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본 에피쿠로스의 행복한 자유


이 원고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정암학당이 공동으로 만든 책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출판사)에 "자유"라는 주제로 실린 것이다.

이 책은 13명의 필자가 각기 인생, 생명, 시간, 우정, 예술, 타자, 자유, 지혜, 법, 평등, 변증법, 연대, 정치라는 13개의 주제를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는 "자유" 주제와 더불어 책의 머릿말도 썼다. 아래 머릿말과 본문을 올린다.


들어가는 말 (책,5-7쪽)

글쓴이 대표 최종덕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 고전으로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에게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 지를 질문하고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한다. 그리스 고전은 2,500년 전 오랜 된 이야기로 답습되고 있지만, 호모 사피언스로서 인류가 시작된 역사 25만 년 전에 비한다면 아주 최근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고전은 현대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 삶의 고민과 성찰은 오늘 우리가 당면한 것과 같은 지평에 있다. 그들 정치와 법은 외형에서 오늘의 것과 다르지만 그 내면의 계기는 서로 같은 맥락에 놓여져 있다. 이러한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이 책을 같이 쓰게 되었다.

이 책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쓰여 졌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의 폭은 넓다. 우정과 생명 그리고 예술과 인생을 되돌아보는 사람에서부터 시간의 흐름과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 그리고 자유와 평등에서부터 법과 정치에 무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시민이다. 그래서 이 책은 형이상학적 주제와 더불어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과 문학적 주제까지 다룬다. 나아가 정치철학적 실천의 문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 주제를 하나의 꼭지에 채워서 압축적으로 표현해 보려고 다양한 필자들이 노력했다. 키워드 방식으로 그 꼭지를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인생>, <생명>, <시간>, <우정>, <예술>, <타자>, <자유>, <지혜>, <법>, <평등>, <변증법>, <연대>, <정치>라는 13개의 꼭지로 이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대중서로 일컬어질 수도 있지만, ‘시민의 책’이라는 딱지가 이 책에 붙여졌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코 쉽지만 않은 개념과 실천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오래된 박물관의 해설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오늘의 이야기를 말하려 했다. 이런 생각을 현실사회에서 같이 풀어갈 사람들이 이 책의 필자로 모였다. 철학적 이론과 실천적 생활 사이의 간극을 좁혀보려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지식사회에서조차 소외되고 있는 고전학자들의 모임인 정암학당의 회원들이 이 책 안으로 모였다.   

두 학술단체, 정암학당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공하는 주제는 서로 다르지만 사회적 아픔에 눈감지 않는 진실의 공부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지식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 학자>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이다. 이런 공통된 문제의식은 자연발생적이었지만, 30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들을 돋워주고 밀어준 선배 학자가 있어서 그 발현이 가능해졌다. 그 선배 학자는 그리스 고전 철학자이시며 동시에 철학운동가이신 이정호이다.

이정호는 우리들에게 당장의 정답을 얻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학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질문을 던지는 이정호의 기투방식은 자유와 지혜를 향해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처음에는 <지혜로운 자유>로 정하려고 했었다. 그 제호는 지금의 <아주 오래된 질문들>로 곧 바꿨지만, 지혜가 담긴 자유를 디뎌간다는 그의 철학은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혜가 담긴 자유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바로 시민의 책이다.

이 책의 시작은 이정호의 철학으로부터 출발되었지만, 책의 방향은 시민을 위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말해서 독자 스스로 이 책에서 자유로운 지혜를 찾아내면 좋겠다는 데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독립된 주제를 다룬 13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하나 마다 고유한 철학적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 독자는 어느 꼭지를 먼저 읽어도 좋다. 그래서 13개 꼭지의 주제를 요약해서 서문에 붙였다. 독자가 한번 읽고 휙버리는 그런 책이 되지 않도록 책을 잘 만들어보자는 것이 필자들의 공통된 의지였다. 그나마 평가는 독자가 내릴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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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 자유론 꼭지
<마르크스가 본 에피쿠로스의 행복한 자유> (책, 137-162쪽)
               
<요약문>
맑스는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고전 원자론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원자론뿐만이 아니라 선험적 형이상학의 허구를 꿰뚫어 보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그런 계기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분명히 관찰함으로써 현실화되었다. 데모크리토스를 형이상학적 원자론으로 본다면 에피쿠로스를 실존적이면서도 동역학적인 원자론으로 맑스는 파악했다. 그런 맑스의 원자론 이해는 자본론을 포함한 그 자신의 철학적 사유구조 전체에 걸친 기초가 되었다.

나아가 이 글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어떻게 윤리적 행복론과 자유론으로 연결되는지를 해명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우회적이고 상관적이며 복잡하며 생태적인 우연성의 원자의 운동성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러한 원자의 운동성이 궁극적으로 “자유”와 “목적성이 배제된 자연의 제일성”을 종합한 유물론 철학의 기반이 된다고 필자는 서술한다.

이런 자유는 신의 존재를 설정하지 않아도 가능함을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행복은 일시적 행복감이나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자유로움에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이런 지속적 자유의 향유를 통한 행복은 헤도네hedoně로 표현된다. 헤도네는 공허한 선험주의를 벗어나서 구체의 현실을 마주하는 인식으로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자유와 실존 그리고 역사” 안의 헤도네”를 얻기 위하여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남에게 의존하는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그 대신 나 자신이 자신에 자족하는 권력과 자신을 존중하는 명예를 찾아가면 된다.

