에 대하여 전자석을 걸어주지 않았는데도, S1이 자력에 의해 휠 때 자석을 걸어주지 않은 S2도 따라서 제가 알아서 동시에 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양자세계의 운동상태는 전통물리학의 세계관을 뒤흔들어놓는 일이었다. 물리학은 인과율을 기반으로 하는데 S1의 상태는 분명히 인과적인 물리현상이기는 하지만, S2의 동시적 휨의 현상은 전혀 인과적이지 않은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쌍둥이 중 한 명이 돌에 맞아 머리에 혹이 난 순간, 다른 장소, 같은 시간에 돌에 맞지도 않은 쌍둥이의 다른 한쪽이 동시에 머리에 혹이 나는 해괴한 사건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비인과적 사태가 텔레파시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하였고, 그런데 텔레파시는 당연히 물리학의 연구영역이 아니므로 물리학의 인과율에 거스르는 S2의 사태를 기술한 양자역학의 기술방식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바로 이 논문의 요지였다.
그러나 넉 달 후 닐스 보어라는 물리학자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반박하는 논문을 내어놓았다. Niels Bohr, "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in Physical Review 48 (1935) : EPR 논문과 같은 제목으로 같은 학술지에 4개월 후 게재되었음.
양자역학자로서 보어의 기본 입장은, 아인슈타인이 두 개의 개체라고 보았던 e1과 e2는 실제로 독립된 두 개체가 아니라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입자상태라는 것이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그 비분리성의 논증을 설명하였다. 피관찰 대상과 그 측정에 사용된 장치는 하나의 비분화적인 통일을 이룬다. 그 통일성은 양자 역학적 차원에 있어서 분리된 개별 입자의 결과를 고립시켜볼 수 없는 하나의 체계를 의미한다. 주어진 개별입자와 임의의 실험장치와의 결합은 근본적으로 그 같은 개별입자와 다른 실험 장치와의 결합과는 구분된다. 전체계의 상태 기술은 개별 상태와 모든 주어진 측정 장치 사이의 관계로서 표현된다. 다시 말해서 S2 에 대해 직접적인 측정이 없다해도 S2의 상태는 S1에 행한 측정 행위에 독립적일 수 없다. 따라서 보어에 의하면 EPR의 주장은 처음부터 다른 가설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된 것이라고 보았다. 측정에 있어서 대상과 측정장치 간의 분리불가능한 결합을 주장하는 보어의 입장을 수긍한다면, EPR의 역설은 더 이상 역설이 될 수 없다. 보어의 입장에서 볼 때, 물리적 실재에 대한 EPR의 기준인 ‘어떻게든 교란을 받지 않는’이라는 문구의 의미는 모호한 다의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EPR 역설에 대한 보어의 해결책은 근본적으로 관찰을 통해서만이 실재가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재의 가정을 거부한다. 보어는 EPR 논증이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근본적인 차이는 체계 S2의 상태에 대한 해석에 있다. 즉 파동함수의 기술이 체계와 측정장치간의 제어불가능한 상호작용을 그려낼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Niels Bohr, Atomphysik und menschlichen Erkenntnis, Braunschweig, 1958, p.61
쉽게 말해서 비분리성을 우리의 물리언어로 적절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EPR 논증을 또 다른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물리적 실재의 요소들은 `선험적’(a priori)인 철학적 사유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실험과 측정의 결과에 따라 발견되어져야만 한다.” EPR(1935) p.777
아인슈타인만 선험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보어 또한 선험주의를 강하게 거부한다. “일의성이 중요시될 수 있는 `물리적 실재’와 같은 표현에 이르는 차원은 당연히 선험적인 철학적 표현에 의해 도출될 수 없으며, 실험과 측정에 의한 직접적인 요청을 통해서만 근거 지워져야만 한다.” 보어(1935) p.696
양쪽 모두 선험성을 거부하지만, 보어가 보기에 아인슈타인의 논증은 국소성의 가정이라는 연역적 방법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EPR 논증은 다음의 국소성 가정인 “측정 도중 양 체계는 원래부터 상호작용이 없기 때문에, 체계 S1에 대한 작용결과는 체계 S2에 대하여 아무런 실재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EPR(1935) p.777
는 명제에 근거하고 있다. 이 가정은 이미 체계들 간의 관계는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상태는 서로 간에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양쪽 체계를 포괄하는 하나의 공동의 파동함수를 기술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보기에 양자역학의 파동함수는 이미 불완전하다. 공동의 파동함수에서는 체계의 상호독립성은 고려되어 질 수 없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가정은 그가 증명하려고 하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최소한 보어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양자역학 해석에 관한 아인슈타인-보어의 논쟁은 실재 개념의 인식론적 위상에 대한 논의로서 이해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양자론의 철학적 기초로서의 관찰행위를 중시하는 보어의 EPR 논증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순수 물리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식론적이다. 양자적 대상과 측정장치는 분리불가능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적 상태기술은 “단순히 순수 물리적이 아닌, 서로 조합된 물리-인식적 특성을 갖는다”. Kanitscheider,B.: Philosophie und moderne Physik. Berlin 1979, p.242
여기서 아인슈타인의 동역학과 보어의 동역학이 보여주는 세계관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인슈타인에게 미시세계의 개체는 그 외형적 조건처럼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분리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분리된 두 개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어에게 미시입자의 개체들은 외형적으로는 셀 수 있는 분리된 개체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실제로는 모두 연결된 하나의 비분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림 삽입)

