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기의 상상력 |
2004 강의 : 철학아카데미 여름강좌 <도학의 역사를 찾아서> 중 7회분 -도와 기의 접근, 8월 17일 오후 1시 기의 자연과학적 접근과 이해방식<언어와 삶의 양식> 우리 사회 안에서 기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은 참으로 특별한 뜻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의 존재론적 지위를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그냥 기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혹은 기에 깊이 침잠된 사람들은 기의 존재를 믿으며 온통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기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한다. 한편 보이는 실재만을 믿는 사람들은 그와 정반대로 기의 논의 자체를 허황된 일이라고 하는데, 아니면 실재적인 경험대상으로 환원될 수 있는 기의 속성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기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제 각각이지만 그들 사이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성이나 물성에 관계없이 어떤 상태, 상황이나 대상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수사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기의 용법이 포함된 언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서양언어를 웬만큼 쓸 수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아주 뚜렷한 대비 사실로 인정된다. 왜냐하면 서양언어에서 기에 해당하는 번역어가 마땅하지 않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언어에서 기가 들어간 말들이 언제부터 정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전기, 기압처럼 일본사람들이 만든 말이나 기절이나 기진맥진과 같은 명사형보다는 기가 막히다(氣塞), 기가 차다, 풀죽다 처럼 수사어로 사용된 기의 용법이 생활 속에서 쓰이기 시작한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고 헤아릴 수 있다. 기의 어원학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기의 언어가 그만큼 우리의 사고와 삶의 양식까지를 은연중에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언어와 사고 그리고 행동양식 사이의 철학적 관계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소쉬르가 말한 signifie記意와 signifiant記表의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쉬르는 언어를 실재세계를 반영하는 실체론적 언어관에서 전체 언어구조에서 개별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관계론적 언어관을 제시함으로써 상당한 혁명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기의 실체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실체론적 언어관에서 벗어나야만 기의 뜻에 근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쉬르의 기호 연구는 기의 뜻을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소쉬르의 기표-기의 관계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기는 자연의 현상을 그려내는 방식의 언어이지만, 그 자연이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운동하고 있는 것이라서 기호론 방식으로만은 그 언어적 전달이 어렵다. 예를 들어 “책상” 과 “바람” 그리고 “기”라는 말을 비교해보자. 책상은 만져지고 의미전달이 비교적 일의적이다. 그러나 바람은 만져지는 것이 아니지만 의미전달 역시 대체로 일의적이다. 왜냐하면 생활에 비치는 바람의 작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흔들림, 콧등에 와닿는 시원함, 옷고름의 휘날림 등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이는 바람으로 의미화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까지는 기표와 기의의 서구 기호론이 어느 정도 맞을 수 있으며 구조주의 언어이론도 대충 수긍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의미전달도 일의적이지 않다. 더군다나 이론적 의미의 기와 생활 속의 기가 서구문화 유입 이후 언제부터인지 분리되기 시작하여 더 혼란스럽게 되었다. 이론적 틀 속에서 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정의definition라는 사유 행위를 강요받고 있다. 정의는 Science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definition 강요 속에서 기를 사이언스 안에 가두든지 아니면 사이언스와 어떤 방식이든지 만나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 시간도 그런 요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국 주자학 이후 혹은 조선 성리학 이후, 즉 정의의 학문이 성한 이후 이기론이니 기론이니 하면서 자연학이 이론학으로 조금씩 바뀌어가면서 기의 자연성이 삭감되어 갔다. 후일 서경덕과 최한기 등에 의해 부활하는 듯 했지만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기는 완전히 미신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최근 80년대 들어 기에 대한 논의가 자뭇 삼삼해지더니 이른바 신과학과 신비주의적인 기의 풍조와 더불어 기에 대하여 서구 자연과학의 검증을 받아달라는 요청이 쇄도해졌다. 이런 풍조는 결국 사회적 불안감을 주술성으로 대치하려는 잘못나간 기의 왜곡으로 치닫는 것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어쨌든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기를 말하기는 해야겠다. <기의 과학적 접근방식>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기를 접근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존재론적 의미에서 기 혹은 인식론적 의미에서 기의 현상은 모두 물리적인 존재 혹은 현상으로 환원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으며, 그렇게 환원되지 않으면 기와 기의 현상은 관념에 지날 뿐이라는 입장이다. 강하게 말한다면 물리적으로 환원가능할 경우에만 기의 현상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검증될 것이며, 현실의 기술적인 문제로만 안 되지, 원리적으로 그리고 미래의 기술력을 통해 검증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셋째, 불가지론의 입장이다. 