남에게는 소소한 듯 보이지만 나에게 소중한 그런 행복한 삶을 에피쿠로스는 강조한다.

<본문 전체>
자유 : 맑스가 본 에피쿠로스의 행복한 자유



최종덕



1. 원자론과 유물론 : 개략

1.1 청년 맑스가 만난 고대 에피쿠로스, 그리고 고대 원자론

맑스가 1841년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은 에피쿠로스 철학을 2,000여 년 만에 재조명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그때 맑스의 나이는 23살이었는데, 세계를 구성하는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던 지적 호기심으로 헤겔 공부에 한창 몰두했었다. 그렇지만 헤겔을 통해서만 세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대 희랍의 원자론자 루크레티우스를 접하게 되었고, 맑스는 자연스럽게 데모크리토스와 소위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를 읽게 되었다. 맑스는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고전 원자론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원자론뿐만이 아니라 선험적 형이상학의 허구를 꿰뚫어 보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그런 계기는 데모크리토스와의 비교를 통해 드러났다.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분명히 강조했다. 데모크리토스를 형이상학적 원자론으로 본다면 에피쿠로스를 실존적이면서도 동역학적인 원자론으로 맑스는 파악했다. 그런 맑스의 원자론 이해는 그 자신의 철학적 사유구조 전체에 걸친 기초가 되었다.

고대 원자론은 기본적으로 유물론에 기반을 둔 자연철학의 발전과정이었다. 고대 자연철학은 잘 알려진 대로 ‘거북이’, ‘거인’, ‘티탄’, ‘가이아’ 등의 상상적 이미지로 짜여진 신화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했던 틀에서 탈피하여 ‘물’, ‘불’, ‘공기’ 등의 자연적 이미지로 조립된 설명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탈피와 변화의 고대 그리스 시기를 우리는 자연철학 시대라고 부르며, 철학개론서에서 자연철학의 문을 연 최초의 철학자는 탈레스라고 써져 있다.

자연철학이란 세계의 창조 신화보다는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자연적인 요소를 찾아보려는 이성적 태도였다. 그 중에서도 데모크리토스는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는 궁극의 단위로서 세계의 구성요소를 파악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이런 궁극의 요소를 원자atoms라고 보았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만약 물질로만 된 무엇이라면 그의 원자론은 곧 유물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요즘 우리가 말하는 물질의 성질과 똑같지 않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은 비경험의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경험적 존재들을 구성하는 비경험의 원자이지만 그 원자들은 일상의 자연존재 혹은 자연현상과 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원자는 여전히 물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모양과 크기를 여러 가지로 갖고 있는 물질적 성질의 원자들이 모여서 이 세계가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원자를 통해세계의 존재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원자론의 철학사적 의미는 주로 ‘기계론’, ‘환원주의’, ‘결정론’, ‘요소주의’라는 딱딱한 존재론적 이해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게 기존의 이해방식을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 원자는 세계의 기본단위여서 이 세계의 모든 사태와 사물은 원자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가 떠오른다.
(2) 원자들이 모여서 세계를 구성하는 그 구조는 기계 부속품을 조립하여 전체 기계가 되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기계론이 떠오른다.
(3) 요소주의 원자론과 같은 말로서 원자가 구성단위 기초 요소라는 점에서 요소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4) 요소들이 모여서 사물의 구성 혹은 사태의 운동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결정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자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주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국한되었었다.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만이 고전 원자론의 전부가 아님을 체계적으로 지적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와 다른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주목하였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적 쾌락주의와 자연학적 원자론이 결합되어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 가치론과 물리적 사실론이 결합된 새로운 원자론을 에피쿠로스에서 찾은 것은 맑스의 대단한 역사적 안목으로 평가된다. 이 글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어떻게 윤리적 행복론과 자유론으로 연결되는지를 보려 한다.

1.2 원자론에서 유물론으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물질적이라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곧 유물론이 된다는 귀결에 이른다. 이렇게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유물론으로 분류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의 유물론과 다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이성적 존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했던 고대 자연철학 시대의 유물인 만큼 근대 과학혁명 이후 혹은 계몽주의 이후 정착된 과학적 유물론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유물론으로 해석한다는 뜻은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을 탈피하는 통로로서 자연주의 세계관을 출발시켰다는 데 있다.

앞 절에서 설명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래처럼 정리된다.
i) 물질적 세계를 물질로 설명하려 했고,
ii) 설명하는 단위가 원자이며, 따라서
iii) 원자는 물질적이고, 결국
iv)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유물론적이라는 귀결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같다.

유물론이라는 동일개념으로 고대 그리스 유물론자 모두를 동일하게 설명할 수 없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태도를 유물론 기반 행복론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최소한 여기서 논의하게 될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유물론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사용되는 맥락과 의미는 다양하다. 맑스의 유물론은 보통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일컬어진다. 자본중심의 현대소비사회에서 소위 물질만능주의 혹은 물신주의를 비유하는 메타포로서 통속적 유물론이 있고, 철학적 세계의 물질적 기초인 존재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의미도 있다. 이 존재론적 유물론은 형이상학의 논의범주로서 유심론에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자연과학에서는 보통 경험세계의 모든 물질계가 원자와 같은 물질적 기초단위로 환원된다는 과학적 유물론이 있다.