3.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그물망

야머에 의하면 보어의 입장은 관계성(Relationalität)과 전체성(Ganzheit)의 두가지로 요약된다. Jammer,Max, The Philosophy of quantum mechanics. NewYork 1974 pp.198-199
우선 나는 보어의 관계성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보어는 양자현상이 독립적 실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하였다. 양자역학적 결과에서 볼 때 물리적 실재의 기술은 측정장치와 대상의 상호관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양자대상과 측정장치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포크의 인용을 보자. “파동함수로 표현된 확률은 미시대상과 측정기구간의 상호작용의 어떤 결과의 확률이다. 파동함수는 그 자체로 미시대상이 다양한 형태의 측정기구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포텐셜 확률로서 해석될 수 있다. 파동함수를 통해서 본 대상의 양자역학적 기술은 관찰수단과 관계된 상대주의적 요청에 따른다.” Fork,V.A., “Criticism of an attempt to disprove the uncertainty relation between time and energy” JETP15(1962) p.784-786, 참고: Jammer(1974) p.202
관찰된 대상이란 관찰이라는 측정행위가 시작되면서 대상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으며 동시에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관계가 모종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를 보통 “외부적 교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외부적 교란을 인정할 경우 전통적인 인과율의 엄격성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실제로 한쪽의 물리체계에 대한 완전한 기술로도 다른 쪽의 상태에서 무슨 과정이 일어날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양자효과를 고려 할 때 다양하게 가능할 수 있는 이행과정의 확률을 다루어야만 한다.” Niles Bohr, "Ueber die Begriffe Kausalitaet und Komplementaritaet" in Dialectica 7 (1948) p.72
이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적으로 정확하게 정의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위치를 정확하게 잴 수 없으며, 에너지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한다면 시간을 더 이상 정확하게 잴 수 없다. 인과율과 시간 좌표도 동시적으로 기술될 수 없다. 이러한 두 변수들을 상호공액가능한 연산자라고 말하는데, 이미 하이젠베르크는 작용양자의 존재로 인한 인과적 정확성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보어는 이러한 한계가 곧 자연법칙적 한계라고 본다. Tetens,Holm: “Ist die Quantenphysik vollständig?". ZAW17(1986) p.97

