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의 문화변증법
2004  발제 : 민속문화연구회 학술세미나 중 <30년의 문화변증법> 2004년6월4일
; <바람결 풍류> 43호 (7월20일) 재수록

30년의 문화변증법



민족미학연구소 <풍류> 43호(04년6월호) 게재


<1> 꼭 30 전 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에서 그것도 1-2학년이라는 학생 신분으로 경남 사천 가산리 가산오광대를 발굴하고, 나중에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으로까지 등록시킨 일은 정말 자랑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내적 갈등이 우리 내부에서 표출되었다. 전통의 보존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마당극 형식의 창작극으로 나갈 것인가의 문제였다. 또 다른 갈등은 새로운 양식의 놀이문화 창출로 갈 것이냐 아니면 당시 유신의 폭거에 맞서 이념적 선전 창구로 나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 두 문제는 큰 고민과 갈등을 일으켰지만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이다. 어쩌면 풀지 못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모르게 변증법적 종합으로 이어진 것일 수도 있다. 잘 모르겠다.

좀더 크게는 “민족”과 “보편”이라는 두 기호 사이의 외적 갈등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두 가지 표제어가 행동양식으로 표출될 때 갈등의 고조는 더욱 심각했다. 또한 “실천적 행동”과 “내면적 성찰”의 갈등은 정말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고민을 수반하였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80년대에는 결코 표출될 수 없었다. 대신 “민족”과 “자주”라는 강력한 기호가 구성체의 강력한 동력이었던 기억과 동시에 그들 사이의 심각한 자기 분화의 기억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좀 더 철학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의 갈등들, “외세론”과 “내재적 발전론”, 좀 더 개인적으로는 “일상의 돈벌이”와 “이념적 관성” 사이의 갈등은 정말 현실적인 어려움이었다.

이런 갈등들 풀려고 몸짓을 해보기는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풀리지 않은 갈등들, 그렇게 30년이 지났다.

<2> 미국이 겁나긴 겁났는지, 알아서 더 기는 수구의 그늘은 군사독재를 힘겹게 물리쳐낸 우리네 내면에도 도사리고 있었다. 이 점은 탈정치화라는 기이한 상황과 맞물려 사회의 보수화를 가속시켰다. 학교앞 일미집과 왕자다방은 없어지고 그 대신 카페와 나이트가 들어섰다. 좋다. 어차피 변하는 것인데. 역사를 읽는 마음도 변하여 돌멩이와 대학교정이 아니라 촛불과 광화문으로 행동양식도 변하였다.
한편으로는 인터넷 카페와 점치는 점집이 서로 손을 잡고 대학가에 즐비해졌다. 주술성과 기계성이 동반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절묘한 변화였다.

겉으로는 논리적 모순이지만 현실에서는 문화적 동반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 점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적 조류라고 여긴다. 이런 현상을 일종의 “인류학적 모순증상”이라고 말하려 한다. 앞으로는 더 거세질 것 같다.


지난 30년간의 과학발전이 지난 300년의 발전보다 더 큰 속도를 가졌다고 말들 하지만 나는 문화적 변용과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들의 괴리적 내부의 갈등도 또한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등은 바로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과거와 관습과 전통의 해체 역시 새로운 문화구조의 축조였다. 그래서 80년대 말 이후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다는 환영적인 안도감과 함께 우리들에게 밀려오는 사회적 허탈감은 그렇게 허탈하지만은 않다.

전환사적 오류를 인정한 해도 30년의 자화상은 그렇게 찌그러진 것만은 아니었다. 변증법적 종합을 지향하는 “다름”과 “변화”의 아우성이었으며 북과 장구 소리를 두드리며, 그 소리에 어우러 춤을 추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몸짓이었다. 한번 당차게 놀아보자는 고무(鼓舞)의 맥동이었다.

최종덕씀 2004년6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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