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접목하는 인문학의 진보
경희대학교 대학원신보 20주년

특집학술 : 인문학의 위기 진단

2006년 3월 2일 게재

현실에 접목하는 인문학의 진보



인문학 진보 - 현실과의 변증법적 교우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황우석 사태는 기획적 ‘속임’과 자발적 ‘속음’이 서로 공조한 거대한 미몽으로 끝났다. 이 사태는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따른 집단 심리의 부조화를 나타낸 한 단편이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분석이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졌지만, 근원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그 사태 내면 깊숙이 결착된 인문학적 결핍증상을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황우석 사태의 본질적 원인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방식의 결핍에 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 역시 인간을 위한 기술이므로 이에 대한 접근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역사적 조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항상 대화의 창을 열어 놓아야 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 인문학 역시 문자의 박물관에서 현실로 뛰쳐나와야 한다.

인문학은 단순히 고전의 부활이나 문자의 유희가 아니며, 상아탑의 암호나 외국어의 시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세계에 대한 폭넓은 조망에서 잉태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현장이며, 현실을 도외시한 인문학은 인문학 자체의 퇴보를 가져올 뿐이다. 그래서 현실을 파악하는 인문학 공부가 중요하다. 인문학은 학문을 위한 전문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누려가는 생활인의 지리부도다.

인문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현실을 분석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상에 대한 단층적인 접근이다. 이런 방식은 현상이 놓여진 전체적 맥락을 놓치는 수가 대부분이다. 요즘 논란이 되는 스크린쿼터제를 사례로 말해보자. 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횡포에 강력하게 반대하곤 했지만 최근 한국의 스크린쿼터제에 관련하여 영화인들이 취한 일련의 행동은 그들만의 작위적인 모순으로만 비친다는 점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인들의 단층적 접근방식에 기인한다. 단층적 접근태도는 인문학적 인식의 본질과 동떨어져 있다. 인문학적 접근태도는 주어진 현상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이며 통시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를 역사적 조망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역사적 조망력이라고 해서 대단히 어려운 개념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기만의 관점이 아닌 공동체적 관점,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희망을 접속해 주어진 사회 현상을 통시적으로 관찰하는 태도가 역사적 조망력인 것이다.

다시 한국 스크린쿼터제 축소 반대 운동의 예를 들어보자. 과연 한국 영화계는 문화 주권을 위한 사회적 노력을 해왔는가? 신자유주의의 구조를 그대로 안고 있는 한국의 스크린 노동시장에 깊이 인각된 불합리성에 대하여 공동체적 대응을 해왔는가? 15초짜리 광고 출연료나 할리우드 스크린 상품의 원가를 턱없이 올려놓은 내부 원인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어느 영화인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몇몇 영화배우들이 뒤늦게 FTA 반대 농민시위에 참여하는 성의를 보였지만, 그들의 과거 모순을 봉합하려는 임기응변으로만 비칠 뿐이다.

인문학 공부는 현실을 파악하는 입체적이고 통사적인 조망력을 줄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점을 수긍한다면 90년대부터 우리 학계의 주요담론이었던 인문학 위기론으로부터 벗어날 해결의 통로를 찾아낼 수 있다. 인문학 위기론의 핵심단어였던 고증학, 분파학, 시녀학, 문자학, 기지촌학 등의 비판의 험로를 거치면서,(참조:최종덕,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휴머니스트) 이제 비로소 현실과 접목하는 인문학의 진보가 필요한 때이다. 새롭게 탈피된 인문학 공부는 결국 인간과 사물을 이해하는 단층적 접근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접근방식을 제공하며, 결국 나와 세계가 창조적으로 만나는 접점을 제시해준다.

고립적이고 화석화된 인문학을 탈피하는 일은 ‘내가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숙고를 요구한다. 나의 존재에 대한 숙고다. 숙고는 기존의 공부틀을 벗어나려는 비판적 실천이 함께 할 때 현실에 접목할 수 있다. 또한 비판적 실천은 항상 반성적 성찰에 의해 되물어져야 한다. 이런 인문학 공부의 되먹임이 있어야만 사물을 재창조해낼 수 있으며, 그때 인문학 위기론의 망령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문학 공부는 실용적 측면에서조차 영상화면의 창의적인 컷을 잡을 수 있고,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디자인을 창조하며, 공학실험실 안에서 새로운 성과를 유도할 수 있으며, 줄기세포연구의 면역학적 대응을 발견할 수 있으며, 나아가 만평사건으로 불거진 아랍 현실 이면에 숨겨진 서구 제국주의의 과거사를 볼 수 있으며, 앞서 말한 황우석 사태나 스크린쿼터제 논란의 핵심을 간파하도록 한다.

요약하면 역사인식 속에서 나와 세계가 만나려는 비판과 반성의 추동력이 있어야만 인문학은 현실을 창조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 인문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인문학 공부는 현실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반성으로 항거해야 한다. 인문학이 현실을 재창조하기 위하여 거꾸로 현실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실을 조망하는 이런 양면의 방식, 즉 현실을 만나지만 현실을 항거하는 양면성 속에서 비로소 인문학 공부는 현실을 재창조할 수 있다. 현실을 수용하지만 현실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하며, 대안을 추구하지만 당장의 대안을 부정하며, 자유를 갈구하지만 주어진 자유를 항거하는 공부법, 그것이 바로 인문학 공부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 최종덕 / 상지대 교수, 철학
경희대학교 대학원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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