작용양자에 의거한 비인과성은 양자대상과 측정장치간의 분리불가능성과 항상 연관된다. 양자역학에 있어서 작용양자의 존재는 바로 그 대상과 측정장치간의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그들간의 분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Bohr(1935) p.697 와 D'Espagnat(1971) p.65 ; 결국 불확정성 관계에 의한 한계는 단순히 인간 인식의 결여때문이 아니라고 본다. 그 한계는 자연 자체의 한계와 관계된다. 양자론에 의하면 최상의 측정기구를 갖고 있다하여도 상호 공액량들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호공액 연산자들의 교환관계식에 의거한 불확정성 관계는 근원적으로 작용양자의 존재에 그 원인이 있으며, 자연법칙적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작용양자의 존재와 관련하여 코펜하겐 해석의 중요한 테제가 구성된다.
따라서 측정장치가 관찰대상에 미치는 영향의 교란값을 계산한다든가, 두 연산자들의 공액값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알려 진 바와 같이 두 공액 연산자들의 가관측량들의 동시적 인식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에 의해 제한된다. 이러한 한계가 양자대상에 대한 인간인식의 한계인가 아니면 양자대상의 존재 자체의 한계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상보성 개념을 통하여 자연철학적으로 답변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양자적 관찰대상과 거시적인 측정도구 및 관찰자와의 상호관계가 된다.
측정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장치와 양자 대상은 비가역적 방식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태로 진입된다. 그 과정에 있어서 측정 결과는 거시적으로 한정된다. 비가역적 과정은 거시적인 결과로 진행된다. 우리는 항상 양자적 과정의 결과를 거시적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참고 Audretsch,Jurgen: Struktur der Quantenmechanik. In:Audretsch/Mainzer 편: Wieviel Leben hat Schroedingers Katze?. Mannheim 1990 p.39
이 상황은 보어에 의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개념인 상보성 개념에 의해 서술되었다. 그의 상보성 개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사유방식을 전격적으로 전회시킨 자연철학의 새로운 길” Bohr(1935) p.702 ; 이에 대하여 홀제(Henry J.Folse)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리적 실재의 문제를 보는 태도의 전격적 전회’라는 보어의 요청은 그 자체로 양자론이 완전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Folse,Henry J.: “Bohr on Bell". In: Cushing/McMullin 편. Philosphical Consequences of Quantum Theory. Norte Dame,1989, p.262)
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물리적 개체에 대한 엄밀한 예측이 측정 행위 이전에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그 해석은 실재와 이론간의 일의적인 대응을 주장하는 EPR의 입장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물리에 있어서도 고전적 언어로 기술될 수 없는 현상을 다시 고전적 언어로 기술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보어는 실토하고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근원적인 난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양자론의 역설적인 모습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이나 자연법칙을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기존의 개념을 적용하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어는 보여주었다. Mittelstaedt: “Sprache und Realität in der Quantenphysik", Philosophia Naturalis 25(1988), p.364

앞서 말했듯이 보어의 상보성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측정하는 관찰행위자는 거시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일상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과율과 같은 기존의 전형적인 개념들은 이미 인간의 언어 속에 단단히 짜맞추어져 있다. 그와 같은 기존의 개념언어들이 미시현상의 영역에서도 제한없이 적용범위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맞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양자역학에서 관점의 변화는 단호한 것이다. 휠러(Wheeler)에 의하면, “양자역학은 어떤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시대에 있어서 혁명적 사유의 하나이다”. American Science 44(1956) p.360
우리에게는 외형의 언어를 뜯어고치는 일보다 생각을 다시 새롭게 갖는 일이 더 중요하다. 고전역학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 원자론적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보어는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체계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상관성을 보이는 공동의 한 체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양자적 대상의 미래 생태에 대한 가능한 방식의 모든 예측을 주는 조건들은 측정장비와 관찰자 그리고 양자적 대상을 하나로 간주하는 전체 체계에 의존되고 있음을 주시한다. 실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측정하는 행위에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물리적 실재는 관찰된 현상따라 달리 해석 가능하다. 또한 그러한 조건들은 “물리적 실재라고 하는 것의 현상기술을 낳게 하는 물리적 요소에 내재되어 있다” D'Espagnat(1983),p.50
고 보았다. 보어의 말을 빌리자면, “고립된 물질입자는 추상적인 것이며, 그것의 속성들은 다른 체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으며 인지될 수 있다”. Bohr(1931), p.57; 보어의 다른 문장을 인용해보자: “원자적 과정에 있어서 종래 물질의 유한 분할성이라는 고대의 사유방식을 넘어서, 옴살론적 내적 본성을 밝혀 준 플랑크의 작용양자의 발견은 물리학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기를 던져 주었다. 실제로 고전 물리 이론의 그림이론적 기술은 양자 작용을 무시해도 될만한 그런 작용에 관한 현상에 대해서만 유효한 이상화의 표현이다. (Bohr: Essays 1958-1962 on Atomic Physics and Himan Knowledge. New York 1963, p.2)
하이젠베르크도 이와 유사하게 쓰고있다. “그 안에서 다양한 연결망이 조성되는 복합적인 그물망으로서의 이 세계는 과정들이 서로 교차되고 작용하는 듯이 나타나며, 또한 이런 방식으로 전체 그물망의 구조를 결정한다.” Heisenberg(1973) p.85