원리적으로는 환원되어야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환원의 기술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례1> 예를 들어 경혈의 위치와 운동의 흐름을 림프구와 림프선 그리고 전자기 현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기를 자연과학적으로 검증한 셈이다. 한때 북한의 김봉한은 양의사로서 기를 자연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김봉한은 60년대 초 경락의 흐름과 흐름의 실체를 당시 첨단의 과학장비를 동원하여 봉한액 및 봉한소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이 이론은 당시 소비에트와 일본 학자에 의해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알지 못할 이유로 김봉한이 숙청 당하면서 그의 연구는 단절되었다. 김봉한은 동위원소 P32를 고전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경락의 위치에 투입하여 경락을 통한 기의 흐름을 나름대로 해명하였다. 그는 전통 침술과 자연과학을 접목시켰으나 무작정 서구 과학방법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자체의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 주요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임파선이나 압통점과 같은 물리적 차원의 신체 지도 이론이 아닌 營衛論, 상한론에 근거한 장부론, 변증논치辨證論治의 고유 방법론에 의해 봉한소체 이론을 제시하였다. 물론 현재는 김봉한 봉한소체는 신경 말단의 감각수용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부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해부학적 감각수용기로서 설명할 수 없는 봉한소체만의 작용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례2> 서구과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은 환원주의이다. 환원주의 중에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물리-존재론적 환원주의는 어떤 층위의 물질이나 현상이 그보다 아래 층위의 물질이나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 최하위층의 단위물질unit이 요청되며, 이를 서구사상에서는 통상 원자atom라고 불리운다. 그래서 물리적 환원주의는 반드시 원자론과 함께 논의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기가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기가 과학적으로 해명된다는 말은 곧 기의 최종적인 단위가 무엇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또한 환원의 층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예를 들어 분자는 원자로 원자는 핵과 전자로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양성자는 쿼크로 환원되고 그 거꾸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마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은 손주를 낳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기의 흐름에서는 이러한 일방향적 순서가 뒤엉키는 현상들이 생긴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할아버지를 낳은 꼴이기도 하다. 그래서 환원주의 난제가 생기고 따라서 기를 환원주의 방법론으로 해명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기존의 과학에서 본 물질은 계층이 정연하지만 기의 작용은 계층이 정연하지 않다. 이 점이 결정적인 차이이다. 예를 들어 말단신경계는 뇌와 척추신경계로 모아진다. 쉽게 말해서 중추신경계는 중앙통제소의 구실을 한다. 중앙과 말단의 거리가 상당히 멀지만 반드시 뉴런 시냅스에 의해 물리적으로(전기화학적으로) 연결된다. 결국 뇌나 척추는 계층 혹은 층위의 관계에서 말단이나 내부장기보다 상층이다. 따라서 피부 경락에 침을 놓아 장기를 고친다거나 침 마취를 하여 경부암 절개 수술을 한다는 사실은 그럭저럭 인정한다해도 뇌 종양 절개를 위하여 뇌 절개 수술을 할 때 마취약 대신 침마취를 한 북경중의학 시술팀의 의학 방법론은 도무지 환원주의와 맞지를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중요한 점은 그렇게 침 마취를 하여 환자를 고쳤다는 사실이다. <사례3> 팽팽하게 긴장된 수평을 유지한 채 흔들리지 않는 수평 막대저울이 있다고 치자. ( ▲ ) 이런 수평관계에서 왼쪽에 아주 작은 먼지라도 쌓이면 막대는 그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얼른 오른쪽에 그 먼지 질량에 해당하는 추를 얹어놓아 수평을 유지시키려고 했는데, 너무 무거웠는지 다시 오른쪽이 기울게 되었다. 또 다시 왼쪽에 적당한 크기의 추를 올려놓아 수평을 맞추려고 한다. 이렇게 수평막대는 계속 아래위로 움직이겠지만 여전히 그 수평을 깨지는 않고 있다. 즉 한쪽 막대가 땅에 닿지 않는 한, 수평막대가 계속 흔들거려도 수평은 수평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수평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자처럼 흔들리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는 수평과 후자처럼 조금씩 요동이 있지만 여전히 수평을 유지하는 흔들리는 수평이다. 전자의 수평을 우리는 무無에 유비할 수 있다. 일체의 흔들림이 없던 무의 수평은 먼지와 같은 아주 작은 외부간섭으로부터 시작되는 요동에 의해 양쪽 수평막대 끝에서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발생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수평막대의 위아래 요동은 물리적으로 말한다면 곧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교환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동하지만 일시적으로 수평을 유지하는 한쪽 끝에서 볼 때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는 서로 교환이 된다. 쉽게 말해서 합이 영(0)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에너지가 일단 발생했다는 점에서 에너지는 요동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무한히 늘어만 간다. 다른 쪽 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한쪽 수평막대가 한번 진동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수평을 유지한다면 무에서부터 수사적인 차원에서 4배수의 양(+)의 에너지가 발생하는 셈이다. 한편 한쪽 끝의 양의 위치에너지는 비록 가상적 혹은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쪽 끝의 음의 위치에너지를 수반한다. 