맑스가 새로이 접했던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과 달리 자유를 허용하는 동력학적 물질론으로 이해되었다. 맑스의 에피쿠로스 이해는 나중에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만든 셈이다. 물론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헤겔의 변증법과 엥겔스의 역사유물론의 종합적 시스템으로 알려져 있지만, 맑스 유물론의 동역학적 구조는 맑스 청년 시절 공부했던 에피쿠로스의 유물론 구조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20세기 프랑스 철학이라 일컬어졌던 포스트모더니티 사조들은 유물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유물론을 여기서는 실존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려 하는데, 이는 실제로 동력학적 유물론의 한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래서 유물론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과 그 의미는 앞처럼 다양하게 보여 지는데,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정리될 수 있다.

Epicurus Philosophy


1.3 동력학적 원자론

유물론적 배경으로서 원자론의 근거는 우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찾을 수 있다. 맑스가 보기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형식적 유물론이며, 존재의 내재성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플라톤의 이데아 성질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i) 운동하지만 운동의 양식은 불변이며
ii) 원자 외의 진공상태를 갖지만(원자는 허공을 떠다니지만) 원자 자체는 독립적이며
iii) 원자끼리 충돌하지만 여전히 결정론적이며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존재의 겉보기 인식론적 양상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플라톤의 이데아가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 사이의 존재의 존재론적 양상은 질적으로 동등하다고 맑스는 판단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말하는 원자는 물질적이지만, 그 물질성은 경험적 물질성이기보다는 선험적 물질성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 때문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근대과학 혁명 이후 기계론과 결정론 그리고 환원주의에서 말하는 세계의 기초단위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맑스는 에피쿠로스를 접하면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이해를 채워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찾던 존재론의 토대는 데모크리토스의 존재론적 원자론이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에 있다고 맑스는 인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맑스 전반에 깔려 있는 <변동의 철학>과 어울릴 수 없었다. 다행히 맑스는 젊은 나이에 일찍 에피쿠로스를 만났다.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맑스는 유물론을 유지하면서도 미소의 비감각적 대상에 대한 경험주의와 동력학적 변동성의 철학, 그리고 일탈과 자유의 윤리학을 더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맑스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기계론적 유물론의 제약을 벗어나 변증법적 유물론을 잉태시킬 수 있었던 철학적 원천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그것과 달리 결정론과 기계론 그리고 유토피아론과 목적론을 타파하는 존재론적 토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맑스는 에피쿠로스의 열혈 독자였다.

2. 에피쿠로스 유물론

2.1 에피쿠로스 철학의 구조

에피쿠로스 철학은 크게 인식론과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으로 나뉜다.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은 지각경험과 감각의 인식을 다룬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자연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혀 다른 관점에서 천체와 사물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윤리학은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부문으로 소위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행복론을 말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2천 년 이후 에피쿠로스 행복론 철학을 한 눈에 알아본 철학자가 바로 맑스였다.

맑스는 데모크리토스 원자론과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차이를 공부하면서 에피쿠로스 자연학이 데모크리토스의 결정론과 선험론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자유론과 행복론으로 발전하는지를 인지할 수 있었다.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이나 원자론을 알려면 에피쿠로스의 인식론과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 세 영역이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맑스의 생각을 따라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차이를 더 자세히 알아본다.

Epicurus Philosophy

에피쿠로스의 인식론to kanonikon은 데모크리토스와 다르게 감각에 기반한 경험주의의 기초를 갖는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의 세계를 객관적 현상으로 포용했다. 반복하지만 이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다르다. 에피쿠로스에서 존재론적 결정론과 인식론적 필연성은 없다. 오로지 우연성뿐이며 원자운동은 우리 의지에 상관적이기도 하다.

2.2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인식론

원자는 세계 시초의 존재이며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된다는 것이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기초이다.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며, 가장 작은 물체로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이 데모크리토스 원자의 특성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수학적 위치를 알려주는 점의 존재와 이동거리를 알려주는 선분적 존재를 지시한다. 이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의 양태는 정역학적 원자운동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에서 원자는 무한하다. 원자마다 다른 모양이 있지만 모양의 차이는 원자 그 자체의 규정이다.

