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에 대한 오해
시민과학센터에서 발행하는 <시민과학>68호(07년10월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통섭 개념에 대한 오해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는 우리 시대 최고의 대중과학자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그 유명했던 윌슨 교수와 함께 동물행동학을 연구한 보기 드문 고급 연구자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에 나와 개미와 침팬지 이야기를 하는 최재천 교수의 대중교양 강의를 우리들은 정말 재미나게 들었다. 서양인이 제작한 기존 동물의 왕국 류의 다큐멘터리 말고 한국사회에서 그런 자연세계의 이야기를 접한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개미 생태계의 이야기를 빌려 인간 사회의 치부를 꼬집어 말할 때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호기심을 더더욱 자극하였다.

오늘 나의 이야기는 최재천 교수가 그의 지도교수였던 윌슨 교수의 저서를 번역한 통섭이라는 책에 대해서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 제목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데, 그 제목과 관련하여 너무 많은 사연이 있기에 이렇게 따로 쓸 정도가 되었다. 그 사연을 말하려면 우선 윌슨과 같은 대학 고생물학 교수로 있었던 굴드 교수와의 관계를 말해야 한다. 62살의 나이로 오랜 지병으로 일찍 죽은 스티븐 굴드 교수는 보수 성향의 윌슨 교수와 같은 연구동에 있었어도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었던 악연이 시작되었다. 다혈질의 굴드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답게 평등한 인간사회를 원했으며 따라서 <사회생물학> 저서로 유명해져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옹호하는 듯한 윌슨 류의 사회생물학적 해석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아주 젊은 나이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로 대중매체의 각광을 받게 된 도킨스 교수 역시 굴드에게 강한 비판적 논쟁상대였다. 한편 재작년에 한국에 다녀간 마이클 루스 교수는 굴드 교수를 강하게 비판하는 보수성 강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기독교 사회에 속하면서도 창조론을 부정하는 진화생물학자이다. 도킨스와 굴드는 무신론에 가까우며, 윌슨과 루스는 반창조론자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친교회적인 양면성을 갖고 있다. 도킨스의 문화적 밈의 개념과 윌슨의 후성성 개념을 통해 그들의 물질환원주의 특성을 무마하려했지만 윌슨과 도킨스가 생물학적 환원주의자인 것만은 속일 수 없다.

이 정도 말하면 <통섭>으로 번역된 윌슨의 책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 윌슨이 밝힌 consilience 어원은 휴월(William Whewell, 1794-1866)이 과학이론의 포괄적 통합을 일러 “consilience of inductions" 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휴월이 말한 이론 통합은 작은 지류들이 모여 하나의 큰 강이 되듯이 작은 이론들이 더 포섭적인 큰 이론에 의해 통합되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이러한 통합의 과정은 휴월이 인정했듯이 일방향적이고 환원적이다. 지배이론에 의해 작은 이론들이 남김없이 환원된다. 결국 큰 이론과 작은 이론은 지배와 종속의 관계이다. 그런 관계를 연속적이며 이를 당시에는 과학의 진보라고 했다.

통합 이전보다 통합 이후가 더 포섭적이고 더 좋은 이론이라는 연속성의 진보는(1837, History of Inductive Science) 그로부터 100년이 더 지나서 토마스 쿤에 의해 반박되어졌지만 어쨌든 환원주의 인식론의 기초를 가져다주었다. 정확히 100년이 지나 과학철학자 슐릭Schlick에 의해 주도된 통일과학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조: 20세기 초 유럽 비엔나에서 시작된 환원주의 운동으로서 사회학적 현상은 심리학적 현상으로 환원되고, 심리학적 현상은 생물학적 현상으로 환원되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물리학적 현상으로 설명된다는 철저한 물리환원주의의 시효이다.)

의 저자 윌슨 역시 휴월의 기본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전형적인 물리환원주의를 고수한다. 물론 윌슨 역시 생물 현상 혹은 생물 형질 모두가 물리적 기본단위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환원이 안 되는 문화적 요소들이 생물유전학적 요소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윌슨은 충분히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윌슨은 공진화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유전자와 문화가 공진화coevolution 한다고 했다.