4.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 관찰의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은 결국 대상과 관찰자와 상호관계의 결과이며, 관찰을 통하여 대상은 비로소 관찰자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관찰되기 전의 대상과 관찰 후의 대상은 분명히 다른 물리적 상태이다. 관찰되기 전의 대상의 상태를 중첩상태라고 부른다. 이러한 중첩상태는 관찰하는 동시에 붕괴되면서 물리상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중첩원리는 다음의 두 가지 주장으로 구성된다.
1) 파동함수 Ψ1 와 Ψ2 로 기술되는 두개의 상태로 구성된 전체계는 선형 변환식 Ψ = a1Ψ1 + a2Ψ2 로 기술된다. 여기서 a1과 a2는 임의의 시간의존적 복소수이다.
2) 임의의 한쪽 복소수가 영이 될 때, 그 새로운 파동함수는 체계의 한 쪽 상태에 해당된다.
참조 : Dawydow,A.S.: Quantenmechanik. Berlin 1987 p.20
쉽게 말해서 관찰은 물리적 교란이며 교란이 있어야만 비로소 대상은 인간에게서 인식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파동함수에 의해 기술하려 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순간 그 파동함수는 변화된다. 그것은 중첩된 파동함수에서 특정 상태로의 순간적 전이를 의미한다. 대상의 상태의 가능성들 중의 하나가 관찰을 통해 현실화된다. 따라서 측정과정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그 핵심은 파동함수의 붕괴(감축; Reduktion)에 있다. 그리고 붕괴의 과정은 반드시 비가역적이다. 파동함수의 순간적 붕괴라고 하는 양자역학적 측정과정은 고전 역학적 입장에서 볼 때 믿기 어려운 결과를 보여 준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죽는 순간에까지 양자론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파동함수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는 가능한 사건들의 한 동력학적 기술이다. 양자론에서 처음시간 (t)의 파동함수가 관찰을 통해 결정되어지면, 이 이론의 법칙으로부터 임의의 나중시간 (t+δt)의 파동함수가 예측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파동함수는 시간에 따른 사건의 경과 그 자체를 기술할 수 없음이 강조되어져야만 한다. 파동함수는 그 과정의 경향, 그 과정의 가능성 혹은 그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인식만을 어느 정도 표현한다. 하이젠베르크,Physik und Philosophie. p.29-30
파동함수는 “측정을 통해 얻어지는 인식의 한 표현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식의 획득을 통해 갑자기 변해질 수 있다”. Lande,Alfred:"Einheit in der Quantenwelt." Dial. p.125

옴살론적 측면에서holistic view 볼 때 파동함수는 측정된 체계의 모든 가능성들의 복합체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가능성들의 단순한 혼합체가 아니라, 그 부분들이 항상 변화되는 유기체적 전체와 같은 종류이다. 우리가 관찰을 수행하자마자, 파동함수의 비가역적 붕괴가 일어난다. 파동함수의 붕괴는 다양한 가능성에서 하나의 유일한 사실로 이끈다. 동시에 그 붕괴는 이론적 무한차원의 실재에서 하나의 차원으로의 비약이다. 이러한 붕괴는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등록‘(Registrierung) 이라고 불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관찰자는 그것이 기계든지 인간이든지 상관없이, 시공간에서 등록을 위한 결정을 한다.

보어는 양자현상의 기술을 특정상황아래서 이루어지는 관찰과 관계되는 무엇으로 간주한다. Bohr(1958) p.60-62
막스 야머는 유명한 보어의 한 언명을 다시 고쳐 말했다. “양자 세계는 없다. 단지 추상화된 양자역학적 기술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무엇인지를(how nature is)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what we can say about nature) 관한 것이다." Jammer(1974) p.204
양자세계는 대상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양자세계가 주관적이라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어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의 순수 전체상태의 확률 분포는 주관적 요인이 아니라 양자대상의 원천적인 속성이며 자연의 객관적 사실일 뿐이다. 드리슈너(Drieschner, Michael)는 객관성의 기초공리에 대한 기본적인 요청을 구성하였다. 드리슈너는 양자 대상이 시간 변화에 따라 그리고 측정 조건에 따라 잠재적으로만 기술된다고 말한다. Drieschner(1979) p.115
대상은 시간에 따라 힐버트 공간의Hilbert's Space 일차원적 하부공간 즉 힐버트 공간의 벡터를 통해 혹은 이차원적 하부공간으로 투사되는(projiziert) 투사연산자(Projektionsoperator)를 통해 기술된다.

