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아랑 수단 부통령 사고사 이후
월요일 아침 수단 부통령 그아랑이 인접국 우간다에서 정상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탄 국빈급 헬리콥터가 간 중턱에 부딪치느 바람에 일행 전원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수단의 수도인 카르툼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인민들과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지금까지 약 5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아프리카 어느 국가의 한 정치인의 사망으로 그치는 일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르완다에서 1994년 4월에서 7월까지 약 100일 동안에 100만명이라는 죽음의 폭풍이 있었지만, 수단에서도 지난 21년 동안 끊임없는 내란으로 인해 150만명(유엔 통계)에서 200만명(유럽 통계)의 인구가 죽음을 당한 세기의 광란이 일어난 지역이다.  

지난 2년 동안 20만 명 이상이 죽은 수단의 다르푸르 사태는 올해 봄까지 지구상의 가장 큰 불행을 담은 사건으로 보고되었으며 아직도 그 불씨는 꺼진 것으로 볼 수 없다. 도대체 수단의 정치적 상황의 요체는 무엇인가?

1956년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식민지배로부터 해방한 수단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듯 했다. 그러나 영국은 수단의 500에 가까운 종족을 분리하는 기존의 정책을 독립 신정부에 그대로 이관하였다. 영국은 이집트와의 합의아래 무슬렘 권력에 정권을 일방적으로 이양하였다. 이 점은 수단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천혜의 자연자원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다.

수단은 이집트 바로 남쪽에 있다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북부 수단은 모슬렘 인구가 많으며 남부 수단은 전통 부족과 약간의 크리스쳔들이 있었다. 북부 수단은 일찍이 행정과 조직 권력을 이양 받아 전 국토를 모슬렘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남부 수단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인해 북부와 다르게 독립을 하려는 운동을 시도했다. 이러한 갈등은 1983년부터 수단 남부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의 세력을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정부군과 남부군의 투쟁은 끊이지를 않았다.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려는 북부 정부군은 미국에서 유학을 한 젊은 지성인인 존 그아랑을 남부 반란군을 진압 혹은 조정하는 대사로 임명하교 그를 남부 반란군과의 협상자로 세웠다. 그런데 존 그아랑은 협상은커녕 반란군의 지도자로 변신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지난한 21년간의 투쟁은 연장되었다.

그아랑은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을 창설하고 남부 수단의 지도자로서 강한 카리스마 혹은 강권통치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오랜 내전이 내국의 지하자원에 대한 외세의 영향력과 국내 남북의 이권다툼에 있는 것으로 판단한 그아랑은 결국 북부 정부군과 실질적인 협상에 나섰으며, 드디어 2005년 1월1일부터 일체의 내전을 종식하고 평화로운 정치적 공존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 협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석유 부존자원 및 일일 채취량에 대한 권리를 반분한다.(50:50)
2. 수단의 통일정부를 합의하나, 남부의 (semi-)자치정부를 인정한다.
3. 부통령으로서 남부군의 지도자인 그아랑을 정부 부통령으로 한다.
4. 수도인 카르툼에서 기관 공무자는 70:30으로 한다.    
5. 접경지대에 있는 요충지 3곳(우라늄 산출 산맥지역, 석유 산출지역, 행정적 요충지역)의 국가 관리 공무자는 55:45로 한다.
6. 수도 카르툼의 종교를 모슬렘으로 국한하는 것에 반대하며 부분적으로 모슬렘 헌법 기초를 수정한다.

여기서 내가 기술한 이 협상 내용은 공식적인 발표문이 아니라 각종의 보도자료를(미국 보도를 제외한 bbc와 독일 매스컴 자료) 자체적으로 종합하여 모아 놓은 것이라서, 이외의 주요한 내용이 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을 이끌어낸 그아랑은 그의 철권통치 장치권략에도 불구하고 남부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또한 이 협상은 미국 등의 외세의 영향력을 거의 받지 않은 주체적인 협상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갑작스런 그의 사고사로 인하여 남부인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다 준 셈이다. 그의 죽음이 있자마자 월요일 당일 날 SPLM은 그의 후계자로서 키르 Kiir를 선택하였고 부통령으로 임명하는 등, 그아랑 죽음 이후의 소요 사태를 서둘러 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및 영국 중국 등은 전권 대사를 파견하여 그의 죽음 이후 수단의 정치향방에 대하여 조정을 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왜 그런가? 그 내막을 살펴보아야 한다.