원자는 원자의 크기와 모양의 차이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기본단위라는 것이 데모크리토스 원자의 핵심이다. 원자가 크기를 갖는다면 그 공간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그 자체로 더 이상 분할불가능한 세계의 궁극적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원자의 의미가 상실되고 마는 논리적 모순을 맑스는 파악했다. 원자 공간을 차지하는 크기를 지녔다면, 이미 원자는 스스로 분할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논리는 자기 스스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물론 데모크리토스가 이 점을 놓치고 원자론을 모순적으로 서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데크리토스는 원자가 크기가 아닌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않다면 불할불가능의 조건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데모크리토스가 보는 원자는 크기를 가지고 있지만 무게를 본질로서 가지고 있지 않다. 원자가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은 원자가 형상만을 지닐 뿐 질료적 성격이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데모크리토스 원자에서 무게는 본질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으며 단지 우연적akzidentelle 요소일 뿐이다. 원자가 무게를 본질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원자는 질료가 아닌 순수형식이다. 데모크리토스 1800년 후에야 등장한 뉴턴에서 잘 알려진 “질점”point mass 개념처럼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무게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수학적 존재에 비유될 수 있다. 맑스가 보기에 이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추상화의 결과이며 관념의 소산물로 여겨졌다. (맑스 2001, 86-88)

데모크리토스에서 원자운동은 직선으로 낙하하는 수직운동이 모두이다. 직선운동은 자연스런 운동이라고 데모크리토스는 생각했다. 직선운동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원자의 직선운동이란 외부 절대자의 통제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어진 운동이기 때문이다. 원자의 이런 운동양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의 기반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사물의 운동은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충격)운동량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적인 외부작용이 없다면 모든 운동하는 사물은 얼마 못가서 정지된다. 예를 들어 하늘에 던진 돌맹이는 최초의 운동량의 힘이 다하면 땅으로 떨어질 뿐이다. 이런 양식의 운동 이해는 근대과학의 동력학을 완성한 케플러가 나오기까지 천오백년 이상이나 유지되어 왔다.

근대과학에서 마찰력을 수학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 운동력을 갖게 된 물체가 마찰력에 의해 운동이 비로소 정지된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거꾸로 물체가 지속적으로 운동하기 위하여 외부의 충격운동량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역학이 2천년 가까이 근대과학의 운동학을 지배해 왔었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으로부터 우리는 그의 인식론을 추론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경험으로 인식되는 지각 범위를 초월해 있으며 정적이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에서 감각적 현상은 원자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현상은 객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현상은 일종의 주관적 가상이다. 원자만이 필연성의 세계이며, 원자와 허공 외에는 독사doxa와 가상일뿐이라는 것이 데모크리토스 인식론의 기초이다.

데모크리토스에서 개체적 대상은 원자들의 결합이다. 대상 개체를 인식하기 위하여 원자의 실재성과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이다. 그런 인식만이 진리이다. 그러한 실재성과 필연성에 의해 원자운동은 철저히 인과관계 안에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다음처럼 말했다. “나는 페르시아의 왕관을 얻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인과관계(Ätiologie)를 발견하고 싶다.”(Marx 2001, 46)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데모크리토스에서 원자와 빈공간은 필연성과 기계적 인과성의 원천으로서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즉 경험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의 존재는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생성소멸하지만, 생성소멸의 원리는 필연성의 귀결이며, 필연성의 원자운동은 세계의 법칙과 운행을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결정론으로 규정했다.

원자는 인식의 대상이며 진리의 원천이다. 그런 원자로 구성된 자연 그 자체만이 실재적이라는 것이 데모크리토스 존재론이다. 진리란 그 실재를 인식하는 데 있다. 자연 안에 필연적 객관성이 존재하며, 겉에 드러난 현상은 객관적 실재의 주관적 가상일뿐이다. 우리는 경험지식을 통해서 실재의 껍질인 현상세계만을 유추할 수 있고, 그런 유추의 태도를 우리는 경험론적 방법 혹은 실증적 태도라고 부른다. 맑스는 이러한 데모크리토스의 실증적 태도를 회의주의 탐구방법이라고 보았다.

맑스가 본 데모크리토스 인식론은 아래처럼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감각과 실재는 분화된 세계로서 이분법적 존재론에 기반한다.
둘째, 존재는 경험으로 인식될 수 없으며, 경험적 지식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플라톤의 인식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보았다.
셋째, 실재계를 비슷하게 탐구하기 위하여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실증적 탐구라고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를 인식론적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청년 맑스의 해석은 데모크리토스의 운동론을 부정하는 판단으로 이어졌으며, 나중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반증사례가 되었다. 우선 데모크리토스 운동론을 부정하는 논리적 절차의 하나로서 맑스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긍정적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2.3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달리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동력학적 존재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수학적 위치만 알려주는 점의 존재도 아니고 이동거리만 알려주는 선분적 존재가 아니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크기, 모양, 무게의 3 성질을 갖는다. 크기와 모양 2개의 성질만 갖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수학적인 성질이지만, 무게를 본질로 갖고 잇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상대적으로 자연적인 성질을 많이 갖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아래처럼 요약될 수 있다.
① 원자는 결정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면서도, 세계존재의 근원이 되는 아페이론Apeiron이다.
② 독립적이고 무한하지만 고정된 실체는 아니다.
③ 원자는 정해진 통로만을 운동하지 않으며, 직선의 통로를 벗어난 일탈의 자연적 우연성을 포함한다.
④ 자연적 우연성의 원자는 운동의 자유를 낳게 하는 존재론적 기반이다.
⑤ 원자도 무한하지만 허공(진공)도 무한하다. 허공은 경계가 없다.
⑥ 에피쿠로스에서 ‘원리로서 원자’와 ‘물질적 기체로서 원자’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원자원리atomoi는 모든 원자에서 같지만 충돌과 반작용에 의해 생기는 결합과 분리의 소산물로서 원자들은atoma stoicheia(atom element;원자원소)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다.
⑦ 원자마다의 서로 다른 무게가 곧 그 원자의 고유한 성질이 된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 원리와 원자 원소를 구분하지 못했으나, 에피쿠로스는 이를 구분하여 이로부터 존재의 원리적 본질과 현상적 현존을 보게 되었다고 맑스는 해석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에피쿠로스 원자가 데모크리토스 원자와 다른 핵심적인 양상의 하나가 ‘무게’를 갖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었다.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질량성은 원자가 속도를 가질 경우에만 의미를 지닌다. 속도는 변화하는 원자운동, 즉 운동변화량을 통해서만 인식가능하다. 여기서 인식가능하다는 것은 에피쿠로스 인식론의 요지이다. 원자를 지각할 수 있는 근거는 원자가 정해진 직선 운동궤도를 탈선하여 사선으로 움직일 때 그 운동량 변화에 있다. 즉 변화하지 않으며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생각이었으며, 맑스는 이 점에 매료되었다.

