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천의 맹자와 다윈의 만남에 대한 논평
한철연 2008년1월18일
“다윈과 맹자가 만나면”을 읽고
최종덕(상지대, 철학)

맹자를 성에서 정의 입장으로 바꾸어 해석한 이 논문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생각이라서 그렇다. 혹시 이단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는 그런 생각이지만, 실제로는 맹자를 정독할 경우 다다를 수밖에 없는 당연한 귀결이라는 점이 바로 김시천 선생님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으로부터 맹자와 다윈은 서로 만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양육nurture과 본성nature, 문화와 천성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 같다. 그 예로서 맹자와 순자를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표주자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구분인지를 지적하기도 했다.

다윈이라는 메타포는 어떤 의미를 포함하는지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김선생 대신 내가 모호하게나마 언급한다면, 다윈의 메타포는 mind와 body, 물질과 개념, 감성과 이성, 규범화된 도덕과 최적화된 사회행동의 원형 등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라는 뜻을 함의한다.

김시천 선생님은 정을 우리의 몸이 주변세계에 감응하는 방식 전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맹자가 말하려는 성은 어느 하늘에서 툭탁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정이 문화적으로 거듭 깨쳐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말 순자와 맹자는 별 차이가 없다. 더욱이 맹자와 다윈이 조우하는 결정적인 라운드 테이블을 이 논문이 제공한 셈이다. 맹자의 정은 양육된 본성이며, 순자의 정은 본성의 욕망을 순화하는 양육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런 논의구조는 불행하게도 형이상학에 벌써 익숙해져버린 많은 지식인들에게 거부의 대상이 된다. 서구 이성의 출발과 향방은 끊임없이 이성을 잉태시킨 자연의 역사를 배제한 채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그 개념에 자연을 지배하라는 권력을 부여하였다. 그래서 개념은 자연을 떠나 초월적이거나 형이상학의 대상이 쉽게 되곤 한다. 반면 동양적 사유구조의 일환에서는 (동양적 의미의) 자연 자체에 (서양적 의미의) 자연과 개념을 다 포함하고 있어서 개념과 자연을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다.

자연과 개념은 연속적이라는 말과 같다. 마찬가지로 본질과 현상은 연속적인 차원이라는 점이 서양 이성의 사유구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동양철학을 어깨너머 읽다보면 언어에 본질을 부여하지 말라는 말이 유불선할 것 없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곧 개념에다 존재의 권력을 실지 말라는 말과 같다. 

동양철학에 등장하는 소위 좋다는 개념들 즉 도, 신, 성, 기, 태극 등의 언어를 서구적 존재의 차원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풍토가 시나브로 쌓여, 맹자와 순자를 단적으로 루소와 홉스에 아무 생각 없이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맹자의 ‘성’을 ‘정’으로 해석하는 김시천 선생님의 태도는 무척이나 불쾌함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초월자와 형이상학에 어느새 익숙해진 우리 동양인에게도 자연의 원천성을 버리고 성이나 도 같은 개념에 초월성을 부여하는데 앞장 서는 일일랑 그만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성을 초월자에서 해방시키면 성과 정이 만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듯하다. 이런 만남의 프로젝트를 제시하는 것이 김 선생님의 논문이며, 따라서 프로젝트를 해결하는 방법론으로서 다윈을 등장시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만 “다윈”의 함축된 의미가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소함을 더해 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다윈을 바라보는 현대진화론의 해석이 하도 다양하여, 다윈의 메타포를 하나의 입장으로 가름할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양육이냐 본성이냐의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배중율적 사유는 다윈의 메타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도덕 규범론자들은 도덕규범의 원천을 하늘나라에 들이대곤 한다. 도덕이 잘 서려면 그 규범력이 강해야 하는데, 도덕의 원천을 이 땅에 둔다면 규제력이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늘에 그 제어권을 두는 것이 바로 도덕초월론의 입장이다.

반면 맹자에서는 도덕의 원천을 외부에 두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단순히 선천적 자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문화가 만나면서 진화한 정이 가득한 자아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 그것이 바로 이 논문을 읽는 즐거움이다. 결국 이 논문은 성에 대한 자연/지정학적 결합해석이라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성선설이라하여 인간이 다 좋은 게 좋은 거니 잘 될 거라는 반성 없는 인간이해는 맹자를 오독하는 일임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 성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정의 원천을 찾는 독서법이 중요하다.
한철연 논문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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