음의 에너지는 실제로 생각하기 어렵지만, 전체로 보면 에너지의 합이 영이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에서 유가 탄생된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보이지 않는 유에서 보이는 유로 전환되는 사건일 뿐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유를 무라고 말할 뿐이다. 보이는(혹은 보일 수 있는) 유는 보이지 않는 유에 의해서 상쇄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 에너지의 합이 영으로 보존된다고 말한다. 무는 이러한 보존성을 일러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미래의 우주가 더 커질지 아니면 작아질지를 결정하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두 물체가 어느 일정 거리 안으로 서로 붙어 있으면 그들 사이의 인력 때문에 덜커덕 붙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일정 거리 밖에 놓이면 이내 더 멀리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주 물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결국 우주는 축소할 것이고 성기게 퍼져 있으면 우주는 팽창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식에 속한다. 이런 상식을 근거로 보이지 않는 우주물질들 즉 암흑물질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중력효과만을 갖는 암흑물질은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추론한다. 그리고 보이는 것만을 유라고 하는 것은 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는 추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연구주제인 중성미자가 바로 암흑물질의 강한 후보임을 고려할 때 무에 대한 경험적 접근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논리학에서는 여자와 남자 혹은 A와 ∼A는 모순관계이면서 동시에 보집합의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계에서 무와 유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포섭적 전환관계이다. 그 안에는 무가 유를 낳지만 무에서 유가 창조된다는 것이 아니며, 보이는 유는 무의 한 단편이라는 생각이 아주 깊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입자물리학과 우주물리학의 내용이 범어의 수냐에서 용수의 중론에까지, 화엄경에서 구사론까지, 하다 못해 송대의 벽암론이나 도가사상, 황로학에서 동양의학 그리고 화담에서 최한기에 이르는 일련의 빔(空, 無)과 기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 유사성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에 빠져버리면 기에 대한 이해를 왜곡으로 빠뜨리게 할 수 있다. 과학의 관심은 관찰대상에 있지만 기의 이해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레4> 카오스이론의 철학적 이해 개별과학의 장르 중에서 기 논의와 연관하여 가장 빈번하게 회자되는 것이 바로 카오스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의 궁극적인 의도는 결정론적 카오스를 말하고자 하는 데 있으며, 즉 겉보기에 무질서한 현상들도 알고 보면 숨겨진 결정론적 질서계의 부분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데 있었다. 원인과 결과의 일대일 대응이 안 되는 현상을 우리는 우연 혹은 확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서도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을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는 것은 자연과학의 최대의 임무이다. 즉 대상체계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하게 분석할 수만 있다면 결정론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단지 부족한 정보 혹은 부분의 체계 속에서 볼 때 그 결정론적 체계가 마치 우연 혹은 확률적 운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적 행태를 바로 결정론적 카오스라고 부른다. 우리는 비규칙성을 무질서로 그리고 결정론을 질서로 보는 관성 때문에 질서와 무질서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본다. 그러나 결정론적 카오스이론은 결국 이 두 개념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결정론적 카오스이론이 가져다준 세계상을 통해 새롭고 아주 다르게 자연을 이해할 수도 있다. 보통 우연과 필연은 조화될 수 없는 대립물로서 간주되었으나 카오스이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카오스가 결정론적 구조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과 혼돈적인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모순적이라는 것이 카오스이론의 기본명제이다. 카오스 조건은 물리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식론의 문제이다. 우리가 아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철학적 물음은 철학 2500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계속 물어져 왔다. 과학에서는 묻지 못했던 이러한 물음들을 이제는 하나씩 카오스라는 이름의 과학에서도 다루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존재에 대하여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아래 거리낌없이 물어왔다. 반면에 과학은 기껏해야 인식의 문제만을 다루어 왔다. 카오스이론이 존재를 직접 묻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인식의 테두리를 붕괴시키고 나온 것임에는 틀림없다. 카오스이론을 통해 과학과 철학이 하나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공동의 장이 마련될 수도 있다. 결국 과학과 철학이 만남으로써 조금씩의 진보가 가능한 기 논의도 그러한 공동의 장에서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례5> 복잡계 이해 한 때 카오스 이론의 선풍이 불더니 요즘에는 복잡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과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커진 것은 매우 고무적이지만, 지적 호기심에 그치는 일시적인 유행의 단막극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카오스와 복잡계에 대한 일반 교양 과학도서의 잇단 출간은 우리들에게 과학과 현실의 매개를 이어주는 새로운 논거장치로서 사회적 불만의 출구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본다. 