데모크리토스와 다른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핵심은 원자의 일탈성에 있다. 클리나멘clinamen의 일탈성이야말로 데모크리토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기반 자연학과 경험주의 기반 인식론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한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원자가 수직운동만 한다면 지각되지 않지만 수직궤도를 탈선한 사선운동이 있기 때문에 원자는 지각의 대상으로 될 뿐만 아니라 실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원자의 사선운동의 원인을 말할 때 일탈, 이탈, 탈선, 편위, 편차, 클리나멘 등의 용어를 썼는데, 이는 문맥에 따라 다르게 변역한 독일어의 Deklination; clinamen 이다.)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운동은 우연성Zufall에 의해 움직인다. 직접적이고 일대일 대응되는 인과관계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 우회적이고 상관적이며 복잡하며 생태적인 우연관계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에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맑스의 해석인데, 그런 해석의 결과로서 원자의 운동이 너무 복잡하여 마치 우연적으로 보이는 것 자체가 바로 원자의 상관적 특질이라고 맑스는 에피쿠로스를 이해했다. 이러한 원자의 상관성은 원자가 수직운동에서 벗어나는 편차를 갖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서 말했듯이 원자가 수직강하 운동에서 벗어나 편차를 일으키고 이 편차만큼의 위치이탈이 생기며 이런 이탈로 인해 다른 원자와 무작위로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무작위성 원자간 충돌이 세계 우연성을 낳는 기초이다. 이러한 우연성에 기초한 원자의 편차운동은 존재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낳는다. 원자는 그 자체로 순수형식reine으로 다른 존재의 계기를 이루는데, 그 계기의 관계는 복잡할 뿐이지 인과관계가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라고 맑스는 이해한다. 이 점은 맑스가 에피쿠로스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듯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맑스의 해석이 궁극적으로 “자유”와 “목적성이 배제된 자연의 제일성”을 종합한 자신의 유물론 철학의 기반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탈선된 운동 즉 사선운동은 데모크리토스 원자의 결정론적 운동방식을 부정하는 주요 근거이다. 맑스는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핵심을 간파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운동은 그것이 비록 운동성에 노출되어 있지만, 맑스가 보기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운동은 외부의 절대적 존재자에 의해 조종되고 통제되는 일종의 결정론적 운동성으로 파악되었다. 이 점은 상대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원자운동이 결정론 범주에서 벗어난 것, 즉 자유운동으로 맑스에 의해 파악되었다.

일탈성은 절대적 외부존재자의 통제를 벗어난 변동의 운동이다. 그런 일탈의 운동은 외부자의 존재를 설정하지 않고 원자 자체의 자족성autarkeia에 기인한다고 맑스는 추론하였다. 이런 맑스의 추론은 사유의 대전환이었다. 왜냐하면 맑스 이전 에피쿠로스를 이해한 수준은 전적으로 2세기 로마 사상가 키케로의 해석에 의존했었으며, 키케로 해석의 기초는 원자운동을 플라톤과 데모크리토스의 시각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로는 에피쿠로스 원자의 일탈된 사선운동의 자유가 용납될 수 없었으며, 이를 반전시켜 바라본 맑스의 시선은 말 그대로 대전환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데모크리토스: 필연성의 원자운동은 존재의 외부적 근거를 전제하며 이는 필연성의 세계를 낳으며, 이로부터 윤리적 근거는 원자 밖의 절대존재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 에피쿠로스: 우연성Zufall은 외부적 근거를 전제하지 않으며, 단지 자기주체성과 내부적 자기동력에 의존할 뿐이다. 즉 외부 절대존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에피쿠로스의 사선 운동은 원자의 자유성을 함의한다. 이탈된 원자는 운동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순수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립적이다. 원자의 편위운동이 원자의 자립성과 자유를 보장한다. 역설적으로 원자의 자립성으로 인해 원자는 외부 절대자에 통제에 의한 결정론적 직선이 아니라 자기결정적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편위된 사선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데모크리토스가 강조한 단순한 수직 낙하운동은 자립적이지 않고 외부의 강제적인 운동의 사례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편위 운동은 숙명을 깨트리는 운동이다. 운명에 맞서 싸우고 저항할 수 있는 무엇이다.(맑스 76)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이며,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원자의 편위성을 표현하려는 것이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이다. 그리고 클리나멘의 일탈적 운동성은 에피쿠로스 철학으로 가장 잘 알려진 쾌락주의의 존재론적 토대이다.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은 그의 자연학 및 윤리학 전반의 근저가 된다.

