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을 위한 소통 |
148호(2008년4월) 통섭을 위한 소통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 현대에 들어와 과학의 힘이 무소불위여서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지만, 그 만큼이나 인간의 주체적 지위가 좁아가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인데 거꾸로 과학기술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말과 같다. 과학의 발전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 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행복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IT니 BT니 하면서 첨단의 현대과학을 뽐내고 있지만 지구환경 문제는 더욱 심각한 위기에 처했고 전세계에 걸쳐 국지적인 종교 전쟁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비만이나 성인병 등의 질병은 늘어만 가고 경계 없는 전염병 등등, 전지구적 위협 앞에 우리 인간은 더없이 약한 존재가 되고 있다. 더욱이 전통 공동체 붕괴에 따른 극심한 개인주의와 약육강식의 경쟁주의는 인간이 인간다워지기를 방해하고 있다. 인간이 과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는 문명적 증상을 일러 철학에서는 인간소외라고 부른다. 인간 심연에 놓여진 이런 정신적 소외의 늪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 남으로부터 내가 소외를 당하며 혹은 내가 남을 소외하기도 한다. 더욱이 심각한 상황은 내가 나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것이다. 남을 경계하기 위하여 나의 성곽을 높이만 쌓고 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남을 거꾸로 트리지만 나의 소외는 더해만 간다. 혹은 경쟁의 치열함에서 벗어난다고 했지만 자기만족감보다는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자괴감이 더 커지면서 소외 또한 커져만 간다. 소외의 심연에서 탈출하고자 함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소외로부터의 탈출인가? 아니면 그런 정답이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소외를 가져온 여러 원인들과 촉매들 중에서 흔히 과학을 꼽아볼 수 있다. 그래서 기성 과학을 반성하며 비판하고 과학적 행위를 수정하며 보완하는 과학비판에서부터 환경위기와 자아소외의 탈출이 시작되어야 한다. 과학탐구란 과학이 관찰하는 대상을 자르고 나누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세계를 분석하고 환원하는 행위이다. 과학의 분석과 환원이라는 두 통로는 결국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고립시켰으며, 세계 존재의 옴살(holistic oneness;전일성)을 분해하여 개별자만이 남는 파편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과학비판론의 요지이다. 과학비판론과 함께 전혀 다른 방식의 문명운동이 등장하는데, 일종의 과학문명운동이다. 신과학운동New Age of Science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대 이후 매우 빠른 속도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신과학운동은 고전과학의 피폐성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었다. 그러나 이성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성을 회피하는 신비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결정적 오류였다. 신과학운동은 고전과학을 비판하면서 동양사상을 문명의 전환점으로까지 여길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과학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고전과학을 헌신짝처럼 제치고 그 대신 새로운 과학의 간판격인 양자역학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양자론의 존재론을 화엄경 등의 이미지와 등치시킴으로써 현대과학을 전일론적 세계관으로 뒤집어씌운 것이다. 양자론과 같은 현대과학도 알고 보면 동양적인 통합적 세계관과 꼭 맞았다는 식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이런 운동은 공동체 정신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일종의 구원과 같은 구실을 하기도 했다. 개인주의가 극심한 사회에서 전일적 세계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환경위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적 단초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인간소외에 허덕이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과학운동은 아주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지나치는 것이 문제였다.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봉이 이성을 권력화 시켰듯이, 과학과 이성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다보니 그런 지나침은 결국 이성에 눈감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도구이론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신비주의가 현실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이중적 현상은 쉽게 드러난다. 유전공학이나 나노과학 등의 첨단과학기술이 이미 생활 속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공영방송에서조차 점술이 횡행하고 인터넷에서 재미삼아 하는 팔자타령 또한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다. 이성 체계와 반이성 체계가 서로 모순이 아니라 공존하는 특이성을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문명의 특징이다. 주술과 이성이 서로를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공존하는 이중성, 이 점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런 시야에서 우리는 통섭이라는 최근의 논조를 이해할 수 있다. 통섭의 용어는 대중친화적 생물학자로 유명한 최재천 교수가 데이비드 윌슨D.Wilson의 책 한국에서 이 책이 번역되면서 생긴 문제점은 컨실리언스 개념이 지닌 이런 포섭관계의 실체가 분명히 논의되지 않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수평적 통합처럼 오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오해는 오해를 넘어 왜곡 되면서까지 많은 지식인들에게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구조와 정치사회적 급변에 따른 인간소외와 환경위기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우리 사회에 정착된 분열현상을 치유하려는 노력이 많아졌다. 갈라지고 쪼개지고 찢겨진 학문의 피폐성을 이제 알게 된 학자들 사이에서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이 커졌고 다른 학문들 사이의 수평적 통합의 요구가 증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재천 교수가 번역한 ‘통섭’이라는 용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인 돌파구가 발견된 것이다. 하나로 포융하고 승화하는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과 성리학의 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에 은근히 기대어 “통섭”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 책의 제목은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기대감을 주었다. 특히 우리 현대인 내부에 고착되어가는 분열의 병증을 치유해 보려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통섭의 용어는 너무나 신선한 치료제로서 변신되어 갔다. 과학기술사회의 부작용으로 생겨난 병증들을 오히려 그런 증상을 일으킨 원인자에게 치료를 맡기는 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학을 생물학에 종속시킴으로써 하나의 종합이론을 만들자는 윌슨의 컨실리언스가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생물학과 대등하게 인간학을 펼쳐가자는 포괄이론으로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얼마 전에 인문학을 살려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학술진흥 프로그램에 신청한 대학기관의 인문학 프로젝트들을 심사한 적이 있었다. 많은 프로젝트 신청서 내용에는 통합과 융화, 소통과 탈경계 등의 키워드를 제시하면서 의외로 많은 대학들이 통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 통섭이라는 책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말 그대로 우리 전통사상에 등장하는 통섭이라는 용어는 통합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 매우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청서 연구계획서에 적혀진 통섭의 출발은 모두 윌슨의 컨실리언스에 의존한 것이라서 전통적 의미의 통섭과는 정면으로 대치되고 있었다. 컨실리언스라는 원래의 개념은 통합과 융합의 치료제가 아닌 종속과 포섭으로 가는 위약僞藥;placebo이다. 학문통합에 앞장선 최재천 교수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재천 교수는 원래의 통섭 개념과 원래의 컨실리언스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주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통섭 용어를 만들어낸 최재천 교수의 의도와 다르게 많은 이들이 통섭 개념을 자기 입맛대로 변통하기 때문이다. 과거 신과학운동 신봉자들이 양자역학을 자기 입맛대로 변신시켰듯이 말이다. ‘통섭’ 용어 하나 갖고 웬 논란이 그리 많냐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가 의도한 화해의 시도, 우리 사회에 고착되어가는 대립과 분열의 병증을 치유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통섭의 초발 개념을 서로 타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상호 타진 그것이 바로 소통이며 통섭을 향한 첫발이기도 하다. <끝> ----------------------------------------------- <관련자료> -통섭에 대한 오해, 시민과학68호(07년가을) -통섭이라는 번역어, 경향신문(07년8월7일) |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