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로봇이 서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최종덕,김시천,강신익 역음, 청바지시리즈6권
<과학청바지> (2008년3월), 웅진지식하우스 청바지시리즈 6권

중에서 <사랑에 관한 꼭지>

인간과 로봇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1. 인간의 정체성을 질문한다.

인간과 로봇이 사랑을 서로 한다는 이야기는 어느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상스토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래의 과학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한다면 인간의 감정과 사유를 똑같이 공유하는 로봇이 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꽤 있다.

반면에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위적으로 제작할 수 없다는 믿음도 강하다. 두 믿음 중에서 어느 것이 타당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두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은 철학의 주요한 과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적 진단은 결국 사랑이 무엇이고,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간접적인 사유과정이기 때문이다.

우선 로봇이 인간처럼 사랑을 하려면 인간과 로봇이 서로 같아서 누가 로봇인지 누가 인간이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여야 한다. 제3삼자가 그들을 구분할 수 없을뿐더러 그들 둘 사이에서도 구분할 수 없어야 한다. 사실 이런 정도로 구분할 수 없다면 로봇이라는 개념 자체를 사용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내가 로봇일 경우 나를 만든 제작자만이 내가 로봇임을 알고 정작 나 자신은 모를 경우 이는 완전히 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 올 수 있다. 기독교는 그 제작자 대신에 조물주 신이 대신한다. 그래서 조물주의 창조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각기 운동한다. 혹시 그 조물주 역할을 로봇 제작 과학자가 대신한다면, 그 로봇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제작자에게 운명 지워져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로봇이 나라면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런 질문을 처음 던진 철학자는 바로 데카르트였다. 그는 내가 나인가라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나의 정체성을 찾을 때까지 질문을 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끝내 그 답을 찾았다고 했다. 나를 의심하는 사유, 그 의심 자체가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을 근거한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곧 데카르트의 간판 문구처럼 된 것이다.

현존하는 내가 혹시 제작된 로봇이 아닐까? 아니면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런 로봇을 만든다는 것이 인간의 과학으로 가능할까? 이런 엉뚱한 질문과 사유 가능한 답변들을 추적하려는 것이 이 글의 방향이다.

2. 사랑을 계량화할 수 있을까

먼저 로봇과 인간이 사랑을 하려면 로봇인간이 성립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의 힘이 필요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려면 과학기술 이전에 먼저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인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이해를 전제해야 한다. 현재의 과학으로 보아, 일선과학자는 행동주의 방법론으로 인간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행위 메커니즘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인간 행위는 사유적 행위와 감정적 행위 등으로 나뉜다. 추론하는 능력과 감정표현의 능력을 말한다. 이를 위하여 종합적 인지과학과 인공지능의 과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인공지능의 연구수준은 초보적인 추론능력에 대한 시뮬레이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나마도 감정표현에 대한 시뮬레이션 연구는 전무하다고 보아도 좋다. 쉽게 말해서 복잡한 연산능력이 가능하고, 주어진 조건아래 판단능력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인간 희노애락의 감정을 로봇이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이라는 점이다.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먼 미래에는 가능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먼 미래에도 역시 안 되는 원천적인 불가능인지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현재로서 감정을 직접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감정표현을 추론표현으로 환원하여 2차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감정을 그 감정 그대로 시뮬레이션은 불가능하며 단지 사람의 행동표현을 물리화학적인 수치로 환원하여 표현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남녀간 사랑의 감정을 계량화하려면 먼저 그 남녀가 사랑을 할 때 나타나는 행동변화 및 신체생리적 변화 등을 수치로 표현하면 된다는 뜻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있다고 치자. 그 연구소는 현재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 쌍을 다수 모집하여 그들이 서로 사랑을 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행동과 생리변화를 조사한다.

그들이 연구대상의 적절한 표본 집단이 되기 위하여 많은 쌍의 남녀들이 실험에 응해야 하고 또한 그 남녀 쌍들은 일반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가상적인 실험의 상황들을 예시해보자.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쌍방의 동공확장의 비율, 혈압의 상승비, 남성 테스토스테른이나 여성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틴 호르몬의 증가수치,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의 증가에 따른 안면홍조와 같은 얼굴색의 변화를 일으킨 모세혈관의 수축도 및 표정 근육들 각각의 긴장도, fMRI 사진을 통해 밝혀지는 뇌의 대상피질과 미상핵 부위의 변화,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관련행위들의 행동목록 등, 무수히 많을 수 있는 사랑표현의 행위와 생리변화 등을 조사하여 이를 정리하고 조직화하여 사랑행위를 재현하기 위한 기계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기초자료로 사용한다.