이는 70년대 중반 이후 카프라의 책이 신과학운동의 바람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사회적 맥락에 서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 사회와 과학이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사회적 결핍 상태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과학을 현실 속으로 유입시켜서는 안 된다. 현대사회의 구도가 정량화되고 규격화됨에 따라서 비규격과 비정량의 세계를 찾아보려는 인간의 탈출구로서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과학에 대한 기대는 반드시 신기한 무엇을 밖에서 찾으려는 기대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이미 우리 몸에 간직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가장 자연스러운 눈의 자율적인 깜박거림이나 배고픔의 경고현상이 없었다면, 혹은 특정 병원균을 인식하는 항체의 자동 면역인식기능이 없었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지도 모른다. 현대과학이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다해도 이러한 인체의 신비를 아직까지는 밝혀 낼 수 없다. 가장 자연스럽지만 정말 신비한 이러한 현상들은 인체에서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연현상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신비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요즘들어 자주 논의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의 현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과학의 기본임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 전통 물리학은 이러한 복잡계를 과학탐구의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그래서 바람과 구름 그리고 물이 흘러가는 모습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 안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유체역학이 발전하고 더군다나 1960년대 부터 카오스이론이 등장한 이후 복잡성의 과학은 일반인 사이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복잡성의 모형은 다음의 네 가지 요인을 함의한다. 첫째 복잡현상 과정은 서서히 연속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누적되다가 갑자기 나타난다. 둘째 복잡계는 아주 많은 수의 자유도를 지닌다. 셋째 복잡계는 고전물리학이 다루는 닫힌계가 아니라 생명계가 열린계이듯이 그런 열린계이다. 넷째 좀 어려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비선형계이다. 그리고 환원주의 혹은 분석적 방법론으로 접근할 수 없고 옴살적(holistic)이다. <무엇이 과학인가 -관계의 세계관> 과학은 열려 있어야 한다. 검증 혹은 증명가능성의 폭을 기존의 의도된 기준에 맟추어 스스로를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지금 참으로 검증가능했던 사실도 추후에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다. 과학은 그 점을 두려워하는 폐쇄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고있는 뉴턴 고전과학은 폐쇄성의 세계관을 제공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과학의 패러다임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뉴턴역학은 더이상 물리학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전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 즉 현대과학의 자연관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정립된 고전적인 의미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결정론을 통해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한다. 이렇듯 현대 물리학은 고전 물리학의 대상인 화석화되어 고립된 대상을 다루는 학적 체계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있다. 현대 자연과학의 대상은 요소들의 계량적 합으로서의 닫혀진 전체가 아니라 자기 창조적인 열려진 전체이다. 열려진 전체 속에서 개체들의 현상은 끝없는 무질서로 보여질 수 있지만 그들 안에는 내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내재적 질서의 경험적 발견이 곧 숨겨진 변수이며, 이로부터 자연의 인과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과율은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항상 자연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의 논의가 생활 속에 들어 온 사회적 배경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영향 속에서 인간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고 믿는 자연관과 연관한다. 구체적으로는 기의 생활화는 다음의 세 가지 연관성에 추출할 수 있다. 그 연관성의 근거는 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유추된 것이다. 의술과 자연풍수 그리고 애증과 같은 인간관계와 연관한다. 첫째 풍수는 터를 가려서 집을 짓고 주거지를 마련하거나 주검의 묻을 자리를 양지 바른 자리에 택하는 오랜 생활 양식으로서 주술적 신앙보다는 다수 민중들이 공감하는 생활 속의 자연인식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풍수는 땅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논리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땅(환경)결정론이 아니라 땅과 인간 사이의 교감을 통해서 비로소 땅의 가치가 생성된다는 뜻이다. 바로 그러한 교감을 사람들은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곧 기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조선말이나 최근사에서 보여주듯이 사람의 가치보다 지리적 땅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풍조가 횡행하니 이는 곧 인간성의 파괴가 시작되었음을 미리 알리는 신호와도 같다. 