2.4 시간과 원자의 실존성

맑스는 세계와 의식이 서로를 반영한다는 방법론의 하나로서 반성형식Reflexionsform을 말했다. 반성형식에는 의식과 실재간의 상호성, 사유와 존재와의 상호성이 포함된다. 맑스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원자가 추상적이고 개별적인 자기의식의 자연적 형식에 다름 아니듯이 감각자연은 대상화되고, 경험적이며 개별적인 자기의식일 뿐이다.”(104)

감각은 개별자의 자기의식이며, 이런 자기의식에서 추상화되어 만들어진 자연적 형식 중의 하나가 원자이다. “추상적인 이성을 통해서만 세계 안의 원자를 판단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감각을 통해서 구체적인 자연을 판단할 수 있다.” (104) 감각자연이 자기의식으로 파악되는 중요한 반성형식의 하나가 시간이다.

데모크르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시간 개념의 차이를 통해서 맑스는 에피쿠로스 원자의 자연성과 실존성을 피력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시간은 1) 발생과 소멸의 계기이다. 2)시간은 원자에서 배제된다. 3)원자는 기원과 시작의 계기조차도 없다.(100)

반면 에피쿠로스에서 시간은 현상의 절대적 형식이다. 사건은 변화를 머금고 있으며 변화의 변동성이 곧 시간이다. 시간은 현상계의 순수한 형식이라는 것이 맑스의 입장이다. 에피쿠로스의 시간은 특수하게 실존하는 자연 안에 붙은 필연성이다.(103) “인간의 감성은 체화된 시간이고, 감각적 세계의 실존하는 자기 안에서의 반성이다” (103)

나아가 맑스는 말하기를 “에피쿠로스에서 감각은 그 자체로 현상계의 반성이고 체현된 시간이므로 현상은 사물마다의 의 필연적 귀결이다.”(104) 감각과 시간이 만나 시간성과 현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뜻이다. 감각으로 지각된 물체들의 우발적(자연적) 사건들의 계기이다. 결국 감각적 지각은 시간의 근원이고 시간 자체이다.

시간의 근원인 감각은 현상계의 반성형식이며 현상은 사물마다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맑스의 판단은 에피쿠로스에서 원자마다의 고유한 성질이 있다는 것에서 얻어왔다. 알다시피 에피쿠로스에서 원자는 원자마다의 고유한 성질ideale Einzelheit을 갖는다. 원자마다 서로 다른 성질에 따라서 원자마다 무게가 서로 다르게 된다. 이런 성질이 있기 때문에 원자는 세계에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맑스는 변증 관계로 이해했다.

맑스가 데모크리토스를 이해한 인식과 대상의 주체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데모크리토스에서 인식의 주체는 객관적 주체이며, 대상의 실재는 감각 이면에 존재한다고 맑스는 이해했다. 나아가 데모크리토스에서 인식의 주체는 자기의식의 자족함Ataraxie des Selbstbewusstseins의 평정이며, 이는 곧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는 진리의 담지자라고 보았다. 그러나 맑스는 이데모크르토스가 보는 러한 대상의 주체적 실재성은 독단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맑스는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을 말하려는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을 부정했다. 지각된 경험이 객관적 현상이지 별도의 실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는 데모크르토스와 다른 존재론적 색채를 지닌 에피쿠로스에 매료되었다. 에피쿠로스에서 감각은 진리를 전달한다. 그래서 감각은 직관적으로 확실하다.

나아가 지각 배후에 공허한 실재계를 거부한다. 감각은 직관Prolepsis과 감정Affekte으로서 반박될 수 없는 분명한 자극이며 반응이고, 그로부터 확실한 지식이 생긴다는 생각을 강화했다. 이런 감각을 통하여 오히려 성찰적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맑스는 생각한 듯하다.

데모크리토스와 달리 에피쿠로스의 원자운동은 일탈의 자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자유성은 외부에서 운동에 간섭하는 조종자가 없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다. 외부 조종자 없는 원자의 자유성은 원자가 그 자체로 (내부 스스로) 자족적이어야 하는 필연성을 의미한다.

데모크리토스에서 오로지 수직궤도운동만이 실재의 존재이며, 일탈운동은 단지 일시적인 가상이나 표피적인 현상일 뿐이다. 반면 외부 존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유로운 운동을 허용하는 에피쿠로스의 원자운동은 실존적이며 그 원자의 존재는 실존적이라고 상호 비교할 수 있다. 정리하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운동이 실재적이라면, 대비하여 말하건데, 에피쿠로스의 원자운동은 실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원자는 질료의 특성으로 실존의 무엇이며, 현상이며, 그 현상이 드러나는 이유는 충돌 때문이라고 앞서 말했다. 원자의 실존성은 원자가 특정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맑스는 이해했다

3. 막연한 것을 신이라고 간주하는 의견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부정

3.1 예언술과 선험성을 부정하는 데서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설명하는 법칙이 본질적이고 단일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천체의 현상이 영원하고 안정적이라는 데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을 거부하는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다수성의 자연현상을 중시한다. 에피쿠로스는 천체의 영원성과 안정성을 부정한다.

