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아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루지아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2008년 8월 8일로 시작한 러시아 그루지아 전쟁은 도중에 휴전을 선언했지만 계속되었고 오늘 13일 현재 러시아의 정전으로 일단락되는 듯하나 아직 그 미래는 묘연하다.
그루지아Georgia는 아시아와 서방이 만나는 접경지역으로서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점을 갖고 있다.
북쪽은 러시아와 경계이며 남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그리고 터키와 접경을 한다. 동으로는 카스피해 서로는 흑해에 연안하여 동서의 교역로, 에너지 수송로 등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인종 역시 코카서스, 서방계,아랍계, 투르크, 몽골까지 포함된 매우 다양한 인종분포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8세기말까지 터키 지배였지만 19세기 들어(1801년) 러시아 지배권에 속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 혁명과 함께 소비에트 예속국이었다가 1920-30년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등과 함께 독립하여 잠시 동안 코카서스 연방을 이룬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귀속되었다. 1991년 소비에트가 무너지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독립이 되었다. 독립이 될 때 오세티아 지역의 북쪽은 러시아에 편입되었지만 남쪽은 그루지아로 편입된 것이 문제였다. 그렇지만 소비에트로부터 독립할 당시 그루지아 북쪽에 위치한 남오세티아는 독립적인 자치구로 남게 되었다. 어쨌든 그루지아는 1991년 이후 여전히 러시아계 정부가 들어섰다가 2002-03년 과도기 정부를 거쳐 2004년 현재의 사카슈빌리 정부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2004년 현정권이 집권하면서 남오세티아 지치구를 그루지아로 강제 편입시켰다. 이때 러시아는 제대로 대항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푸틴은 매우 기분이 상했지만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푸틴의 이익에 맞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러시아가 미국에 대항하여 세게 나온 것이다. 그리고 너무 갑자기 세게 나와서 미국도 당황하고 대처를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 정확한 분석이다. 

어쨌든 남오세티아는 원래 그루지아가 아닌 독립자치구였으며 인구의 70-80%가 러시아계 인종이어서 당연히 친러시아적이다. 2002년 구 그루지아 정권을 무너트린 소위 장미혁명이 기억난다. 당시 텔레비전에도 멋있게 비춰졌다. 구 집권지를 무너트리기 위해 국민 모두가 장미 한 송이씩을 들고 손에 손잡고 무혈혁명으로 구정권을 붕괴시켰다. 서방세계는 이러한 혁명을 장미혁명이라고 했다. 멋있엇다. 그런데 그런 장미혁명은 미국으로 지향하는 첫단계였다. 새로이 대통령이 된 사카슈빌리는 제일 먼저 그루지아 영토를 정착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래서 주변의 4개 지역을 그루지아로 편입시켰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문제가 된 남오세티아 독립자치구였다. 그러나 이후 남오세티아는 항상 재독립을 염원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그루지아 정부는 결국 남오세티아를 무력으로 침공하게 되었다. 그 날자가 바로 8월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직전이었다.

이에 곧 러시아는 그루지아를 공격하였다. 정확히 알아야 할 점은 러시아가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루지아가 남오세티아를 침공한 것이다. 이 대 약 2000명의 정도의 남오세타아 국민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5일째인 13일 현재 러시아와 그루지아는 전쟁을 중단햇다. 사실 그루지아는 러시아의 전쟁 상대가 될 수 없다. 자, 좀 더 그루지아 내막을 보자.

미국의 부쉬(부쉰다의 약자)는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이라크 재건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쫄병 국가들에게 이라크 파병을 강요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루지아도 부쉬의 요청에 따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그루지아 자국 군대를 파병했다. 이번 러시아 공격에 맞춰 미국은 별다른 대처를 하질 못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그루지아 파병군을 고향인 그루지아로 원대복귀시켜 러시아와의 전투에 투입시키는 일이었다. 정말 몇 일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8일 전쟁 시작, 10일 파병군 복귀)  그리고 미국은 사카슈빌리 정권 이후 그루지아 군대에 대한 전투교육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그루지아의 군인같지 않은 군인을 미국이 직접 나서 전투교육 시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시킨 것이다.   

그루지아 정권 변혁 2002년 이후 러시아는 그루지아에게 남오세티아에 대한 불간섭정책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사카슈빌리는 미국의 이런 빽을 믿고 과감히 8일 남오세티아를 공격한 것이다. 미 해병대가 직접 자국군을 전투훈련을 시켰고 이라크 파병군까지 소유하게 된 사카슈빌리는 나름대로 힘의 권력을 자만했던 것이다. 막상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믿었던 미국이 전쟁참여를 회피했다. 그래서 그루지아는 당연히 러시아를 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방세게도 이번에 러시아에 대하여 힘을 쓰질 못했다. 프랑스의 사코지가 중재에 나섰으나 제대로 되지 못했다. 사코지가 개인 휴가 중이었는데 휴가를 매우 중시하는 아주 자유분방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휴가중에 시도한 푸틴과의 중재도 무산되었을 정도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루지아와 남오세티아 간의 과거 역사를 볼 때 그루지아의 선제공격에 대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더 힘을 얻게 되었고 부쉬의 임기말 레임덕을 믿고 강하게 밀어부친 점도 있다. 그루지아 역시 그동안 미국의 사카슈빌리에 대한 과도한 지원,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사들인 군사무기와 포탄, 미 해병의 작전훈련 및 군사훈련과 이라크-아프가니스탄 파병경험 등으로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푸틴 역시 지나친 전략가의 모습이었다. 대통령이엇다가 총리를 연이어 하는 사람은 아마 푸틴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지금도 러시아의 실력자는 푸틴으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푸틴은 90년대부터 남오세티아를 러시아인 북오세티아와 동격의 지위를 부여하는 정책을 펼쳐왔었다. 예를 들어 북오세티와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시민권과 동급여권을 발행 한 것이다. 15년 이 지난 지금 그런 정책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푸틴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구 동구권 국가들의 연합인 CSI를 탈퇴하고 서방 나토에 가입하려는 그루지아의 꿈은 괜히 먼저 시작한 이번 전쟁으로 인해 무너졌다. CSI에 재가입한다는 조건이 정전 조건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2004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카슈빌리는 과거 세바르드나제 대통령과 달리 매우 선진적이고 진보적인듯 보였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인기도 많은 편이다. 외모도 매우 준수하여 젊은 여성으로부터 인기가 최고라고 한다. 더욱 큰 인기는 사카슈빌리의 정책 대부분이 미국을 따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사회주의권에서 벗어나거나 독재정권에서 벗어난 전세계의 신생정권들은 대부분 미국을 닮지 못해 안달이다. 그 국민들 역시 잘못된 계몽으로 인해 친서방, 미국지향적이다. 그루지아 역시 한국 이상으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 경우들의 정권을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런 친미적 정권 집권 세력 혹은 집권자가 미국 유학생 출신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사카슈빌리가 그러하고, 미국의 대리인으로 전락한 이라크 현대통령 역시 미국 유학생 출신이며, 당연히 일제로부터 벗어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정권 집권자 이승만 역시 미국 유학생 출신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친미적 이승만과 친일적 박정희, 두 양면성을 고루 갖춘 정권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으로서 눈에 확띄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미국의 패권주의, 그리고 미리 알아서 미국에 굽신거리는 우리의 자화상,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루지아 사태를 보면서 느낀 점이다.  (최종덕씀©2008년8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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