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흘낏 본 조용현 교수의 논문 두 편에 대한 토론
2003  논문 : “신을 흘낏 본 조용현 교수의 논문 두 편에 대한 토론” 과학철학 6권2호(03년가을호) 111-122쪽

신을 흘낏 본 조용현 교수의 논문 두 편에 대한 토론
Discussion Note: On Prof. Cho's Holistic View of Nature

최종덕



핵심용어 : 창조성, 부존질서, 합생, 카오스, 화엄철학, 전일론, 신비주의
요약 : 조용현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과학의 카오스 이론과 화이트헤드의 합생의 철학 및 불교의 화엄철학을 상호 비유하면서 강한 의미의 전일론적 자연관을 표명하였다. 과학-종교-철학을 관통하는 그의 가로지르기는 궁극적으로 자연 속에 내재된 창조적 질서를 찾는 일이지만, 이런 의도는 자칫 신비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Key Words : Novelty, Order for free, Concrescence, Hwa-Yen Buddhism, Holism, Mysticism
Summary : Prof. Cho presented holistic view of nature in his issue while he was integrated scientific theory of Chaos, Whitehead's concept of Concrescence and Hwa-Yen Buddhism mutually. His through-going on Science-Religion-Philosophy may be mislead to the mysticism, even though it is the great work for a creative Order which was hidden in Nature. It is, I suggest, very important subject whether his speculative journey can go to a new program for philosophy of science or for a scientific dogmatism.


논문1 : 조용현, 카우프만의 “신의 마음”(서평논문), 과학철학 2권2호(1999)
논문2 : 조용현, 창조적 진화와 공화(空化), 과학철학 4권2호(2001)

1. 조용현 교수의 전일론적 이미지는 참 흥미롭습니다

<과학철학> 2권2호와 4권2호에 실렸던 조용현 교수의 두 편의 논문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어서 남의 눈을 끌기 충분했다. 두 논문이 발표된 시점은 서로 달랐지만, 조 교수는 두 논문을 통해서 동일 범주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창조의 재현’에 있는 것 같았다. 창조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언어와 논리 속에 파묻혀 아무나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깊은 폐광 속에서 자연의 질서라는 금맥을 흩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금맥 속에서 가치가 될 만한 금들을 캐내더니 마침 얼마 전에는 작은 가이아 조용현, 「작은 가이아』, 서광사, 2003
라는 저서를 출판하면서 인디애나 존스의 부활을 펼쳐 주었다.

그는 이 두 편의 논문을 통하여 혼돈과 무질서의 외양을 보이는 듯한 자연의 모습을 창조적 질서의 근원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서 재발견하였다. 그는 재발견의 증거로서 비선형적 복잡성의 과학을 보여준 카오스 이론 및 현대 발달생물학의 상징적 비유모델을 도입하였다. 또한 창조적 질서를 이미 형이상학적 사유로서 파악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움novelty을 낳는 존재의 자기 창출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살아 있는vis viva 힘을 기술함으로써 모나드가 어떻게 우주 전체를 표상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더 나아가 조 교수는 불교 화엄경에서 묘사된 一卽多 多卽一의 우주법계를 생화학자인 얀치(E. Jantsch)의 공진화 과정 및 화이트헤드의 합생 철학과 대비하여 설명하였다. 이런 설명을 더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 교수는 그림 속의 자기 그림들이 회귀적으로 그려진 그 유명한 에셔(Escher)의 그림들을 삽입하였다.

이렇게 조 교수는 첨단의 카오스 이론과 생물학 그리고 라이프니츠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또한 불교의 화엄철학을 스스럼없이 가로지르면서 과학-철학-종교의 전일론적 이론 모델을 구축하였다. 더욱 놀라운 일은 각 분야의 전공 지식이 적절히 융해되어 그가 추구하려는 창조적 질서의 통일우주 이미지를 최대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 카오스 이론과 같은 비선형 과학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그리고 화엄법계의 우주론 등, 이들 중에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화이트헤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 교수는 짧은 원고 분량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 존재론의 핵심인 합생concrescence의 의미를 아주 쉽게 설명해내고 있었다. 그 비결은 조 교수 특유의 비유법과 수사법 대한 수준 높은 활용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비결은 특별한 비결이 아니라 그의 왕성한 독서량에 있는 듯 하다.