Wegener,Ursula:"Quantenmechanik und Wahrscheinlichkeit" Dia.37(1983) p.162

양자역학에서도 각 시간에 따른 각 대상에 대하여 원자 차원의 기술이 해당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또한 매우 그럴 듯 하다.” Drieschner(1979) p.115
이러한 대상개념으로부터 양자대상도 원리적으로는 확률의 개념을 빌어 기술될 수 있다는 점이 유도되었다. 양자론에서 실제로 힐버트 공간의 `거의 모든’ 가능한 상태들이 확률분포 lΨl2 으로 연산화되며, 구체적 측정으로는 그 모든 상태를 기술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는 보통 강한 의미의 객관성은 성립되지 않으나 확률의 법칙이 적용된다. 따라서 양자론에서도 관찰의 물리적 의미를 포용하는 속성을 갖고 실재적 대상에 대하여 모순 없이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양자상태를 확률 분포의 체계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양자적 기술도 객관적이다.
측정결과를 단지 관찰자로서의 주관에만 의존적인 것으로 본다면, 코펜하겐 해석은 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일부 해석과 달리 코펜하겐 해석과 관념론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양자 행태는 대상과 측정장치 사이의 상호작용을 함의한다. 그러나 그 관계는 대상과 주관 사이의 직접적 관계가 아니다. “그 첫째 관계는 순수 물리적이며, 지각하기 위한 조건이며, 대상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Hübner,K.:"Über die Philosophie der Wirklichkeit in der Quantenmechanik" in: Phil.Nat.14(1973), p.7

그러나 실제로 양자론에서 보듯 주관과 객관 사이의 관계는 관찰수단과 피관찰체 사이의 관계에 유비되는 역설적 속성을 갖는다. 보어는 이러한 인식론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사유활동에 의한 기술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내용과 그것을 대하는 주관의 대비를 요청한다. 다른 한편 주관과 객관 사이의 강한 분리가 성립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개념은 우리의 사유내용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Bohr(1931), p.62
보어는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기존의 분석이 개념에만 매몰되어 있어서 개념이 말하고자 하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보어의 생각과 유사한 것을 요르단(Jordan)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의 개념구조는 “감각적 경험을 너머서는 인식의 표출을 통해서 자연현상의 실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질서화시키고 제어하는데 도움되는 보조 구조물이다”.

Jordan,Max: Anschauliche Quantentheorie. 1936, p.277

그러나 이러한 요르단의 해석은 보어의 기본사유에서 너무 멀리 가있다. 우리의 인식은 주관에 제한되기보다는 주관과 같이 한다.
앞서 보았듯이 관찰결과로서의 현상을 정의하는 보어의 방식에 따르면, 측정장비의 한 부분을 변화시킬 때, 물리적 현상을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현상주의적 테제는 붕게(Mario Bunge)의 표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물리적 대상은 인식하는 주관 혹은 관찰자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관찰자와 그가 행사하는 관찰수단 그리고 관찰대상으로 (숨겨진 방식으로) 구성된 하나의 닫혀진 통일체이다. 한 체계 안의 이 세 요소들 사이의 구분은 일의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 대상을 관찰수단에 편입시키거나, 관찰수단의 연장으로 보는 것은 인식하는 주관의 판단에 달려있다. 모든 관찰은 관찰수단에 관계 맺어진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모든 형식은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한다. 즉 실험적 상황에 관계된다는 말이다.” Bunge,Mario: Epistemologie. Zürich,1983, p.72
그러므로 코펜하겐 해석의 입장을 현상주의로 간주하는 것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코펜하겐 해석을 전형적인 현상주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현상주의에 따르면 사물과 과정에 대한 무든 언명은 감각자료에 대한 언명으로 환원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인식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한계 지워진다. 반면 코펜하겐 해석에서 실재에 대한 인식은 대상의 감각자료들의 모음이 결코 아니라, 인간과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은 아인슈타인의 인식론적 입장과 전혀 다르다. 코펜하겐 해석의 입장은 현상주의적 차원이기보다는, 보어의 관계성 개념에서부터 나온 실재의 전체성을 추구한다. 그것은 개체의 자율성을 거부하지만, 전체계의 자율성을 찾는다.

5. 실재란 무엇인가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객관성과 고전적 의미의 실재성은 서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힐버트 벡터로 표현된 폐쇄계의 상태는 실제로 객관적이다.”

Heisenberg: The development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quantum theory. In:Niels Bohr and the development of physics. W.Pauli(ed),London,1955, p.18