에피쿠로스는 아래처럼 말한다고 맑스는 쓰고 있다. “천체의 영원성은 자기의식의 아타락시아를 방해한다. 천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귀결이다.”(111)

에피쿠로스는 하늘을 일자Einer, Oneness의 지배운동으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에피쿠로스에서 천체운동은 일자의 천명에 따라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07) 일자의 명령이란 실제로 하늘의 지복을 염원하는 감각적 마음이 만들어낸 가상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지복성Seligkeit과 불변성Unzerstoerbarkeit은 감각적 믿음에 기반한 추상화의 결과일 뿐이라는 뜻이다.

불멸성에 대한 믿음은 실제로 행복에 대한 염원을 대신한 표현일 뿐이다. 내 밖의 공포와 내 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행동과 희망이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낳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러한 표현은 2천년 후에 흄의 자연종교를 연상하게 한다.

위와 같은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피토클레스Pythocles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편지 안에서 에피쿠로스는 아래의 명제를 제시한다.
i) 불멸성에 대한 믿음은 자칫 우둔함과 미신을 낳는다.
ii)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의 혼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iii) 하늘의 운행 즉 천체운동은 신비로운 신의 명령이 아닌 자연학physiologie의 현상으로 설명가능하다.
iv) 존재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런 이데올로기에 우월성Vorrang(우선성)을 부여하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야만 올바른 천문운행의 자연학을 접근할 수 있다.(109) 천문현상은 일자에 의한 하나의 원인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천문대기 현상은 Haplos(단순원인론)가 아니라 Pollachos(복잡원인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신화적 이야기와 공허한 상상력에서 탈피하여 현상과 감각지각을 중시하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적 태도이다. 자연의 지식을 통해 막연한 공포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 에피쿠로스 윤리학의 기초이다. 자연학적 태도가 있어야 우리는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불행은 막연한 공포심에서 조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는 예언술과 점성술을 부정했다.(맑스, 에피쿠로스, 1st 노트 89번; 맑스 박사학위논문 161)

나아가 일자, 필연적인 것das Notwendige를 부정하고, 또한 i) 보편성allgemeine의 세계, ii) 만들어진 목적론의 세계, iii) 결정된 원리의 세계를 탈피하는 것에서부터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시작된다고 했다. 절대적 결정론을 추구하는 점성술, 미신적 믿음, 그리고 선험적인 형이상학, 절대법칙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만 하늘에 대한 불안Angst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에피쿠로스 행복론의 핵심이다. .

3.2 에피쿠로스가 본 신

데모크리토스에서 세계 안에서 원자의 운동을 지배하는 절대적 위상의 존재를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신은 세계 안의 모든 원자운동을 관장한다. 반면 에피쿠로스에서 신은 어디엔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세계 내 원자운동에 대하여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신은 운동을 관장하지도 않지만 인간에게 처벌과 보상을 하는 존재도 아니다. 신에게는 고통도 없으며 기쁨도 없다. 고통과 즐거움이 있다하여도 느끼지 못하며 타자에게 전달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에피쿠로스 3, 1)

신의 보상과 처벌이라는 신의 원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인간사회에서 권력을 옹호하고 수립하려는 인간의 전략의 소산물이라고 한다. 정말 불경한 사람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신의 이름을 도용하여 일반 대중들의 견해들을 장악하는 사라들이다. 신의 보상과 처벌이라는 원리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불경한 사람이라는 뜻이다.(에피쿠로스2, 123; 필자가 원래의 한글 문구를 약간 고쳤음.)

실제로 신이 요청된 이유는 형이상학이나 예언술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 죽고 싶지 않은 희망, 그리고 죽음 이후의 편안함의 기대가 섞여서 신을 찾게 된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입장이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온다.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부터 행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죽음의 공포를 벗어난다는 실제 의미는 신이 죽음 이후를 관장한다는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는 데 있다. 신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단편을 그대로 옮겨본다.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Is God willing to prevent evil, but not able?
Then he is not omnipotent.
Is he able, but not willing?
Then he is malevolent.
Is he both able and willing?
Then whence come the evil?
Is he neither able nor willing?
Then why call him God?”



4. 행복한 자유

4.1 헤도네로서 행복

행복하기 위하여 신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에피쿠로스 행복론의 중점이다. 행복하기 위하여 결정적 운명을 숨겨놓을 필요도 없다. 에피쿠로스 윤리학을 쾌락주의로 부르는데, 이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즐거움을 최대로 하자는 최대행복의 원리로서의 근대 공리주의 명제와는 다르다.

에피쿠로스의 행복은 일시적 행복감이나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자유로움에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이런 지속적 자유의 향유를 통한 행복은 헤도네hedoně로 표현된다.

헤도네는 공허한 선험주의를 벗어나서 구체성의 행복한 삶을 중시한다. 헤도네는 정적인 불변의 세계가 아니라 변화하는 원자의 운동성을 파악하는 자유로운 시선으로부터 생겨난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시선을 “성찰”이라고 말했다. 성찰은 신을 마주하는 신비주의적 체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의 현실을 마주하는 경험주의적 인식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헤도네는 무작정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인식(지혜)을 통해 얻어진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인식을 실천적 지혜이며 성찰이며 프로네시시pronesis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프로네시시를 통해 헤도네에 이른다고 한다.