그가 성찰하는 철학적 추구는 숨겨진 하나의 질서implicate order를 깊은 바다에서 끄집어 올리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숨겨진 질서를 찾으러 바다로 향하곤 하지만 혼돈의 파랑에 배가 뒤집혀지거나 무질서의 파도에 뭍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David Bohm/Donald Factor(Hrsg.), Die verborgene Ordnung des Lebens, Aquamatin Verlag, 1988, 5장. "Religion, Ganzheit und das Problem der Fragmentierung" 참조
쉘드레이크R.Sheldrake와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대화를 수록한 책, A New Science of Life 에서 조 교수가 인용한 내용을 다시 재인용해보기로 하겠다.(논문2, 114쪽) “(전체는) ‘함축적 바다의 총체성에 의해서 매개되어진 인과적 전체’이다.(one that is mediated via the totality of the implicate ocean) 그것은 분리되고 고립된 ‘외연적 파도’(explicate wave) 들 간의 인과와는 다르다“ 우주적 질서라는 바다의 총체성을 보기는 어렵지만, 언뜻 드러나는 외양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한 장르들이 등장하였다.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말이다. 그런 노력이 종교로서가 아닌 화엄철학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것 같았다. 20 세기 들어와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최근의 비선형 자연과학에서도 그 흘낏함을 기술하려고 했다. 조 교수는 그러한 장르들에 대하여 아주 민감하였다. 전일성에 대한 그의 민감성은 두 편의 논문에서 등장하는 몇몇 용어들만 얼핏 보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용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창조적 진화“, ”누적적 진입“, ”중중무진“重重無盡, ”혼돈 속의 질서“, ”비선형적 연기적 인과“, ”자기촉매적 과정“autocatalytic process, “함축적 바다의 총체성에 의해서 매개되어진 인과”one that is mediated via the totality of the implicate ocean. 이런 수사학적 용어들만 보아도 그의 철학적 의지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의 서술적 방식이 언어의 틀에 매여진 현행의 학술적 콘텍스트에서 얼마나 공감될 수 있느냐이다.

2. 좀 더 자세히 말해 봅시다.

조 교수는 논문1에서 카우프만의 96년도 저서 「우주는 우리의 집」 Stuart Kauffman, At Home in the Universe, Oxford: Oxford Univ. Press, 1996
을 서평 형식으로 소개하였다. 카우프만은 이 책에서 자연 속에 숨겨진 질서를 보여주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카우프만은 철학, 심리학, 수학, 의학, 생물학을 두루 공부하면서 자기 안에서 학제적 연구를 포용함으로써, 복잡성complexity으로 겹겹이 싸여진 자연의 질서를 전일론holism의 관점으로 풀어낸 보기 드문 학자이다. 그런데 조 교수는 이 책의 제목을 ‘신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조 교수의 대단한 관망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매우 많은 점을 시사한다. 질서의 주재자가 존재한다는 기묘한 전제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 질서의 주재자는 신이며, 그 신으로부터 생산된 모습이 바로 질서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조 교수는 이런 나의 지적을 부정할 것 같다. 왜냐면 조 교수의 최근 논문들과 저서 전편에 깔려진 질서의 의미는 누구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질서 스스로가 질서를 반복 생산하는’ 자기조직적self-organisation 질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뜻하려는 신은 피조물과 조물주가 위격 상으로 엄연히 분리되어 있는 기독교적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필연을 구획하는 특이점critical point으로서 신을 말했을 뿐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조 교수에게 신은 곧 신의 마음일 뿐이다. 내가 조 교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토론을 하려니 조 교수의 입장을 먼저 세워 놓고 하려고 한 말이다.

