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학의 철학과 황우석 신드롬 |
교수신문, 최종덕의 문화비평 시리즈 "면역학의 철학과 황우석 신드롬”, 교수신문(9월26일) “과학의 희망, 희망의 과학”, 교수신문(8월22일) “면역학의 철학과 황우석 신드롬”, 교수신문(9월26일) “기득권의 피해의식과 과잉반응”, 교수신문(10월31일) “쌀알 대신 반도체 칩알을”, 교수신문(12월12일) 면역학의 철학 그리고 황우석 신드롬생명체의 면역시스템은 기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반응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천연두 백신처럼 턱 있는 어류 이상의 생명체에서 진화된 획득면역과정은 후천 생성 면역 기제로서 선천적 자연면역 과정에서 볼 수 없는 다층적인 현상을 보인다. 외부 미생물, 독물, 이식세포, 혹은 외부 장기 나아가 물질 자극 등의 외부 항원에 대하여 항체를 형성하는 면역 기제는 결국 자기self가 외부의 비자기non-self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발생학적 구조의 현상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자기를 타자로 오인하여 자기가 자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생긴다. 관절염과 같은 자기면역질환이 그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타자로 오인 하는 경우는 자기의 실수도 있지만 자기가 자기의 정체성을 상실했을 경우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자기와 비자기 혹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능력은 생물 진화의 정점에 있다. 예를 들어 외부 세균에 반응하는 획득면역은 실제로 무한 수의 잠재적 세균 종류가 가능하다. 그것은 무한수의 항체마다 특이적인 항원을 자체적으로 고유 단백질 방식으로 생산하는 반응을 보이며, 그 반응의 기제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놀라운 생명의 비밀이기도 하다. 결국 면역의 중요한 의미는 자아와 타자를 인식하는 능력이며 둘째로는 분자 차원의 자기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면역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정되고 정지된 생명계의 실체를 분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나긴 진화의 시간을 통해 변형과 수정이 거듭된 생명의 시간성을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동일한 타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상보적 조건이 다르다면 다른 면역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타자도 자기도 영원한 고정성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마치 철학적인 주장 같지만 진화의 시간여행에 가로놓여진 생물학적 객체란 기계적 객체와 다르며, 자기와 비자기(타자) 사이의 상관성 즉 거부와 관용의 관계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님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면역의 진화적 시간성을 수용할 수 있다면 최근 톱뉴스를 차지하는 배아복제기술 논쟁은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다. 요즘 한국의 황우석 교수 연구팀의 배아복제기술이 국제적으로 대단한 조명을 받고 있다. 몇 년 사이에 ‘세계 최초’라는 연이은 과학적 성과물을 내면서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 못하는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기껏해야 기독교 측에서 인간 존엄성 수호라는 기치아래 이념적 반대 깃발을 세우거나, 생명윤리나 과학사회학 입장에서 메아리 없는 항변을 할 뿐이다. 이나마도 “우리나라가 잘 좀 살아보자는데, 당신들은 현실도 모르는 괜한 딴지나 걸고 있냐”라고 되받아 치면, 항변자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세계 최초”라는 마술에서 깨어나자. 그리고 “민족주의” 과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의 반대 입장은 결국 도그마 대 도그마로 전락될 뿐이며, 윤리학자의 항변은 현실감각이 없는 인문사회학자의 칭얼거림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황 교수 팀은 면역학의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현실의 면역학은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을 고정된 틀로 보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최초이며 최고 기술이라고 자부하는 자기 체세포 배아 복제 기술 역시 면역거부 반응의 근본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진화의 역사에서 최초의 타자였던 핵을 뺀 난자의 미토콘드리아를 그 시간성을 배제한 채 마치 정자의 핵을 키우기 위한 영양분 정도로만 다룬다면 면역의 자기성selfness 파악은 불가능이다. 분화의 과정을 마치 자동적인 발생학으로만 취급한다면 전기 융합 이후 역분화의 이변과 염색체 텔로머레이즈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한때 세상의 뉴스를 확 뒤집어 놓았던 돌리 양의 탄생과 달리, 그 돌리 양이 죽었을 때는 왜 그리도 매스컴이 조용했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나아가 예정된 세포 죽음programmed cell death 현상이나 몇 세대를 거치면서 추후에 나타날 RNA 뒤틀림 현상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난치병 치료의 꿈은 사라져만 갈 것이다. 물론 치료목적 복제기술이 개체 복제와 완전히 다르다는 말을 동급 실험실 연구자들이 따라 줄지도 의심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난제들을 황 교수 연구팀에서 당연히 알고 있을뿐더러 대부분의 관련 전공자들은 다들 아는 사실일터인데, 왜 묵묵히 잠자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엉뚱하게도 철학을 하는 내가 면역학이 어떻다는 둥 떠들어 대고 있다. 그래도 분자 단위 이하의 생물학적 대상은 고정된 자기-객체가 아님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기능적 접근방법론에 그치지 말고 진화적 시간 변이를 고려하는 면역학을 연구의 중심에 둘 때, 비로소 황 교수 연구팀은 스스로를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의 의료복지 구현을 이끄는 세계 과학자의 무대에서 자랑스럽게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면역학 관련 나의 입장은 Alfred I. Tauber를 따랐음) 원문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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