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동학, ‘열림’과 ‘어울림’의 철학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7년 봄 정기학술대회 일정표 -
동학, ‘열림’과 ‘어울림’의 철학 - 미래 사회를 위한 가치의 재발견

* 제1부 철학으로서의 동학에 대한 접근 10:30~13:50, 사회: 조은평(방송대)
10:30~10:40 개회사&축사(회장·이사장)

10:40~11:20 발표주제1 : 수운 최제우의 사상과 그의 시대-철학과 종교 사이
발표자 : 이지(이화여대)
논평자 : 김교빈(호서대)

11:20~12:00 발표주제2 :초기 동학의 사상적 발전에 대하여? 최제우와 최시형의 방법론 비교를 중심으로
발표자 : 윤태양(동서울대)
논평자 : 전호근(경희대)

12:00~13:10 점심시간

13:10~13:50 발표주제3 : 북한 철학계의 동학·천도교 이해와 그 특징
발표자 : 박민철(건국대)
논평자 : 김정철(한중연)

13:50~14:00 쉬는 시간

* 제2부 동학의 사유는 다문화 사회에 무엇을 시사하는가? 14:00~16:50, 사회: 김종곤(건국대)

14:00~14:40 발표주제4 : 천도교의 문화관
발표자 : 송인재(한림대)
논평자 : 구태환(상지대)

14:40~15:20 발표주제5 : 사회적 소통을 위한 천도교의 대중 계몽 운동-여성, 어린이 운동을 중심으로
발표자 : 김세리(한양여대)
논평자 : 최종덕(상지대)

15:20~15:30 쉬는 시간

15:30~16:10 발표주제6 : 동학사상의 주체 개념으로서의 '한울'
발표자 : 유현상(숭실대)
논평자 : 김성민(건국대)

16:10~16:50 발표주제7 : 로컬리티와 커먼즈 담론 공간에서 본 동학(東學)
발표자 : 김치완(제주대)
논평자 : 김성우(한철연)

16:50~17:00 쉬는 시간

17:00~18:00 전체 집담회 및 종합 토론, 사회: 남기호(제주대)

18:00~18:15 최종덕 회원 동학-판소리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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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문>

한철연 여름학회 2017년7월6일

김세리 선생님 논문에 대한 논평 : 가르치려 들지 마라

최종덕(한철연)

김세리 선생님의 이 논문은 동학에 나타난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을 강조한다. 당대에서 문제된 인격의 선천적 동등성이란 계급 차별, 직위 차별, 남녀 차별, 부자간 차별과 나이 차별의 역사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생명의 존재론이다. 이 글은 그 중에서도 어린이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부각하고 있다.

인격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의 실현되면 그것이 비로소 삶의 자유이다. 인격적 동등성을 누린 어린이가 커서 자유로운 어른으로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논문에서 알게 되었다. 자유로운 어른이야 말로 당대의 일제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학의 생명의 자유론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기초가 된다. 자유를 희망하는 당대의 동학은 계급에 대한 탈피와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통과제의를 거쳐야 했다.

탈피와 저항이 바로 동학의 기본정신이다. 저항과 탈피는 거창한 독립운동 이데올로기나 종교 경전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저항과 탈피는 일상생활에서 남녀 혹은 부부 사이에 가로놓여진 사회적 차별이나 어린이를 함부로 다루는 어른들의 관습을 버리고 동등한 관계임을 실천하는 것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동학의 기본 철학이다.

김세리 선생님은 동학의 이런 실천정신에서 어린이에 주목하였다. 동학에서 보여준 어린이 존중사상이 단지 인권이라는 개인의 해방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당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미래를 가늠하는 깃대종 역할을 한다고 필자는 강조하였다. 필자 김세리 선생님은 이를 “변화와 희망의 아젠다”라고 표현했다.

변화와 희망의 아젠다가 실천되려면 강한 철학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고 논평자는 생각한다. 그러한 토대를 살펴보기 위해 필자가 방정환 선생의 글을 인용한 것을 다시 따왔다.

『어린이』에는 수신강화 같은 교훈담이나 수양담은 일체 넣지 말아야 한다. 저희끼리의 소식, 저희끼리의 작문, 담화 또는 동화, 동요, 소년 소설 이것만으로 훌륭하다. 거기서 웃고 울고 뛰고 노래하고 그렇게만 커가면 훌륭하다. 그림을 많이 넣어 부드러운 감정을 유발하고 한편 미적 생활의 요소를 길러 주어야 한다.