조 교수는 카우프만이 말하려는 부존질서賦存order for free의 함축된 뜻을 매우 중시한다. 조 교수가 고민 끝에 번역했다는 ‘부존질서’ 라는 개념은 기학학적으로 정체된 ‘얼어붙은 질서’의 범주를 멀리 벗어나 있는 “저절로 출현하는 자유의 질서”로 해명된다. 조용현, 카우프만의 “신의 마음”, 과학철학 2권2호(1999), 114쪽 각주1)
그가 번역한 부존질서라는 용어의 최적성을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단지 그 의미만 분명히 적시하면 된다. 그가 말한 부존질서의 용어는 다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1) 질서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특별한 설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질서는 자유를 내포하며, 자유 역시 질서에 근거해야 한다. (3) 질서는 자기촉매적 네트워크 안에서 저절로 출현하였다.

조 교수는 질서와 자유의 의미를 연결시킨 카우프만의 혜안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는 카우프만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그보다 더 나아가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화엄경의 공의 논리로 이어간다. 조 교수가 그 내막을 알아차린 질서의 구조 안에서 창조성을 캐내는 엄청난 사유의 통로를 발견한 것이다. 질서와 자유를 하나의 범주에서 다룰 때 비로소 풀지 못한 창조성의 문제가 많은 부분 해결될 수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논문2에서 창조성의 근원을 화이트헤드 합생(合生concrescence)의 철학으로부터 찾고자 했다. 화이트헤드의 합생의 개념은 일반 철학자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A.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 민음사, 1991, 제2장 참조
합생은 多者가 一者로 통합되는 과정을 의미하며, 통합의 과정에서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가 상호 진입되고 대상과 대상 사이의 상호 진입이 이루어진다. 결국 인식의 단위는 전통적 의미의 실체나 고립적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 존재”라고 하는 화이트헤드 고유의 “과정적 원리”에서 탄생되는 생성의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이다.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주체적 경험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기 창조적 존재이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창조성의 문제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창조는 외부의 에너지가 필요 없는 내적인 자기 창출과정이며, 이는 합생을 통하여 가능하다.

조 교수는 합생이 현실적 존재가 성장하는 과정이며 그 자체로 현실적 존재라고 했다. 중요한 지적이었다. 좀 더 그 의미를 부가한다면, 합생의 중요한 성격 중의 하나는 합생의 과정 자체가 바로 합생이 된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합생의 이러한 측면을 관계적 본질의 핵심으로 이해한다면 조 교수가 추구하려는 방향과 맞닿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적 본질은 언어적 개념으로 이해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다. 합생의 형이상학적 측면은 형이상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존재방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조 교수가 원하는 존재의 통합 과정 역시 우주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에 조 교수가 자연과학의 근거를 통해서 우주의 존재방식을 논증하려해도 한계에 부딪치게 되어 있다. 또한 그가 시도하는 화이트헤드 철학과 화엄철학의 비교 역시 언어적 범주의 차이 때문에 오는 결정적 한계를 안고 있다. 조 교수는 그의 우주적 시선 바로 밑에 놓여 있는 인식의 사각지대를 놓치고 있다.