이러한 실험연구가 가능하다면 이는 감정표현을 추론표현으로 환원하는 기초작업일 것이다. 만약 감정표현이 추론표현으로 모두 환원된다면 아마도 감정을 표현하는 로봇인간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상적이고 판타지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랑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과정이다.

사랑을 시뮬레이션하는 두 번째 단계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소통이 그들의 관계를 실제로 원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로봇과 인간이 서로 남녀 간의 관계로서 사랑하려면 단순 섹스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애처롭게 여기는 심리적 상태와 상대를 배려하는 심리적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서로에게 마음의 소통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마음의 소통이라는 표현은 매우 애매하여 다른 방식으로 이를 압축해야 한다. 구체적 방식의 감정압축은 바로 즐거움과 아픔의(pleasure and pain) 정도로 사랑이 제시될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나의 상태와 행위가 상대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이런 감정은 사랑을 지속할 것이며, 반면 상대에게 아픔만을 준다면 사랑의 관계는 끊어질 것이다.

즐거움과 아픔은 매우 주관적이다. 극단적으로 나에게 즐거우리라 생각한 나의 행위가 오히려 너의 아픔을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즐거움과 아픔은 이렇게 항상 상호적이다. 그중에서도 사랑은 가장 상호적인 감정에 해당한다.

감정이 상호적이라는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현대화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성희롱으로 한 남자가 경찰서에 구치되었다고 하자. 그 성희롱 피의자는 자기가 성희롱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경우 성희롱의 기준은 상대방이 성희롱이라는 아픈 감정은 주관적으로 느꼈을 때 바로 그 피해자의 입장에서 느낀 감정의 상처가 성희롱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감정은 주관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상호성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즐거움과 아픔은 상대방이 어떻게 그런 감정을 같이 공유하느냐가 문제이다. 나의 아픔을 타인이 그대로(질과 양에서 동등하게) 느낄 수 있다면 그때 감정의 상호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입장이 일선과학자의 태도이다. 그러나 아직도 고통을 이해하는 자연과학적 성과는 미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 자체로 실체적이기보다는 외부 자극에 대한 신체적 그리고 감정적 반응에 가깝기 때문이다.

반응의 결과는 과학적인 뇌의 활동변이를 통해 측정될 수 있음을 굳이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반응 자체의 메커니즘을 인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경우 그 반응의 정도는 현상적으로도 더 강하고 인과적으로도 더 본능적일 수 있어서 사랑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서로간의 사랑을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 그 자체를 실체적으로 인지하려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문명의 오해일 뿐이다. 결국 사랑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이며 당사자 사이의 믿음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호적 반응을 서로 소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감정의 상호성 때문에 감정을 시뮬레이션 하는 일이 더 어렵다. 만약 사랑을 시뮬레이션한 로봇이 있다면 그 로봇은 규격화된 pp계수(pleasure-pain score)에 따라 행위를 하도록 만들어진 모종의 프로그램에 종속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pp계수조차도 가능한지 는 현재의 과학기술의 입장에서 불확실하다. 혹시 pp계수를 확보하여 사랑의 알고리즘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하여도 사랑의 감정은 고립된 감정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상호성을 지니고 있어서 독립 알고리즘만으로 사랑이 재현되기는 어렵다.

3. 사랑의 범주

결국 인간의 감정을 계량화하여 추론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거대한 인공지능 프로젝트는 감정이 과연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그런 질문이나 응답이 미흡할 경우 감정을 갖는 로봇의 탄생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감정은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생물학적 표현도구로서 그 기초 메커니즘은 자극과 반응의 관계로 조직되어 있다. 배고프고, 아프고, 이성에 끌리는 등의 자신의 신체를 유지하고 후손을 증식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체계를 진화시키기도 하며, 기쁘고 노여워하며 슬프며 좋아하며 사랑하며 미워하는 상호관계능력을 키우기도 했다.

이를 통털어서 감정이라고 하지만, 전자를 1차 감정, 후자를 2차 감정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1차 감정은 대체로 본성적인 요소가 강한 반면, 2차 감정은 본성 외에 문화적이고 후천적 요인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2차 감정이 단지 후천적 교육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다. 후천적 교육의 결과는 감정 체계가 아닌 추리능력의 이성 체계에서 두드러진다.

이제 사랑의 범주가 어떻게 분포하는지 따져 볼 수 있다. 사랑이란 결국 (1)이성에게 이끌리거나 이성을 이끌도록 시도하는 1차 감정의 범주와 (2)간접 방식으로 좋아하고 기쁘게 되는 2차 감정의 범주, 그리고 (3)가치판단과 문화적 관계망을 고려하는 이성 범주, 이 세 가지 범주에 고루 걸쳐 나타나는 특이한 표현방식이다.