교묘하게 현대판 주술주의와 땅 투기의 고리 속에 빠져 많은 뭇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풍수는 신라 말 도선 국사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통 관련학자들이 말하는데, 음택 풍수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일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보면 전라도에 풍수가 넘쳐나니 열 집 중 아홉은 지관 노릇을 했다는 말이 있고, 무라야마村山智順의 조선의 풍수를 보면 조선조 말기 전국적으로 지관이 약 5천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동네 점쟁이까지 치자면 그 수의 30배 정도는 될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왜냐고? 그만큼 우리네 삶이 극도로 불안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둘째 의술과 관련한 기의 논의이다. 의술이라고 해서 전문가 집단만이 소유하는 그런 전문기술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통상의 삶 안에서 몸의 부실과 쇄신 등과 관련하여 몸을 관리하고 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기와 연관한 언어를 상당히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차다’, ‘기막히다’ 등의 일상화법은 국어사전만 찾아봐도 그 수가 하도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셋째 애증, 화복과 관련하여 기와 연관한 화법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려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심리적인 손상, 혹은 상호간의 감정 표현 내지는 감정교환에서 기의 화법이 통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결론으로서 기는 별난 것이 아니라 이미 생활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주술주의를 배격하며> 오늘날 일상언어에서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는 새롭게 카리스마를 갖게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었다. 과학의 실제 내용과 관계없이 과학이라는 외형범주가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과 함께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고 이렇게 도그마로 변신된 개념이 내용을 지배해버리는 풍조가 만연된 듯하다. 새로운 과학의 신화가 탄생된 것이다. 과학의 개념이 기득권 세력구조에 의해 도구화되고 수단화되어 가는 상황을 지식인조차도 간과해버리는 상황을 신화화된 과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기준이 너무나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과학의 신화화는 분명히 누구엔가는 이득이 되고 있으며 누구에게는 불이익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과학이 과학 외적인 요소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그냥 넘겨 버리고 말일인지 다시금 반성할 필요가 있다. 과학 이데올로기는 합리성이라는 간판 아래서 그 명분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첨단의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곧장 반대급부적인 주술적 생기론이나 현대적 정령론(animism)도 따라서 흥하게 되는 것이 현재 과학사회학의 한 단면이다. 후기 산업사회 혹은 정보화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최첨단의 과학과 최고의 비합리성인 신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신비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기보다는 결국 상업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되가는 신비주의 산업이 문제인 것이다. 신비주의 산업 일반은 겉으로 대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지만 결국 사회마취제적 기능에 봉사하고 만다. 신비주의 산업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 이익집단의 목적달성을 위한 구호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개인의 보신주의로 전락된 생명주의 등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얼마나 깍아먹고 있는지를 잘 볼 필요가 있다. 개인 생명주의는 결국 자기 개인만을 위한 보신주의일 뿐이다. 그것이 설령 종교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정신적 위안일 뿐이다. 또한 그 현상은 한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주의의 논리를 합리화시켜 주는 도구로 전락될 것이다. 생기론이나 정령론은 기계론의 병리적 현상들을 지적해내기는 했지만 그것에 지나쳐 사회 최면제적 역할을 수반하였다. 그것은 합리성으로 상징되는 기계의 이성주의에 반하여, 그 이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도피하는 안식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반기계론적 추세는 과학 단독의 문제영역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사회학적 분석이 함께 따라야 한다. 주술화된 생기론이나 현대화된 정령론은 곧 인간 소외문제와 직접 연관한다. 왜냐하면 둘 다 고도화된 산업화에 따른 필연적 산업사회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흥 부흥종교, 밀교적 신비주의 집단, 기공에 대한 급속한 관심확대, 서구에서 동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동양에서 동양에 대한 허무한 자부심, 개인주의와 탈정치화가 가져 온 개인 서정주의의 확산 등이 바로 그 모순의 단편들이다. 결국 이 모순들의 원인은 대부분 기와 연관한 패턴들을 안에서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찾으려는 데 있다. 그 안과 밖은 心과 物의 차이가 아니며, 정신과 물질의 차이도 아니다. 內丹과 外丹의 차이가 아니며, 개인수양과 사회참여의 차이도 아니다. 바로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차이라는 사실이다. 주술적인 것, 신비한 것, 신기한 것, 단번에 낳는 특효약, 한방에 가는 비법, 일상적 노력 없이 복을 구하는 기회주의적인 기복주의, 등 등 등 등, , , 이런 비일상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삶의 소외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 - 더 읽어 볼만한 책 - 존슨 얀(인창식 역), DNA와 주역, 몸과마음 골럽(예병일 역), 의학의 과학적 한계, 몸과마음 낙화생, 면역과 한방, 열린책들 야스오, 기와 인간과학, 여강출판사 경락의 대발견, 일월서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