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이타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
경희대학교 대학원신문(2005년3월2일자)
기고

진화론적 이타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


적응과 구조의 상보성




생명종의 분화와 그 과정을 전개한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종과 다른 동물종들과의 생물학적 연속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인간 존재의 존엄성 및 신의 전능성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오늘날까지 가장 소중한 인류탐구의 소산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이 시사하는 “피비린내 나는 자연의 생존경쟁”의 논리가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19세기말부터 진화론은 정치적 사회이념의 희생물로 되면서 진화론의 왜곡이 나타났으며, 또한 2차대전 전후에 걸쳐 발생한 우생학적 폭거가 생물학적 제국주의의 진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60년대 이후 다시 격렬하게 붙었던 사회생물학 논쟁은 생물학이 사회현상과 분리되기 어려운 측면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제 첨단의 현대유전학이 연구되면서 도대체 인간다움의 본성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문제가 새로이 조명되고 있다. 진화론을 통해서 전통의 규범윤리학이나 본질주의 도덕이론이 한순간에 붕괴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과학의 자만심이지만, 최소한 자연과학의 현실적 성과들을 무시한 채 순수함만을 내세운 형이상학적 타성이나 선험주의 우상들은 철회되어야 한다.

우선 다윈은 자연을 피비린내 나는 생존경쟁으로만 해석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다윈은 <종의 기원> 이후 협동과 이타적 자연현상들을 보고하면서, 자연선택의 개념과 이타주의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 차원의 진화개념을 도입했다.

1920년대 이후 종 차원의 선택진화론은 크로포트킨이나 와인에드워즈 등의 집단유전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옹호되었다. 그러나 1966년 G.윌리엄스의 획기적인 저서인 을 통해 종 선택 혹은 집단 선택의 개념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얻어내지 못했다.

이후 해밀턴의 ‘친족선택’ 이나 트리버스의 ‘상호이타주의’가 중심이론으로 부상하여 이타주의적 행동을 협동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에 E.소버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병행적으로 보기 시작함으로써, 소위 다수준 선택이론multilevel selection theory 을 새롭게 선보였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개념들은 이미 인간사회의 개념들이며 이를 생물학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G.E.무어가 지적한 자연주의 오류에 해당한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실제로 진화의 선택 단위가 개체에서 일어나느냐 아니면 집단에서도 가능한가에 대한 대체 개념들이다.

또한 이기적인 행동이 개체 번식에 도움이 되면 이기주의 이론이고, 집단 안에서 이타적 행위가 집단의 개체 수 증가에 도움이 되면 이타주의 이론인 것이다. 즉 진화론에서 말하는 이기주의/이타주의 논쟁의 본질은 개체 번식의 적합도fitness의 빈도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기존의 도덕이론과 진화윤리학 사이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진화윤리학은 규범윤리학의 진화역사적 원천이 된다는 점이 기본틀이다.

적응주의를 강화시킨 신다윈주의는 선택 수준이 개체 차원에만 적용된다고 본다. 적응진화의 메커니즘은 자손을 늘리려는 개체의 이기성의 정도이며, 선택 진화의 수준은 항상 개체 차원이라는 주장에 맞닿아 있다. 이런 주장은 현재 진화론의 주류이며, 따라서 일체의 생물학적 이타주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들은 생물학적 이타주의가 과학적 근거이기보다는 사람 사는 세상이 좀더 좋아졌으면 하는 정서적 희망의 표현일 뿐이라고 비하한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유기체의 행위는 ‘겉보기 이타주의’apparently altruism, 즉 이기적 궁극을 위한 수단적 행위로만 간주하였다. 겉보기 이타주의는 집단선택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이타적 행위를 개체선택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론들을 보통 대안적 이타주의 이론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친족선택 이론이다. 친족선택이란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의 후손을 포기함으로써 마치 이타적인 듯 보이지만, 자신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관계에 있는 친족의 자손 증식을 돕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는 이기적 적응의 진화기제이다.

예를 들어 사회성이 강한 유기체로서 일개미나 꿀벌의 경우, 자신은 알 낳기를 포기하고 그 대신 자매의 알 낳기를 돕는 극단적인 이타성의 현상을 볼 수 있다. 자신의 후손을 포기하지만 자매의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자와 동일하므로 실질적인 자신의 복제와 증식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이후 해밀턴은 친족의 개념 속에 유전자 개념을 도입하여 이른바 포괄적응도 이론을 구축하였다. 이외에 상호적으로 상대에게 이익을 줌으로서 이타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트리버스의 상호 이타주의 이론이 있으며, 이를 발전시킨 진화론적 게임이론이 있다. 또한 그 유명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도 있다. 이들 이론 모두는 집단선택 이론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이타주의 행위를 가능한 한 설명하려는 대안적 시도였다.

이런 대안 이론들이 이타적인 현실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기주의 진화선택의 입장이다. 반면 개체 차원에서 이기주의와 집단 차원에서 이타주의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적응주의 진화생물학의 특징이라는 입장이 최근 들어 부상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 동조하는 E.소버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이기적 형질 압력과 이타적 형질 압력의 벡터 합으로 진화압력이 작용한다고 본다.

