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이미지와 주체적 자아 |
영성생활 28호(2004년 10월 24일) 87-100쪽 디지털 이미지와 주체적 자아1.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이제 디지털이라는 말의 사용은 일상 언어에서 상식이 되었다. 처음에는 최신 기종으로 등장한 핸드폰에서 시작하더니 이제는 대부분의 전자기기에 적용되게 되었다. 내가 새로 산 텔레비전이 디지털 방식이란다, 아니면 디지털 시진기가 그렇게 유행이란다, 더 나아가 디지털 산업이 미래 경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 등등 많은 이야기가 오가곤 하지만 실상 디지털의 개념적 위력에 대하여 실감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의 개념이 전자제품 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구조까지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심각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디지털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에 대비되는 아날로그 개념을 생각해 보면 좋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정의를 딱딱하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아날로그는 정보의 단위가 연속적인 반면 디지털은 정보단위가 불연속적이며 일정한 단위를 가진다. 그 설명이 정말 딱딱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그래서 좀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말해 보기로 한다. 예를 들어 물이라고 하는 정보의 전달과정을 보자. 내 물 항아리 물을 다른 사람의 물 항아리로 옮기려고 할 때, 주걱을 갖고 한 주걱, 두 주걱, 세 주걱으로 세어서 물을 저쪽으로 옮기면 물의 손실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 방식의 물 전달 효과이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물 한잔은 물의 기초적인 디지털 단위가 된다. 반면에 나의 물 항아리를 들고 물주걱 없이 다른 사람의 항아리로 직접 부으려고 한다면 옆으로 새고 흘리는 물이 있을 수 있다. 이를 은유하여 아날로그 방식의 물 전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 주걱으로 세어서 옮겨진 물은 전달의 효과는 클지 몰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의 물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물 잔 주걱 수에 맞춰진 규정된 물의 양을 상대방이 전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항아리 채 옮겨지는 물은 비록 물을 흘릴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양만큼 부어서 주걱 수와 그 다음 물 주걱 수 사이의 적절한 양에서 물 옮기기를 그칠 수 있다. 결과는 디지털 방식의 물 옮기기는 정확한 양이 전달될 수 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물의 양을 맞추기 어려울 수 있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물 옮기기는 물은 조금씩 흘리기는 하겠지만 그 사람이 원하는 양을 전달해 줄 수 있다. 물론 만약 물 주걱의 크기가 아주 작다면 상대가 원하는 물의 양까지를 맞춰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는 종래의 아날로그 카메라가 필름으로 찍은 연속적인 화면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원래의 연속적인 화면을 매우 작은 불연속적인 단위의 뭉치로 보관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그 작은 단위를 우리는 픽셀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 단위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혹은 다른 말로 해서 화소수가 크면 클수록 연속적인 원래의 화면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요즘은 텔레비전 송출방식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국가 정책사업을 시행하면서 디지털 텔레비전 광고가 많다. 그러나 디지털 텔레비젼 기능이 아무리 좋아도 방송국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파를 송출하지 않으면 디지털 텔레비전은 무용지물임을 알게 되었다. 디지털의 상용화는 단연코 개인용 컴퓨터부터였다.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작동원리는 주어진 정보를 영0과 일1이라는 기본단위의 전기신호로 바꾸어 정보를 주고받으며 보관하는 일이다. 영과 일이라는 두 가지 기본단위로서 모든 정보를 처리하다고 해서 디지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 디지털 이미지의 사회적 증상 너무 상식적인 이런 일반적인 설명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일 일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개념적 기초를 이해해야만 디지털이 일으키는 사회적 파급현상을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의 중요 개념은 먼저 모든 정보를 임의대로 편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가상현실의 문화적 충격을 수용하기 위한 절대조건이다. 디지털 음악을 하는 사람은 원래의 음악소리를 디지털 신호로 저장한 후에 그 디지털 신호들을 다시 조합하거나 수정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출할 수 있다. 음색을 곱게 다듬거나, 박자를 재조정하는 일은 기본이고 소리 단위를 그림 단위로 이전하여 음악을 그림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패러디 재구성은 디지털 편집문화의 직접적인 소산이며, 영화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 등은 디지털 편집기술을 상업적으로 전환시킨 성공적인 사례로서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가상세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디지털 편집의 결과이다. 가상세계는 구성하기 위하여 디지털의 단위를 더 작게 만들고 또한 편집기술이 뛰어날수록 가상과 실재의 차이를 감지할 수 없게 된다. 디지털 가상세계가 지니는 편집가능성이라는 특징은 정보의 제거와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지금 나의 현실이 과연 진짜 현실인지를 되묻는 비판적 의심을 이 세계에 대하여 던졌다. 