프로네시시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개인능력과는 전혀 다르다. 프로네시시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꾸준히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만있으면 우리 생각 안에 망상이 조작되고 기만이 들어차며 당장의 욕망에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런 바닥감정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 한편 우리는 이런 바닥감정을 조심하고 조절하려는 수치심도 가지고 있다.

바닥감정이 남에게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드러나는 것을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수치심이다. 바닥감정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얻어가는 것이 우리들의 또 다른 긍정적 잠재성이다. 그런 수치심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풀어진 쾌락을 수치심이라는 필터를 거쳐 조절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이런 사유훈련과 연습과정을 에피쿠로스는 nephone logismos라고 한다. 즉 기만적 욕구충족이 아니라, 망상의 공허한 의식을 제거하여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삶을 말한다.

이렇게 세계는 나를 자극하며 나는 연습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를 수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의 자유이다. 자유는 세계와 자아의 상호성에서 나온다. 맑스는 세계와 의식이 서로를 반영한다는 방법론을 통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를 비교했다. 세계와 의식 사이의 상호성에서 획득한 자유는 나중에 맑스 철학 전반을 풀어가는 방법론이 되었다.

Epicurus Philosophy

4.2 헤도네를 누리는 철학적 원리와 구체적 방법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조명했던 170년 전의 맑스의 공부법은 고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술과 미신이 우리의 일상사에서 정치사회에 이르기까지 만연된 오늘의 한국사회, 도덕적 몰락과 공공성 파괴를 훨씬 초월하여 기만과 분열, 망상과 집착에 빠진 한국사회의 권력부패를 보면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고전에서 끄집어내어 현실의 실천철학 범례로 삼을 필요가 있다. 에피쿠로스를 흡수한 맑스의 철학은 결국 자본론을 쓰는 데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청년 맑스와 <자본론> 이후의 맑스를 구분하여 이분법으로 그의 철학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를 깊이 독서한 청년 맑스가 아니었다면 <자본론>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 있다. 데모크르토스의 원자론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의 차이를 파악한 청년 맑스는 에피쿠로스의 원자운동론을 통해서 현대사회 속에 숨겨진 자연사와 인류사의 역동구조를 찾아낸 것이다.

맑스는 클리나멘의 원자운동을 통하여 형이상학의 결정론과 목적론적 시간이 배제된 필연성 대신에 “자유와 실존 그리고 역사”의 의미를 체득한 셈이다. 청년의 “자유와 실존 그리고 역사”는 장년의 역사변증법과 비환원적 유물론 철학으로 완성된 것이다.

청년의 철학에서 장년의 철학으로 이어준 다리는 명백히 에피쿠로스의 원자론과 헤도네의 철학이다. 필자가 “자유와 실존 그리고 역사”라고 말한 청년맑스 철학의 키워드는 맑스 후기철학의 기초만이 아니라 결국은 인간의 행복을 말한 것이다.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결정론의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에 도전하면 된다.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어진 목적수행의 부속품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는 실존을 회복하면 된다.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추상화된 논리적 필연성 대신에 현실의 역사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된다. 맑스가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찾아낸 행복은 “자유와 실존 그리고 역사” 안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자유와 실존 그리고 역사” 안의 헤도네”를 어떻게 해야 누릴 수 있나?

간단한다. 두 단계를 거치면 된다.

첫 번째로 권력과 명예를 개인의 욕망 안에 가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된다. 권력과 명예를 무조건 버리라는 말과 다르다. 더 간단히 말해보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남에게 의존하는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그 대신 나 자신이 자신에 자족하는 권력과 자신을 존중하는 명예를 찾아가면 된다. 남에게는 소소한 듯 보이지만 나에게 소중한 그런 행복한 삶을 에피쿠로스는 강조한다. 그런 행복을 헤도네라고 했다.

헤도네에 이르는 두 번째 단계로서 i)주술적 신비주의와 ii)미신적 종교의 그림자, 그리고 iii)결정론적 운명론과 iv)조금만 참으면 다 잘될 것이라는 정치권력의 막연한 유토피아론, 나아가 v)현실을 기만하고 사실을 도피하는 사회적 목적론, 이렇게 사람에게 다가오는 현혹을 냉철한 눈으로 거부하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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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고병권(옮김) 2001,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박사학위논문(1841), 그린비
에피쿠로스(오유석 옮김), 쾌락
에피쿠로스1, 선택과 피함에 관하여
에피쿠로스2,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3, 중요한 가르침
이진남 2012. “에피쿠로스의 욕망과 쾌락”, 인문사회연구 13-1
Breckman, Warren 2013, Adventures of the Symbolic, Columbia University Press.
Epicurus (trans. by O’Conner, E.), The Essential Epicurus, Prometheus Books, 1993
Megill, Allan 2002. Karl Marx: The Burden of Reason (Why Marx Rejected Politics and the Market) R&L Publishers.
MEW(Bd.40) 1968. 257-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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