이렇게 범주를 나누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범주들 사이에 선명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맹자나 성리학의 용어이기는 하지만 적절한 비유가 될 만한 것이 있는데, 사단칠정에서 말하는 사단의 마음이다. 사단 중의 하나가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자기에게 나쁜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런 감정은 1차 감정이며 2차 감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성 범주에 속하기도 한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건데, 썩은 고기를 먹으면 몸에 해가 오고 그래서 썩은 고기의 이미지에 직결되는 냄새와 맛을 피하는 것은 생명진화의 당연한 과정이며 그래서 수오지심의 기반은 생물학적 본능에 속하는 1차 감정에서 나온다.

그런데 고등동물의 경우 어린 새끼들은 썩은 고기를 먹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자기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미로부터 학습되어지는 후천성에 기인하는 것이 많다. 또한 나쁜 것을 피하고 좋은 것을 선호한다는 생물학적 방어기제들이 사회화된 집단에서 관습이 되며 그들만의 약속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가치개념의 형성이다. 이러한 문화적 전환은 윤리적 도덕사회로 진입하는 배경이 된다.

범주를 서로 넘나드는 감정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의 감정이다. 어떤 대상(사람)을 보고 측은하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마음은 2차 감정이지만 1차 감정의 요소와 더불어 이성 범주의 요소도 함께 갖고 있다. 일반적인 사랑의 감정이라면 맹자가 말한 사단 중에서 측은지심과 가장 가까우리만, 남녀 간의 사랑인 경우에는 측은지심에 사양지심과 함께 수오지심까지도 포함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자손을 번식하려는 단순욕구만이 아니라 섹스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며, 인류를 사랑하는 성스러운 사랑의 보편성에 이르기도 한다. 이렇게 사랑은 1차 감정에서 이성 범주에 이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그만큼 인간의 사랑을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섹스행위를 통해 자기의 자손을 퍼지게 하려는 단순 욕망도 있지만, 상대가 아프고 위험에 처했을 때 안타까워하거나 애틋한 감정을 전달하여 상대로 하여금 고립된 감정의 소유자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 일 역시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 해당한다.

더욱이 상대의 감정을 공유하여 비밀스럽고 방해받지 않으려는 사랑의 분위기를 만들거나 인지구조로 각인된 사랑의 감정 자체가 사랑의 관계를 지속시켜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사랑은 사양지심에 이른다. 나아가 그런 감정의 승화는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이성적 개념화에 연결된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감정은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를 연결하는 만남의 메이팅mating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개인이 속한 집단 즉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결속력이기도 하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듯이 미래 인공지능 기술이 완벽하여 개인과 개인을 맺어주는 메이팅의 감정을 모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사회와 개인을 맺어주는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사회적 메이팅은 불가능할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사양지심에 이르고, 사회의 보편가치를 낳게 하는 사랑이라는 다층적 감정은 개인과 집단, 감성과 이성을 연결하는 믿음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사회적 보편가치로 승화한 사랑은 사회를 지속하는 가장 중요한 믿음체계라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시절 선진유가와 묵가 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묵가에서는 사랑의 보편성을 주장한 겸애(兼愛)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데, 반면 유가에서는 오상(五常)이라 하여 사람과의 사랑 관계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 나누어 사랑의 차별이 있음을 강조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사랑과 왕과 신하 사이의 사랑은 달라야 한다는 입장과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하다못해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조차 한결같이 다 같아야 한다는 입장 간의 대립이었다.

기독교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위의 입장은 모두 사회적 네트워크로서 사랑의 믿음 체계를 강조한 것이다. 사랑은 사회를 지속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개인 간의 사랑 더 정확히 말해서는 개인 간의 메이팅 친화력으로서 사랑과 더불어 집단 혹은 사회에 적용되어 보편가치로 승화된 사랑은 인간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믿음 체계이다. 모든 감정 중에서 사랑의 감정은 가장 복잡하고 난해하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에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갖는 가장 본능적인 행위 유발의 감정과 동시에 가장 사회적인 믿음 체계를 다 포함한다. 그 중에서 상대적으로 계산가능한 사랑의 메이팅 감정을 아무리 완벽하게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로봇을 제작했다고 하여도, 사회적 네트워크를 재현하여 전체 컨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로봇을 생각하는 일은 어렵다.

우리의 질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봇과 인간이 사랑을 하려면 먼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질문한 것이며, 둘째는 로봇도 그런 사랑이 가능한지를 질문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인공지능 등의 사랑에 대한 완벽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며 그런 시뮬레이션은 사랑의 감정을 전적으로 계량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뮬레이션의 대상이 되는 사랑 그 자체를 아직도 잘 모르기도 하지만, 안다고 하여도 결국 사랑은 기계적으로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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