파울리도 다음과 같이 쓴다. “대상에 대한 가능한 정보의 원천이 관찰을 통해 비가역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처럼 대상의 상태가 관찰에 독립적일 수 없다하여도, 원자적 현상의 양자역학적 기술은 여전히 객관적 기술이다. 관찰하기 위한 전체 실험장치에 의해 정의된 현상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을 낳기 때문에, 그러한 전환은 고전물리학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자연의 새로운 전체성을 밝혀준다.” Pauli,W.:Matter. in:Man's right to knowledge. New York 1955, p.14-15
파울리는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고유하고, 고정되고, 일정한 속성을 부정한다. 관계의존적 전체상태를 존재론적 실재로 이해할 수 있다면, 코펜하겐 해석을 현상주의로 몰고갈 필요가 없다. 이러한 존재론적 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양자적 실재는 경험적 행위와 아주 긴밀하게 관계된다. 이러한 경험적 행위와 관련하여 데스파냐(Bernard D'Espagnat)는 `현상주의’대신에 ‘경험의 철학’이라는 말을 쓴다. D'Espagnat,Bernard: Auf der Suche nach dem Wirklichen. Springer,Berlin 1983, p.13
이러한 ‘경험의 철학’은 기존의 현상주의와도 멀지만, 아인슈타인의 경직된 실재론과도 거리가 멀다. 다음 장에서 코펜하겐 해석의 실재 개념을 다룬다.

상보성의 개념은 서로 대립되는 두 가정들의 종합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의도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물리적 실재에 대한 상세한 이해가 요구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실재의 기술은 개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실재의 올바른 기술은 관측장치와의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물리학에서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적 현상이 거시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언어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어려움이 생긴다.
측정 순간에 파동함수의 붕괴는 인식론적 해석에 속한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에서 인식론적 과정은 곧 측정과정을 말하기 때문이다. 상보성원리에서도 현상의 인식론적 과정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상보성원리를 굳게 믿는 물리학자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존재론적 실재개념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코펜하겐 해석과 관련하여 실재개념을 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가능성은 대상의 양자상태와 포텐셜의 공존성 사이의 상관성을 통해 열려진다.
앞서 확인한대로 물리적 대상의 실재에 대한 보어의 견해는 아인슈타인의 물리적 실재론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따르면 실재는 다른 실체들과의 어떤 관계와도 독립적인 속성들을 갖는 그런 실체(Substanz)이다. 반면 보어에 있어서 실재는 실체들 사이의 관계이며, 측정은 그 관계의 한가지 특수한 경우이다 Kanitscheider,B.: Philosophie und moderne Physik. Darmstadt 1979, p.281 ; K.Huebner:Ueber die Philosophie der Wirklichkeit in der Quantenmechanik. in: Phil.Nat.14(1973), p.5
아인슈타인에게서는 “독립적인 존재하는 상태들의 발견이 문제이며”, 보어에게서는 “전에는 전혀 없었던 실재의 구성이 문제된다.” Kanitscheider(1979),p.281
관찰된 것만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측정과정에 있어서 양자적 대상의 상태와 측정장치의 거시물리적 상태 사이의 상관성을 해명하는 일이 문제가 된다.
파동방정식은 측정 혹은 관찰을 하면서 일순간에 갑자기 변한다. 블랙박스 안에 들어 있는 쉬뢰딩거의 고양이는 관찰하기 전까지 `살아 있거나 혹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블랙박스를 열고 관찰하는 그 순간에 그 고양이는 `살아 있거나 혹은 죽어 있는 것’으로 된다. 이 점은 기존의 개념언어로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관찰자를 포함한 전체계의 파동함수는 다양하고 거시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는 상태들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 파동함수의 순수상태나 파동함수의 붕괴과정이 아니라, 단지 관찰결과만을 경험할 뿐이다. 미분화된 상태들의 가능성들은 경험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데스파냐는 이러한 경험실재(Erfahrungsrealität)를 실재 그 자체(Realität an sich)와 구분하였다. D'Espagnat(1983), p.87-89,109
관찰 전의 순수상태를 포함하는 실재 그 자체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전이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통상적 의미의 물리적 실재가 아니다.
보어는 양자상태의 전체성을 강조한 반면,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의 의미에서 측정과 측정장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불확정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잠세태적 실재를 불확정성의 관계 속에서 말한다. 그는 그러한 실재를 제 3의 실재 혹은 중간 실재(dritte oder intermediäre Realität)라고 한다. Heisenberg: Physik und Philosophie. p.25
그의 이해에 따르면 전체상태는 단지 가능태이며, 경험실재와 실재 그 자체 사이에 있는 어떤 중간 실재이다. 이러한 “실재는 측정장치의 수단을 통해 현실태를 낳게하는 가능태일 뿐이다”. Hübner,Kurt(1965), p.10
그 실재는 “고전물리학의 의미에서 실재는 아니지만, 물리적 실재를 낳는 가능태이다”. Heisenberg: "Entwicklung der Deutung der Quantentheorie" In: Erkenntnisproblem der Naturwissenschaften. Berlin,1970, p.412