공진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윌슨은 그 유명한 후성규칙epigenetics rules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지만, 그는 원리적으로 강한 환원주의 신봉자임을 속일 수 없었다. 이러한 강한 환원적 포섭의 관계는 결국 문화로 상징되는 인문학이 유전자로 상징되는 자연과학으로 환원되고 종속될 것이라는 종속 통합을 강하게 함의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윌슨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통합을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대등한 통합이 아니라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종속되는 일방향적 통합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윌슨의 지식통합 배경에는 몇몇 문제가 도사려 있다. 그 중에서 진화생물학과 관련된 것을 지적한다. 우선 consilience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론은 윌슨이 오래전부터 제시해온 후성규칙 개념에 있다. 후성규칙이란 유전자 결정론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후천적인 문화환경의 변화가 생물학적 표현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보조이론이다. 이는 유전자와 문화가 서로 공진화한다는 이론의 일환이다. 공진화 개념 자체는 인정될 수 있지만, 유전자와 문화가 공진화한다는 것은 윌슨 스스로 안착하고 있는 적응주의 진화론과 내부적으로 위배된다.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들이 고수하는 전통의 적응주의 진화론에서는 당연히 진화의 방향은 없으며 목적이 부정되는 무목적성을 갖는다. 그런데 문화란 원래부터 인간의 목적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은 인류학의 당연시된 귀결이다. 바로 이 점에서 유전자와 문화는 진화의 속도와 방향이 달라서, 윌슨의 공진화 이론은 그 이론 내부의 논리적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윌슨이 진화생물학이 아닌 발달생물학적 기원을 갖는 후성규칙 개념과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을 세웠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선생명공학 현장의 현실에서 볼 때 유전자와 질병현상들, 유전자와 표현형질들 사이에서 서로 일대일 대응이 불가능하고 환원이 불가능한 실제의 상황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원의 투망에 걸리지 않는 무수히 많은 생물학적 현상들을 추가로 설명하기 위하여 윌슨은 일종의 보조이론으로서 후성규칙과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을 축조한 것이다. 윌슨이 별나서가 아니라, 그는 단지 환원주의 과학이라는 서양사조의 큰 흐름 속에 같이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윌슨은 그렇다치고, 그러면 최재천 교수는 어떠한지 질문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가 “지식의 대통합, 통섭”(2005)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와 이화대학교에 통섭원이라는 이름의 규모있는 연구소가 새로 차려질 정도로 상당히 유명해졌다. 최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그리고 상당히 많은 대중매체 인터뷰에서 통섭이라는 용어를 선택하기까지의 기나긴 지적 여정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용어 선택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그는 전통사상인 원효사상과 성리학 그리고 최한기 등을 거론하면서 통섭 번역용어의 타당성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통사상에 나오는 통섭의 의미와 최 교수가 말하려는 통섭의 의미 사이에는 간격의 골이 있다는 점이다. 우선 최한기에서 통섭은 사회적 차원에서 백성을 통치하는 통민운화(統民運化)의 통섭과 우주적인 차원에서 중력의 통합력을 의미하는 천지운화(天地運化)의 통섭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합쳐진다는 최 교수의 통섭과는 좀 다르다.

그리고 최 교수는 화엄사상 등을 언급하면서 모든 것을 모아내는 우주적 네트워킹 같은 이미지를 도출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원효사상에서 그런 의미는 많아도 통섭이라는 용어는 한번도 나오질 않는다. 원효를 해석하는 후대 성리학자들에게서 통섭이라는 말이 쓰여지긴 하지만 원효사상에 한정된 고유한 의미라기보다는 성리학 일반으로 사용된 용어일 뿐이다.

아마 和諍사상을 일러 통섭이라고 한 모양인데, 원효에게서는 굳이 통합조차도 의도하지 않는 ‘자유로움’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 성리학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통섭의 의미는 다행히 대개 비슷하다. 대표적인 의미는 心統性情이라 하여 심이 성과 정을 하나로 아우른다는 의미다. 성리학의 주요 주제로서 실은 최재천 교수가 의도하는 의미와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번역어로 통섭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 나는 왈가불가 하지 않는다. 용어선택은 번역자 마음대로이기 때문이다. 개념을 그렇게 나름대로 사용한다는 점에 이의가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원저자인 윌슨의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consilience 의미가 번역자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consilience를 통섭이라고 번역하면 그 통섭은 원래 저자가 의도했던 개념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최 교수는 전형적인 물리환원주의 방법론의 정점인 “consilience” 개념을 “통섭”이라고 번역하면서 원효와 성리학, 최한기 등을 거론하여 consilience 개념이 일반인으로 하여금 마치 원효처럼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양방향적인 관점의 합일 수준인 양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천 교수의 염원은 윌슨처럼 일방향성의 환원적 통합이 아니라 상호적 통합에 있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면 최 교수는 윌슨의 저서의 유명도에 의존하지 말고 최 교수 고유한 정체성으로 통섭의 의미를 전개해야 한다고 본다. 최 교수는 무엇을 따를지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 윌슨처럼 물리환원주의자로서 모든 인문사화과학을 자연과학에 종속적으로 환원하는 그런 통섭을 표명할 것인지 아니면 윌슨과 별도로 독립적인 최재천 교수의 고유한 정체성을 갖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동등한 상호통합을 표명할 것인지 분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최재천 교수의 통섭은 윌슨의 책을 번역하면서 얻은 결과라서 분명한 표명이 어려울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성을 보여야 한다. 최재천 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 정신을 오도할 수 있는 사회적 오류를 미리 막기 위함이다.

나는 과학 특히 생물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본래 직업은 인문학자라서 인문학이 과학에 종속되는 윌슨의 그런 통섭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서로가 대화하려면 서로를 동등한 입장으로 배려해 주어야 한다. 종속적 포섭을 통해서는 통합을 결코 이뤄낼 수 없으며, 과학 내부에도 도움 될 일이 별로 없다. <끝>

* 이 원고는 2007년7월20일 한국의철학회 생물철학 집중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을 추린 것입니다.
시민과학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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