3. 조 교수는 아주 중요한 인식의 사각지대를 놓치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는 대상화된 존재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조 교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독특한 개념인 현실적 존재는 생성의 과정을 피드백의 방식으로 포괄하는 동사형의 존재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현실적 존재의 언어적 특성을 이해해야만 조 교수가 주요하게 다룬 합생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그 특성이란 기존의 실체관의 언어 및 뉴턴역학적 일상언어로 현실적 존재의 개념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뉴턴적 일상언어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을 보편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경험대상을 기술하는 이러한 언어는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오히려 추상화된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진짜 구체적인 언어로 대상을 다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화이트헤드 철학의 주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적을 화이트헤드는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말한다. 앞의 책, 57쪽
운동하는 대상을 정지한 상태의 대상으로 바꾼 상황에서, 그 상황을 일상 언어로 기술한 것이 바로 오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운동 상태의 자연이 진정한 구체성이며 오히려 뉴턴 언어로 기술한 정지 생태의 대상은 추상화되어진 자연이라는 지적이다. 둘째 서구 언어는 이미 실체화된 언어 구조라는 점이다. 이렇게 실체화된 언어로서는 자연의 진정한 모습을 기술하기 어렵다는 화이트헤드의 지적이 있었다. A.N.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1933. VII Laws of Nature. 참조
실체화된 언어는 기존의 개념들, 즉 절대성, 완전성, 불변성, 정지성, 유일성, 영원성 등의 속성을 회임하고 있는 신God을 기술하는데 적합하다. 그러나 자연은 오히려 변화하고 운동하며, 다양하며,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그래서 기존의 실체적 언어로는 구체적 자연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화이트헤드에게서 도출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의 형이상학은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였으며 결국 일반 독자들이 읽어내기 힘든 신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구체적인 현시 중에서 언어는 상징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화이트헤드에서 언어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의 독특한 개념인 “명제”이다. 그에게서 언어는 명제를 상징함으로써 명제에 대한 경험이 가능하다. 언어에서 명제에 대한 느낌과 경험 사이의 관계가 곧 상징적 연관이 된다. 언어는 명제적 느낌을 유발하며 적극적인 유혹lure을 한다. 유혹이 성공하기 위하여 먼저 유혹하는 언어와 유혹 받는 명제의 느낌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문창옥,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이해』, 통나무, 1999, 제8장 명제와 명제적 느낌, 참조
이러한 의미의 명제는 결국 기존의 실체론적 언어와 뉴턴적 언어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진리치 계산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중요한 철학적 단서가 된다. 이런 명제론은 20세기를 풍미했던 비트겐슈타인 후기철학, 역사주의 과학철학, 해체론의 철학,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은 후기 구성주의 철학의 바탕이 되는 언어관이다. 단지 언어관의 기반이 된 것만이 아니라, 실재reality가 무엇인가에 대한 전환점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관을 더 확장할 경우 긍정의 측면에서 동양사상의 언어를 유입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부정의 측면에서는 신비주의 언어로 과대포장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최종덕, “신비주의 경향의 신과학운동에 대한 철학적 비판”,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소나무, 1995), 10장 및 최종덕, “이성과 신비의 두 날개”,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휴머니스트, 2003), 5장 참조


4. 조 교수의 언어 무대는 과대포장의 연희가 연출될 우려가 높습니다

조 교수가 연출하는 언어의 무대는 자칫 이러한 과대포장의 연희가 우려된다. 화이트헤드는 수학적 배경이 단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자연과학의 배경은 크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물론 그는 고전역학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한 심도 있는 학문적 배경이 있으며 그 비판을 통해서 그의 형이상학의 한 측면이 구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에 의존하기 보다는 플라톤에서부터 이어지는 전통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사유과정에서 잉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래 전에 화이트헤드의 상대성원리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비교하려는 노력을 했었지만, 그 기반을 찾지 못하고 손을 놓고 말았다. 그 둘은 전혀 다른 범주에 놓여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분위기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보다는 양자역학의 세계상과 더 접근되어 있지만 실제로 화이트헤드와 양자역학의 상관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를 가장 많이 연구한 팔터(R.M.Palter)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Robert M. Palter, Whitehead's Philosophy of Science, Chicago: the Univ. of Chicago Press, 1970, 6장, 10장 참조. 그러나 Shimony는 30년대 이후의 현대 양자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Shimony, "Quantum Physics and the Philosophy of Whitehead" in Cohen/Wartofsky(ed), Boston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New York, 1965, p.308)


