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과 자유는 그렇게 충돌되나요? |
2006 한국윤리학회 워크샵 “윤리학의 학제적 탐구”2006년8월18일 논평문 : 생물학과 자유는 그렇게 충돌되나요?<1> 생물학과 철학이 만날 수 있는 사회생물학의 범주들은 다음과 같다. 1. 극우 성향 및 우생학 편향의 사회생물학 2. 윌슨 류의 사회생물학 : 후성율을 인정하는 적응주의 그룹 3. meme 이라는 문화적 (자연)선택단위를 가정하는 도킨스 류의 사회생물학 4. John Maynard Smith의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 Nash 뷰티풀 마인드 그 영화 주인공으로 나온 노벨상 받은 의 Nash Equilibrium도 이 사례)의 설명도구인 evolutionary game theory에서 발전하여 경제학 이론으로 조직화한 사회적 응용윤리 해석이론 5. 사회심리학과 적응주의 진화론을 결합하여 최근 유행하는 진화심리학 경향의 사회생물학 6. 반적응주의의 계통생물학적 사고방식을 도입하여 시스템 전체의 변이를 통해 진화를 설명하는 굴드 식의 생태주의적 사회생물학 7. (철학적) 인식(론)의 과정과 결과를 과학적 설명범주와 연계시킬 수 있다는 자연주의 과학철학 : R. Giere 8. 제한적 합리성, 적응적 사고라는 개념을 통한 합리성과 자연성의 연속, G. Gigerenzer 9. 모든 철학적 실체론을 부정하는 구성주의에서 본 진화생물학의 사회설명범주들 10.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통해 형성된 정지성과 불변성의 실체론 철학과 달리 자연의 운동성과 인간의 행동/사유 구조를 등질화한 동양적 세계관의 진화론적 사유구조 이 중에서 발표자는 1과 후성율을 뺀 2, 그리고 3에 해당하는 사회생물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발제자는 사회생물학의 방법론을 결정론과 환원론 두 가지로 국한하여 몰아치고 있는데 진화생물학은 발제자의 비난대상인 그런 극우적 경향 말고 또 다른 비판사회적 경향도 있다. <2> 자연은 해석되어진 자연이며 자연 개념은 kulturprodukt라고 하면서, 자연과 문화를 단절시키고 나아가 문화를 자연에 앞서 우위에 배치하는 발제자의 의도는 또 다른 선험주의 철학에 매몰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다윈 시대의 빅토리아 사조의 큰 특징은 (1)자유와 자연선택을 스펜서 방식(적자생존론과 약육강식론)으로 연결시키고 (2)무목적성의 진화를 목적지향적 진보로 대체하려는 왜곡을 시도했으며 (3)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유토피아에 이르는 선험주의를 가능한 한 과학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빅토리아 사조가 오늘날과 같은 과학절대주의 및 과학기술과 자본이 결합한 과학자본주의의 원천이기 때문에, 논평자는 발제자의 과학비판에 대하여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래서 발제자가 결정론과 환원론을 비판하는 것 역시 동조한다. 나도 평소에 과학적 결정론과 과학 환원주의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 모두 결정론과 환원론 범주에 국한한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과학비판은 두 줄기를 갖는다. 한 줄기는 과학기술사회가 갖는 과학기술 자본 및 연관한 정치집단의 신흥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이다, 다른 또 하나의 줄기는 과학사상 즉 과학적 세계 혹은 과학적 세계관 자체가 함의하는 결정론과 환원주의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다. 발제자 논문의 주요 근거인 로우즈 책은 과학의 정치권력화를 비판하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과학비판세력이 거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매우 이례적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사조들은 있었다. 둘째 줄기와 관련한 그 사조는 대부분 과학적 세계관의 기원을 뉴턴과 데카르트에 두고 (더 나아가 플라톤까지를) 이들의 기계론이나 이원론 혹은 실체론과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이 상투적이었다. 과학비판의 첫째 줄기와 둘째 줄기가 만난 유일한 지점이 바로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는 이미 토마스 쿤 이래 제기된 문제이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론의존성(theory ladenness)의 문제를 제시한 듀엥 P. Duhem에게서 시작되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신화가 붕괴되었다는 점만 해도 대단한 현대과학사의 진보였다. 발제자는 이러한 가치중립성의 허구가 깨지는 상황들을 제시하면서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맞다. 나 역시 생물학적 인간학을 공부하면서 생물학적 제국주의에 맞서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발제자는 문화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문화의 적자로서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한 지나침은 아들이 아버지를 낳았다는 것에 비유되는 시간계기적successive 역설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경우, 자칫 사회적 관념론이라는 포획망에 접혀들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조차도 문화의 한 양상으로 간주하여 유명한 마르부르크 철학과 야니히 교수에게 인간 진화의 기원인 단세포 생명체의 생물학적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야니히 교수가 여기 없으니 발제자가 대신 답을 해주시면 좋겠다. 간단히 말해서 (1)세계는 인간 외의 존재도 존재하며 (2)의식을 발현하지 않는 생명체도 엄연히 존재하며 (3)그 생명체는 기본 아미노산과 단백질로 구성된 진화론적 물질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 그렇다면 그런 당신은 유물론자가 아니냐고? 그렇다. 나는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말한다. 유물론이라는 말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보통은 진화존재론자라고 나 스스로를 말한다. 또한 원래 나는 ‘자연철학’ 전공이라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설명하기 싫어서 그냥 ‘과학철학’이라고 말할 정도로 나는 자연주의자라고 스스로를 말한다. 그런 유물론의 머리에서 자유가 나올 수 있느냐고 누가 또 반문한다. 그래서 또다시 대답한다. 유물론과 자유는 결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이는 야니히 교수도 긍정할 것이다. 나는 야니히를 멀리서 몇 번 보았는데 내가 그를 보았던 아주 옛날, 그는 총장인지 혹은 부총장인지를 할 때여서 철학적 대화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다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고 너무나도 분방하지만, 통일된 한 가지 점은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부터 실체론적 철학이 아닌 변화(다윈의 변이)의 철학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밝혔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진화생물학과 인문사회과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자유의 여지가 더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화론은 도덕을 해명해가는 과정에서 더 많은 자유의 상상력과 인성(론에 대한)의 개방성과 비인과적 언어의 풍부함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발제자의 원고 안에서 자유에 대한 사랑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생물학과 자유가 충돌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일부러 한 말이다. 발제자는 이 글을 통하여 너무 많은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고 나는 느꼈다. 소절 하나하나가 독립 논문으로 구성할 만한 주제였지만, 그래도 자유의 횃불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여전히 권력지향적 사회생물학이 상존하고 있으므로 왜곡편향의 사회생물학에 대한 발제자의 비판은 사회적으로 볼 경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문제를 진화론의 최근 선택수준 논쟁, 그리고 문화 논쟁, 자유의지의 철학적 논변들을 소개하면서 도덕의 문제로까지 이어간 점은 더욱 좋았다. 이렇게 자유와 도덕의 문제는 당연히 분리할 수 없는 주제다. 여기에 진화생물학이 개입하는 이유는 발제자가 비판하듯이 결정론과 환원론으로 자유와 도덕을 뒤집어씌우려는 과학 무소불위의 전략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깨끗한 규범주의의 허상과 도덕 이데아론의 신화를 깨려는 시도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이미 결론 부분에서 발제자가 한계와 가능성을 진단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발전된 논의를 발제자의 답변에서 기대하고 싶다. <끝> |
한국윤리학회 워크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