논평자는 이 글을 교훈이나 경험담을 어린이에게 억지로 가르치려들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어린이는 어떻게 세상사를 배워갈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간단하다. 아이들도 다 알고 있거나 크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전제에서 위의 인용문이 가능하다. 어른들은 그저 올바르고 제대로 돈 행동과 생각을 하면 아이들이 모방을 하고 따라서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나쁜 짓하면 어린이도 따라서 할 것이다. 자기 자식을 아비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잘 키우고 싶으면 아비가 그렇게 하고 싶은 방향대로 잘 행동하면 될 뿐이다. 이런 선천성의 가능성이 바로 존재론적 동등성이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존재가 서로 동등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생명성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은 생명 존재론의 전제이다. 쉽게 말해서 생명존재론이란 일상생활에서 남녀, 부부, 계급, 직위, 나이의 차이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실천적 아젠다의 철학적 토대로 볼 수 있다.

동학의 생명존재론의 생명이란 풀 한 잎, 한 잎의 작은 생명이 우주의 생명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계급이나 성별, 지식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안고 태어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백성 한 사람마다에게서 대생명의 흔적을 찾아내어 되살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의 생명존재론은 조선 전통의 성리학 전통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기존 성리학에서 대인은 소인이 지향해야할 모델이며, 거꾸로 소인은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계도되어야 할 계층이었다. 기존의 유가적 수양론에 의하면 성인의 훈교를 통해 무지한 자는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무지한 자가 훈교되지 않는다면 계속 무지한 채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면 동학으로 촉발된 생명존재론은 일방향적 군주정치나 성인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다. 동학은 빈한한 유랑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크나큰 인간관의 변혁을 일으켰다. 군자가 소인을 훈교하도록 정초된 성리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동학은 세상의 도탄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생명존재론의 씨앗은 일방적 계몽정치를 부정한다. 오히려 개인들 즉 백성은 이미 남녀의 평등성, 아이와 어른의 평등성, 양반과 상인의 평등성의 마음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상태다. 단지 그런 마음이 미발현 상태일 뿐이라는 철학적 존재론을 표명한다.

미발현의 마음을 발현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조선말 생명 존재론의 고유성이며 독특성이다. 그런 변화로의 반등을 촉발하는 철학적 기반은 조선 양명학이다. 중국 명나라 시기 왕양명에서 시작된 양명학이라는 철학은 대학의 격물치지를 양지良知라고 해석했다. 즉 생명의 힘과 자유의 권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에 관계없이 임금이나 신하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그런 내재된 자기를 발견하는 힘이 바로 양지인 것이다.

자기 안에 이미 군자가 들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소인도 자기 안에서 군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양명학의 인식론은 조선말에서 일제 압정기로 거치면서 생명사상의 뿌리로 발전했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의 사유구조는 평등과 주체, 자립과 현존을 세울 수 있는 철학적 기초이다. 또한 양지는 양명학의 인식론적 기초인 몸과 마음이 하나 되도록 하는 생명사상의 근간인 지행합일의 논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2대 교조 해월(1827-1898) 선생은 35세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입교한지 불과 2년만인 37세에 교조가 되었다. 그렇게 가능한 이유는 동학 안에 내재된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良知와 맥을 같이하는 인내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천적 양지가 있었기에 단박에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이고, 도를 깨치면 누구나 교조가 될 수 있다고 1대 교조 수은 선생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막 돌아온 방정환 선생은 이런 동학의 인내천 철학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방정환 선생의 심장이 휘둥그레졌었다. 이런 인내천의 철학이 어린이에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방정환 선생이 깨달았다.

이후 그는 짧았던 인생기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논평자는 철학에서 별로 혹은 크게 다루지 않은 어린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했다. 실제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안에 이미 양지(良知)로 있었지만 감춰져있었거나 억압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관점일 것이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을 읽을 수 있고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행운이다.

마지막으로 어린이(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기저기서 찾아본 것을 정리해 보았다. 자식을 두고 있는 어른이라면 그 어린이는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면 된다.

● 어린이를 억지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 훈계하지 않는다.

● 어린이 앞에서 잘난 체 하면 어른이 바보다

● 여자나 남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인격적으로 동등함을 매번의 행동 전에 되새긴다.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자식)를 때리지 않는다.-“어린이도 한울이니 아이를 때지리 마라”

● 어린이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동몽접장, 아녀자에게는 부인접장이라고 호칭했다.

● 억지로 하는 것은 오래가지 않으며 자연적이고 나의 동기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 폭력으로는 상대를 강제도 못하고 추종도 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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