최근에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기독교 신학과 불교에서 재해석 내지는 흡수통합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 이러한 모습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화이트헤드 철학의 출발과 종교의 출발부터가 다르다는 점을 항상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조 교수는 화엄사상과 화이트헤드 철학 및 카오스 이론을 접합시키고 있지만 그들 사이의 상사성(相似性;analigy)은 인정하지만 진화사유적 상동성(相同性;homology)은 없다. 여기서 상사성의 뜻은 예를 들어 박쥐의 날개와 벌의 날개가 같은 기능으로 유사한 구조를 갖지만 진화론적 분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한 불교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화엄경보다는 금강경으로 먼저 접근해야 한다. 금강경을 놓치고 화엄경을 먼저 볼 경우 불교가 온통 철학적 사유 체계로만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삶의 장르에서 시작되었지만 합리주의의 옷을 입고 나타난 과학이나 서구철학은 세계화된 존재 해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물론 조 교수는 이런 정도야 다 알고 계시다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교수의 능통한 수사법과 과감한 비유능력은 논문의 범주에서 벗어나 수많은 신비주의 세력과 신과학운동 그룹에게 태양과 같은 경전으로 변질되어진다는 사실을 조 교수 스스로도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철학은 이제 실증주의의 관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유의 존재 사슬을 언급해야 한다. 존재의 자유는 인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인식의 자유는 구체적으로 학문간 벽이 허물어질 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을 가로지르는 조 교수의 학제간 연구 성과는 매우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가로지름을 통한 광대한 존재에 대한 혜안은 철학을 넘어서 종교적 신을 얼핏 보고 있어서 일반 중생의 입장에서는 도 아니면 모가 되는 언어로 전락할 수 있다. 왜냐면 그의 우주적 시선 바로 밑에 놓여 있는 인식의 사각지대에서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이 내재적 융합이 아니라 외재적 합체로 그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토론 원고를 쓰는 나 역시 과학과 철학의 벽을 허물기를 원하는 사람이며 나의 연구 작업 역시 그런 쪽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조 교수와 나는 학문적으로 매우 밀접한 동지이다. 그러나 비결정론적 피드백의 자연 현상과 불교의 연기적 인과를 직접 비유하거나, 레이저 현상의 물리적 동조 현상을 화이트헤드의 합생 개념에 과감히 수사하는 일은 지적 상상력을 부추길 수 있지만, 비유와 수사를 뒷받침할 만한 논증이 너무나 왜소하거나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레이저 현상은 전일론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자주 드는 사례이지만 그것은 분석물리학으로도 충분히 설명가능하다. 조 교수는 동조를 영어로 correspondence 라고 했는데 이는 오류이며 coherence를 잘못 쓴 것 같다. Coherence 개념을 한국물리학회에서는 최근 공식적으로 <결맞음>이라고 번역하였음.
라이프니츠의 힘의 개념으로 단자론의 특성을 설명한다고 해서 단자론을 거울론이나 전일론적으로 해명하는 일은 지나친 일반화의 과정으로 여겨진다. 형태장 개념은 진화생물학에서 여전히 논의 중인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인간 게놈프로젝트의 결과 유전자의 수가 10 만여 개에서 3-4 만개로 되는 과정에서 조 교수가 몇 년 전에 쓴 논문1과 올해 대작으로 출판된 작은 가이아 조용현, 『작은 가이아』, 서광사, 2003, 107-110쪽
에서의 논증 방식이 바뀌었다는 점은 조 교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사소한 작은 실수라고 생각하며, 진짜 문제는 앞서 여러 번 말했듯이 조 교수의 철학적 의지가 지나친 수사와 비유를 통해서 여과 없이 대중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자연과학은 복잡성 이론이니 쿼크 이론이니 해도 여전히 환원론적 분석과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종교는 여전히 기도와 희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은 이들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하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는 대통일 이론은 아닌 것 같다. 철학적 사유로의 대통일 이론은 자칫 교조적으로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과 종교 철학이 만나는 접선이 현실에서는 오히려 신비주의자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준 결과를 많이 겪어 보아 왔다. 그래서 나는 통합을 위해서는 먼저 각 분과들의 차별성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나 역시 전일론적 세계관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라서 더욱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 교수도 이런 조심을 같이 하신다면 조 교수의 철학적 사유는 상상력과 논리의 통합체로 재탄생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예를 들어 합생을 합궁合宮으로 번역하자는 그의 제안은 매우 적절한 아이디어로 여겨진다. 논문2, 91쪽, 주10
아이디어 수준이 아니라 화이트헤드 전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런 제안이 불가능하다. 조 교수의 독서 범위와 질적 이해력이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 외 여러 부분에서 그이 철학적 사유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의 사유는 항상 생명적 실천에 닿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토론 원고의 핵심은 조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대한 구체적인 논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 교수의 철학적 사유 안에 품어진 전일적 세계관이 갖는 의도치 않는 반향에 대한 외적 우려를 염두에 두었다. 나는 그의 비판적 동지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나의 토론 내용이 전일론적 사유 위에 선 조 교수의 생명론이 완성되는 데에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 나의 토론 글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의 토론 내용 중에서 지나친 것이 있다면 다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조 교수의 답변은 더 많은 철학적 생산을 낳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끝>


과학철학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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