또한 이타주의의 전제인 집단선택 이론을 수용하는 다수준 선택이론이 가설의 지위에서 사실의 지위로 격상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추세이다. 예를 들어 물고기떼나 새떼들의 경계병은 항상 포식위험도를 인지하면서도 이타적 행위를 수행한다. 기생 흡충강이나 아프리카 흰개미의 자살방어 등 무수히 많은 자연계의 이타적 사례들은 위의 대안적 이타주의 어느 이론에도 해당하지 않는 경우들이다.

이타적 행위의 집단이 비이타적 행위 집단보다 더 큰 적합도를 갖는다는 것이 생물학적 이타주의의 기초이다. 그리고 이타주의의 근거가 집단선택이지만, 집단선택이라고 해서 집단간 경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타주의를 인정하여도 집단간 경쟁은 계속 유지된다. 그럼으로써 집단의 군집은 안정적 다형성으로stable polymorphism 유전된다. 집단간 경쟁과 집단 내 이타성의 발현은 개체선택 이론 범주에서는 자기모순처럼 보이지만, 집단선택 이론에서는 이타적 행위자와 이기적 행위자가 무작위로 섞여 있는 집단의 안정화를 가져오는 주요 요인이다.

어쨌든 진화생물학계에서 이타주의 주장은 소수이며, 이기주의 주장과 같은 강한 과학적 논거를 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의 정신과 실천으로 살아온 어느 숭고한 카톨릭 신부님이 계셨다. 주위 사람들이 그 분을 보고는 진정한 이타주의의 현현이라고 말한다.

이타주의를 주장하는 어느 진화생물학자가 이타주의의 근거를 대기 위하여 그분의 사례를 자주 들었다고 치자. 그런데 이기주의 주장자들은 그 분을 보고는 그 분도 궁극적으로는 우리 세상이 아닌 피안의 저 세상에 있는 천국행 표를 얻기 위해서 이승에서 이타적 행위를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순간, 그 분의 이타적 모든 행위는 겉보기 이타성일뿐이며 이기성의 다른 모습이었다는 전도가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만다. 극단적인 사례를 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타주의 주장은 이렇게 항상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논쟁은 진화의 기제 중에서 적응주의를 전제한 것이다. 적응주의를 전제하고서는 이타주의 논지가 여전히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타주의를 논거하기 위해서는 적응주의 패러다임을 과감히 벗어나 구조주의 진화론을 수용해야 한다. 구조주의 진화론은 발생학적 사유를 전제해야 하며, 이는 기존의 진화종합설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보인다.

인간의 이타적 행동이나 도덕감을 오로지 적응적 산물로만 볼 경우, 그것이 비록 집단선택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원천적으로 이기적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적응주의를 기반으로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도킨스나 윌슨 혹은 해밀턴과 같은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이타적 행위의 현존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현존을 겉보기 이타성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귀결은 너무나 당연한 입장인 셈이다.

구조주의 진화론을 짧은 지면에서 설명하기에는 벅차지만, 적응진화에 영향 받지 않는 ‘항상성’homeostasis과 ‘운하화’canalization 라는 발생학적 개념으로서 생물학적 형질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타주의 형질이나 도덕감의 특질의 경우도 비록 이기적 행동특질에 비해 약한 기능의 발현이지만, 그것도 일종의 운하화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는 영장류에서 인간화hominization가 이루어지면서 인류만이 갖는 도덕적 특이성으로 진화하면서, 적응기제와 다른 방식의 구조적인 도덕감이 형성되었다는 설명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형질 구조화는 이타적 표현형이 유전자풀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을뿐더러 생물종마다 다른 형질의 고유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형질로서의 이타적 도덕감 역시 마찬가지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만이 지니는 성대의 발생학적 기관에서 언어행위 나아가 논리적 이성, 혹은 환경을 인지하는 감각기관에서 군집/집단을 인식하는 기능 나아가 도덕적 행위와 자아를 반성하는 행위 등은 매우 밀착된 연속적 상관성을 지니며 이는 적응진화로 설명하기 어려우며, 구조적으로 안정된 종 고유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구조주의 진화론은 물론 적응진화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상보적이다. 특히 집단선택 적응기제와는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이런 진화의 성격은 이타주의/이기주의 논쟁이나 적응주의/구조주의 논쟁에 관계없이 생물학 속에 잔존했던 형이상학적 근거주의와 생기론이 소거되는 획기적인 전환이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최근 들어 유전자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기세등등한 환원주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철학적 도덕이론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현대과학의 성과를 도외시 한 채 여전히 플라톤이나 칸트 등을 내세운 선험적 도덕이론의 성곽에서 벗어나 진화론적 자연주의를 수용하는 일은 당연한 과제이다.

한편 일차적 물질로 환원되기 어려운 인간 고유의 구조적 도덕감이 존속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 과학 역시 진정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골치 아픈 철학적인 말이냐고? 그렇다면 과학의 용어를 써서 다시 말해보자. 기능과 외형으로 표현된 형질이 유전자 단백질의 요소로 환원되기 어려운 현실적 이유는 물질적 요소들을 구성하는 구조적 이해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끝>
경희대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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