수단 남부의 석유 자원은 20억 배럴 이상의 부존량을 자랑하며 요즘도 일일 32만 배럴을 채유하며 서방 세계로 수출한다. 미국은 중동의 석유 지배권이 흔들리면서 그 대체방안으로 수단에 대한 석유권을 항상 노려 온 상황이었다. 그러자니 미국은 남부 정치권에게 잘 보여야 했다. 물론 정부 권력인 북부 정권에 대한 당근과 채찍을 놓을 리 없엇다.

우선 미국은 빈라덴의 소재를 두고서 수단 정부를 압박해 왔다. 1990년 초 빈라덴이 수단에 거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량학살무기 생산 거처에 대한 콘트롤의 일환으로 1998년에 미국은 수단의 수도 카르툼에 있는 엘시파 제약공장을 미사일로 폭격했던 사건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당시 미국은 그 공장에서 신경독가스를 생산한다는 명분으로 폭격했지만 그 공장은 여느 일반 제약회사와 다름이 없었다. 결국은 수단 국민들이 의료공급을 받지 못하는 엉뚱한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그 이후 미국은 아무런 변명조차 없이 그냥 슬쩍 지나치는 일로 해버렸다. 불쌍한 수단인이여! 그 이후 미국은 원래 석유지배권에 관심있었던 터라 석유채굴과 관련하여 수단에 대한 지원을 하였고 테러배후국에 대한 경제무역통제에서 은근히 수단만을 제외하는 등, 기이한 동반자로 세웠다.

영국은 어떠한가? 더 가관이다. 유럽의 석유회사 중에서 두 개의 거대기업이 남부 수단에 진출해 있다. 하나는 영국의 작은 석유기업인 White Nile이다. 와이트나일사는 이번에 죽은 그아랑과 아주 절친한 관계였다. 그 기업은 불과 2년 신생의 기업이었다. 그런데 그아랑과의 관계 때문에 그 기업은 창업 당시 불과 한달 만에 주가가 10배 이상 뛰는 기현상을 보인 희한한 곳이다. 수단 부존량의 60% 가까이인 2000억 달러에 해당하는 10억 배럴을 이면합의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이번에 월요일 런던 주식시장에서는 이런 여파로 그아랑의 죽음이 와이트나일사의 주식이 12%나 급락을 하였다. 알만 하지 않은가? 

프랑스 석유기업인 토탈Total 은 제법 큰 대기업인데 영국의 작은 와이트나일에 그동안 밀린 것을 그아랑의 죽음으로 만회하려는 움직임을 재빠르게 보이고 있다. 원래 토탈사는 80년초반부터 정부군 사이의 이면계약이 합의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을 주장하엿다. 그러나 그아랑의 실세에 밀려 남부에 부존된 석유권 상실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있었다. 그래서 이번 그아랑의 죽음을 통해 프랑스 기업은 석유권을 만회하려는 기회로 삼고 있다. 그런데 요즘 미국과 프랑스 영국이 아닌 다크호스가 등장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석유기업들도 수단에 4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면서 석유채굴권 및 석유탐사 공동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던 차이다. 이렇게 강대국들의 석유전쟁에서 놀아난 곳이 바로 수단이었고, 수단의 21년 내전의 내막이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2년 동안의 다르푸르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다르푸르 사태는 엄청난 대량학살의 현장으로서 이상하게도 서방세계는 중동과 달리 다르푸르의 대량학살 사건에 대하여 침묵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다르프루 사태와 수단 남북 사이의 갈등이 일치하는 사건은 아니지만 그아랑의 미래는 다르푸르 사태를 진정하는 효과를 지녔다고 평가한다. 다르푸르 사태는 아랍계 모슬렘과 원주민 모슬렘 사이의 갈등이었다. 불과 2년 동안 20만에서 30만명이 학살당한 엄청난 사건이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적극적인 개입을 꺼려하였다. 석유전쟁도 아니고 그들의 이권과 무관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단기간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1994년 불과 100일 동안 100만명이 죽은 르완다 대학살 사태 다음으로 큰 사건이다. 더욱 슬픈 일이다.

아프리카는 머나먼 남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서구의 역사가 만든 제국주의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타자의 희생물이 되기 이전에 주체적인 역사의식이 요구된다.
 
그아랑 수단 부통령 사고사 3일 후
2005년 8월3일 씀 최종덕
철학의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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