혹시 가상의 세계가 현실의 실재를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묻는 철학적 반성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뭐나 대단한 철학자만의 형이상학적 사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상업적인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그대로 재연되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의심과 질문이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고상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산업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와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우리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으키는 문제들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는 단순히 컴퓨터 산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른들 역시 놀고먹고 부동산 투기 바람 등의 사회적 풍조에 집단적으로 최면되어 현실을 현실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취적 꿈의 가면을 쓴 채 가상의 길을 가곤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호환이라는 단어를 자주 말한다. 서로 다른 프로그램 사이의 호환이 가능하다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호환의 말뜻은 서로 환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이는 곧 대체가능성을 의미한다.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자. 정말 제대로 만든 인조로봇과 그것을 제작한 인간이 서로 사랑을 한다고 치자. 이런 경우 인간의 감정과 로봇의 프로그램된 인지능력 사이에서 인지적 정보가 서로 환원가능하다는 뜻이며 이를 두고 호환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판타지로 그칠지 아니면 미래 과학기술의 성과로 이어질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원리적으로는 디지털 정보단위의 크기를 더 작게 만들고 디지털 편집기술이 향상된다면 그런 이야기들이 공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될 수도 있다.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원리적이라는 표현이 가능하기 위하여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추측적 해답이 정량적으로 내려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만약 인간이 정량적으로 재구성되지 않는다면 인간과 로봇 사이의 공상적인 사랑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든지에 관계없이, 오늘의 현실은 디지털 이미지의 사회적 파급효과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 물질적으로는 디지털 산업기술의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이미지의 정신적 폐해를 말하고 있다. 자동차를 타도 디지털이며 집에 와서 올림픽게임 방송을 봐도 디지털이다. 이 원고를 쓰고 고치며 전송하고 또한 종이 활자로 전환하는 것도 디지털 정보기술의 덕분이며, 교회 안에 울려 퍼지는 신성한 음악도 디지털 앰프의 덕분이다. 당장 나의 주변에 디지털 기술의 매개인 반도체의 개수가 수백 개는 될 것이다. 문명생활을 유지하는 한에서 말이다. 한편 우리는 디지털 사회의 정신적 병리현상에 대하여 목청 높이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데서 생기는 사회적 범죄들이 늘어만 간다. 일종의 문명 병리현상들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개인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남의 공간이 형성된다고 말들 하지만, 그것은 주어지고 만들어진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지는 불연속의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문화는 분명히 우리들이 수용해야 할 것이며, 이를 부정하기에는 변화의 파고가 너무나 세다. 인간관계의 새로운 형성과정이 디지털 문화변동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 사회적 부작용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3. 디지털 이미지와 종교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디지털 사회에서 믿음의 체계가 과연 어떻게 변화할지에 관한 것이다. 과학이나 철학 혹은 일상의 문화 방식등과 같은 지식과 인지 체계는 디지털 문화의 변동에 따라 나름대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체계는 간단히 풀릴 수 없는 정말 어려운 문제들을 던지고 있다. 믿음의 체계 중에서도 특히 종교는 디지털 문화변동의 미래를 심각히 고려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너무 안일하게만 생각하고 있다. 지나온 세계 사상사에서 볼 때 종교를 허구적 관념론으로 몰고 간 반종교 사상조류가 있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상계의 역사는 종교에 대한 그런 허구적 관념론 비판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종교철학의 풍요함과 다양함으로 승화시켰다. 신의 실체를 논구했던 중세 유명론唯名論 논쟁에서부터 마르크스의 반종교 논쟁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신학 사이에서는 갈등과 조화의 사상사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종교의 위상, 신학의 논리, 교회의 권위가 사소한 침해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큰 줄기에서 강건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문화는 그 어느 사상사적 도전 이상의 위협을 종교에 주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앞서 말한 디지털 편집가능성의 범위는 물질세계보다 정신세계를 다루는 영역에서 더 심각해 질 수 있다는 뜻이다. 가상세계의 위력을 강조하는 종교비판자들은 종교적 신앙대상과 신앙체계를 신념체계들을 디지털로 변환한 후 다시 재조립하는 가상 프로그램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종교를 관념론이라고 비판한 기존의 주장은 그 주장 자체가 관념론일 수 있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말았지만, 현대 디지털에 의한 가상세계이론에 대한 주장은 종교적 가상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종교와 또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호언하기도 한다. 