이러한 잠세태의 실재개념에서 부터 양자역학적 존재론이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공존의 상태(der koexistente Zustand)가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공존의 상태는 “양자역학적 존재론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한 과학적 의미에서 그 존재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Hennemann, Gerhard: "Zur Frage nach dem ontologischen Hintergrund der modernen Atomphysik" Phil.Nat. 6(1960) p.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양자역학적 존재론은 우리의 언어로 완전하게 기술되어 질 수 없다고 하는 실재론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특이한 방식을 제시한다. 데스파냐는 이러한 실재론을 `먼 실재론’(fernen Realismus) D'Espagnat(1983),p.99 : “먼 실재론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친숙한 개념을 통해 기술되어 질 수 없는 그러한 실재의 이해방식이다.”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먼 실재론은 실재와 우리의 언어 사이에 놓여있는 간극을 잇기에는 쉽지 않은 난제를 안고있다. 결국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는 우리의 언어로서 어떻게 존재론적 접근을 시도해 내 수 있는가의 문제를 안고 있다. 양자역학에 있어서 새로운 언어의 요청은 일상언어의 구조 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존재론적 이해를 다시 우리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최소의 당위적 문제이다. 참고: Bratoev,G.: Heisenberg und die philosophische Begrndung der Quantenmechanik. In:Pfeiffer(Hg.):Heisenberg. 1977, p.74

지금까지의 작은 결론을 내린다면, 상보성원리에 걸맞는 실재개념은 관계의존적 전체상태의 개념에 의존된다. 관계 의존적 전체상태로서의 실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실재문제는 인식론적 관점과 더불어 존재론적 관점을 같이 갖고 탐구되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자연관을 그의 말을 통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방식에서 드러난 자연이다. 삶의 조화에 대한 추구에서 삶이라는 연극중의 우리는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Heisenberg: Physik und Philosophie. p.40


6. 양자정보

결국 양자상태의 함수값은 중첩과 붕괴에 의해 기술된다. 중첩은 관찰 이전의 양자 상태이며, 붕괴는 관찰하는 측정행위와 동시에 변화된 양자상태의 비가역적 변화를 의미한다. 결국 관찰 이전의 양자 상태는 어떤 규정된 값으로 인식할 수 없고 모든 값이 중첩된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의미의 인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0과 1로 비트화하여 환원할 수 있다. 따라서 인과적 인식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양자상태는 0과 1이 혼재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타자의 교란을 기다리고 있다. 교란이 있기 전까지는 계속 0과 1의 중첩상태를 유지한다. 0과 1의 중첩상태란 0과 1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뜻도 있지만 0과 1 사이의 무한한 (유한하지만 무수히 많은 ; 무한에 가까운) 상태값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고전 인과관계는 0과 1로 규정되어야만 소위 인과율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다. 그러나 양자상태는 0과 1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무한한 값을 잠재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양자 전산이 Quantum Computation 가능해진다. QC는 원자 단위에서 그 획기적 속도가 가능하며 중첩성 때문에 더 많은 전산이 가능해진다. 단순히 원자라는 작은 단위의 비트 때문이 아니라 중첩성 때문에 발생하는 전산의 확장폭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중첩성에 의한 양자상태를 전산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0과 1 사이의 연속상태를 어느 정도의 구획값을 설정하여 불연속적 단위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양자상태의 이러한 임의적인 비연속적 단위를 (최근 들어) 통상 큐비트qubit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 큐비트의 단위가 기존의 전산단위인 비트의 성질과 다르다는 점이다. 우선 기존의 비트값은 이미 앞서 자주 논의했듯이 관찰자의 관찰행위와 관계없이 독립적인 기술방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큐비트는 관찰자의 관찰행위 혹은 대상에 대한 교란행위가 발생하는 동시에 그 값을 기술할 수 있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한 것이 바로 양자정보이다.

양자정보는 앞서 말했듯이 기존의 비트 정보 방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정보량을 유지하며 또한 전송할 수 있다. 그런데 양자정보의 특징은 단순히 정보량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큐비트로 구성된 양자정보는 그것이 중첩된 양자상태로 정보가 이동하기 때문에 그 정보를 열어보는 순간에 정보량과 정보내용이 변환된다. 따라서 양자정보는 도청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도청이란 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종의 관찰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제 3자의 관찰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3자의 관찰행위 즉 도청이 개입될 경우, 양자정보의 중첩이 붕괴되면서 정보의 고유값이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양자정보는 도청에 대한 제어장치를 자동적으로 겸비하는 결과가 된다. 제어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위치 및 도청 에너지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거꾸로 이용하면 바로 어느 누구의 제3 자도 풀 수 없는 암호가 가능해진다. 암호란 결국 제1자와 제2자 사이만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런데 양자암호는 이러한 철저한 보안 기능 외에 상호 쌍방향 소통 기능을 제시한다. 이러한 보완 기능과 쌍방향 소통 기능은 결국 양자상태의 교란가능성 및 중첩 상태의 모호함이 오히려 장점으로 전환되는 한 사례이다. 암호의 풀이는 반드시 제1자와 제2자 사이의 소통방식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동일한 양자정보라 할지라도 소통방식이 다른 제1자와 제3자 사이의 소통에서는 다른 암호풀이가 되어 버린다. 제3자가 비밀시스템 안으로 허용된 사람이라도 말이다. 결국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는 시스템일지라도 그 시스템 안의 정보를 열람하려는 사람마다 전부 다른 정보로 변환된다. 이를 앞서는 붕괴 혹은 감축이라고 했다.

7. 언어적 유비와 반언어

중첩상태에서 붕괴상태로의 전환은 경계가 없는 인식에서부터 경계가 있는 인식으로 전환되는 일과 비슷하다. 중첩 상태는 경계를 구획할 수 없는 정보 상태이다. 그것은 분별지를 넘어선 반야지의 차원과 유비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유비는 중첩 상태와 인드라망의 유비이다. 인드라망의 유비는 지금까지 모든 부분들이 하나로 묶여 그들 사이의 상관성으로 전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연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에 그치지를 않는다. 모든 부분들은 전체와 조응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으며, 전체라는 망 혹은 시스템 역시 부분들에 의해서 그 모습이 변화할 수 있다.
중첩상태가 보여준 양자 차원의 실재의 전일성이 카프라 이후 화엄사상과 비유되는 것을 이미 많이 보아 왔다. 분명히 양자 차원의 입자운동의 상태는 바로 인드라 망의 구조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는 매우 조심스런 전제가 필요하다. 무경계의 마음을 다루는 불교의 언어와 경험세계의 경계를 인간의 이성으로서 파악하려는 자연과학의 언어를, 그 외형적인 유사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또 하나의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연기론이나 윤회설을 서구과학의 인과율로 설명하려 한다면 분명한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듯이 양자 차원의 입자의 물리적 존재론을 인드라 망이라는 무경계의 존재론으로 직접 비유하는 일도 지나침이 있다. 직접적 비유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이런 비유가 불교의 신비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신비화의 극치를 달리는 유럽의 불교를 자주 접했던 나로서는 더 이상 불교의 신비화에 편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주술화로 치닫는 한국의 불교를 자주 접했던 나로서는 과학에 편승한 불교의 주술화에 편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양자상태와 인드라망의 상태가 같다는 말을 통해서 현대 양자역학의 이론이 이미 불교에 다 들어 있었고, 따라서 그런 이유 때문에 불교의 사상이 위대하다는 주장을 한다면 불교 스스로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비유는 단지 인식론적 접근의 한 방편일 뿐이다. 그것은 유식론에서 말하는 분별지의 한 단편이다. 비유는 좋지만 비유를 하는 이유는 윤회의 끝이 연기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을 설명하기 위한 한 수단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유의 언어를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불교도 언어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불교는 ‘일체언어도단’이라는 명분 때문에, 언어명제의 집합이었던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하여 너무나 허약한 공리공담만으로 대처해 왔다. 불교 자체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조를 버리고 적극적인 언어의 실천세계를 찾아야 한다.
언어적 유비와 반언어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이 나에게는 큰 문제이다. 지나친 언어적 유비와 반언어의 지나친 초월주의가 나에게 던져준 이중적 반발심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나의 사춘기적 반발심만 자제할 수 있다면 용수의 중론이나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연기설 혹은 화엄의 관계론을 통한 과학과 불교의 실천적 소통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양자상태의 세계상과 인드라망의 세계를 유비하는 일은 단지 불교가 바라보는 열려 있는 세계의 다양성을 확인하고 나의 마음을 열어놓는 계기를 찾는 것이지 그들 사이의 직접적인 동일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결국 자연을 이해하는 길 그리고 마음으로 깨닫는 길은 무한할 수 있지만, 자연은 하나이며 깨달음도 하나라는 점을 아는 일이 소중하다. 그리고 언어의 인식론적 한계를 인정하고 윤회의 끝이 열반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한 연기의 세계를 잊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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