그러한 호언은 인류가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종교적 본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신앙생활이 공동선에 대한 지향을 상실한 채 개인의 기복적 안위에만 빠질 때 디지털의 가상프로그램은 종교적 위상을 뒤흔들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디지털 증후군에 의한 종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개인의 개체화 현상을 사회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사회영성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종교적 영성은 항상 가상적 주술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디지털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인 개인의 개체화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컴퓨터나 전자기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만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자들 역시 디지털화 되고 있다는 말이다. 혹자는 광화문에 모인 붉은 악마나 인터넷 동호회의 활성화 현상을 두고 디지털 문화의 개체화 증상에 대하여 동조하지 않거나 반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현상을 두고서 디지털 문화가 공동체 문화로 지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 중의 큰 오류이다. 개체화 증상이 정말 심해지면 자기 소외적 병증이 발로한다. 소외 병증은 자기를 밖의 세계와 담을 쌓게 하며 이러한 담은 자기를 더더욱 단절의 성곽 안으로 가두게 한다. 타인과의 소외는 자기에 대한 소외를 자기 안에서 유발하며, 이는 자기 마취현상에 빠져들게 한다. 이러한 자각증상은 그 반작용으로 집단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자극하며 따라서 집단적 치유를 스스로 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의미에서 본 종교적 광기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종교는 소외를 치유하는 인류 최고의 존재물이지만 개체의 소외,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종교의 필요성을 만들어가면 종교는 이미 그 보편성을 상실하게 된다. 물론 소외된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길을 제시한 것이 종교의 원형이지만 인류는 신석기 후반을 거치면서 개체의 소외가 아닌 세계의 소외에 눈뜨면서 세계종교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세계종교의 역할을 개체적 소외의 한풀이에 그치고 만다면, 종교는 다시 샤머니즘으로 회귀하거나 아니면 광기의 신비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종교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한 인공지능과 복제유전공학의 성과가 만약 공상과학영화처럼 실현된다면 아마도 교회의 설 자리는 없어질 수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의 존재론적 존재 증명 자체가 기초부터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신의 존재는 디지털 방식으로 환원된 계량적 단위로 쉽게 설명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 혹은 공상과학 스토리의 상황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따라오는 인간의 디지털 소외 현상 및 그로부터 유발되는 사회적 광기 현상을 더 걱정하고 있다. 4. 주체의 회복 디지털 소외는 너무 쉽게 집단 마취효과로 이전되곤 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과정에서 종교의 힘이 침해받기는커녕 더더욱 강화되는 것이 과학기술 시대의 문명적 특징이다. 물론 엄격히 말한다면 기술자본주의의 특징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종교의 색깔이 미신과 주술적 요인에 의해 염색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정말 더 심각하다. 인터넷이 확대될수록 점술 사이트가 대중의 인기를 받는 기이한 현상이 그 하나이다. 일종의 재미삼아 하는 일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인터넷 문화의 중요한 변화임을 빨리 알아채야 한다. 나는 이를 후기산업사회에서 드러나는 디지털 과학과 주술적 미신이 공존하는 이원화 현상이라고 말하곤 한다. 과학과 미신의 이원화 현상은 디지털 소외의 심각성과 디지털 산업의 부작용을 반영한 셈이다. 소외는 인간이 디지털웨어에 종속된 결과이다. 거꾸로 인간이 디지털웨어를 제어할 수 있다면 디지털 소외는 풀릴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 디지털 산업의 최종 소비자가 원하는 가상세계의 유혹은 스스로를 도취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 문화에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없으며 그렇게 문제를 회피해서도 안 된다.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 중독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중독현상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투기 중독, 명품 중독, 학벌 중독, 고시 중독, 색깔 중독, 유흥 중독 등에 비하면 디지털 가상 중독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바로 자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아의 주체성이다. 중독 현상은 자아의 주체성을 포기한 채, 삶의 근간을 주술적인 확률에 의존한다. 그러자니 삶의 추동력을 기복적인 방식에 자꾸 기대게 된다. 자아의 주체성은 신이 부여한 최고의 은혜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체적 자아는 감사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 기복의 기도는 주체를 포기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체적 자아실현이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단지 개체의 안위만을 구하는 기복의 신앙에서 벗어나 감사의 기도와 공동선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하면 결국 디지털 이미지는 주체 상실의 허망한 자아만을 낳게 하며, 신은 그만의 신이 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신앙적 영성과 가상적 주술의 혼재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주체적 자아의 실현은 곧 신앙 회복의 돌파구인 셈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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