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대학살 이후, 그 분노
르완다 대학살 이후, 그  분노

엔디시미에 라는 르완다 사람이다. 르완다에서 1994년 4월에서 7월까지 불과 100일 동안 80만명 이상 100만명 가까이 학살당한 인류 역사의 가장 처참했던 대학살에서 용케 살아남은 한 사람이다. 14년 전 악몽이었지만 실은 그는 지금도 죽임의 위협 속에 시달리고 있다. 왜 그럴까?

벨기에의 식민지배 동안 벨기에의 철저한 인종분리정책은 독립 이후에 그 후유증이 너무나 컸다. 그 후유증의 핵심은 소수 인종 투치Tutsi족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다수인종인 후투Hutu족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피라미드 식민지배의 후유증이다. 이 후유증은 1994년 투치족 대통령이었던 하바야리마나Juvenal habyarimana 가 탄 비행기 폭발로 죽자, 이를 계기로 후투 극단주의자들이 규합하여 투치 인종 및 학살을 비판하는 온건 후투족까지 무차별 학살에 들어간 우리 인류의 대참사였다.

100일 동안의 비극이 끝났다. 학살을 유도했던 많은 후투족들이 재판에 넘겨졌거나 아니면 이웃나라로 피신을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는 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 전범 재판부는 다음 후임인 투치족 카가메 Paul Kagame 대통령 및 그의 측근 40명 정도의 관리들이 후투족 전 대통령 하바야리마나 대통령 비행기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전범재판에 기소 중이지만, 카가메는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 또한 당시 100일 동안의 대참사 시 유엔평화군이 손놓고 있을 때 소수의 프랑스 군이 개입했었고 몇몇 전사자가 생기자 곧장 철군하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2008년8월초) 유럽통 소식에 의하면 프랑스는 대참사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케가메 대통령의 주장에 의하면 오히려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투치족에 대한 분노와 학살을 유도하기 위해 하바야리마나 대통령을 암살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2008년2월 이후) 스페인 재판관은 카가미 대통령과 그의 측근40명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태다. 그런 관계로 르완다와 스페인의 관계가 매우 긴장된 상태다.

누가 대학살의 도화선을 붙였는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르완다 국민 사이의 분리된 분노가 가득하다는 점이다. 100일 대학살 사태 이후 학살 당사자였던 후투 극단주의자들은 재판에 넘겨졌거나 피신갔다가 다시 르완다로 돌아와서 사면을 받기도 했다. 옆집 사람이 갑자기 대창을 들고와 처자식을 죽이는 것은 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잇을까? 그러나 그 안에 내재된 분노는 가시지 않고 있다. 당연하다. 이후 살인사건은 대부분은 1994년 대학살과 관련된 감정의 응어리와 연과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1994년 이후 투치족에게 살해당한 후투족도 많지만, 당시 살아남은 투치족이 여전히 극단주의 후투족에게 살해위협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 한 사례가 앞서 말한 엔디시미에 라는 평범한 투치족 르완다 국민인 것이다. 대학살이 끝난 1995년 이후 이렇게 후투족에게 죽은 투치족이 150명이상이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그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고 있다. 이 분노를 해소하려면 첫째 분노의 원천이었던 제국주의 분리정책의 원흉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과거의 분노를 계속 이용하여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고 증폭하려는 권력지향그룹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셋째, 현시점에서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를 포용하면 된다. 이러면 해결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6.25전쟁 이후 남과 북의 사람들 사이의 분노는 너무 컸다. 전쟁을 겪은 세대와 이후 세대 사이의 분노는 그 차이가 매우 크다. 전쟁이 끝나 60년 가까지 되지만 그 분노는 이어지고 있다.  왜 그럴까 분노를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보통 그들을 색깔론자라고 부른다. 상대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냉전의 아픔이 아직도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다. 우리 안에 내재한 분노를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르완다 상황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를 풀어가야 한다. 민족분리주의 근거였던 일제의 흔적과 이념분리주의의 현재인 미국의 경찰주의 세력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둘째 분노를 이용하여 권력을 증폭하려는 그룹을 인지해야 한다. 셋째 남과 북 사이의 더 많은 것을 가진 쪽이 적게 가진 쪽을 포용하면 된다. 

분노는 역사를 퇴행시키는 전형적인 인간요소이다. 인간은 말과 글을 가졌고 더군다나 장기기억을 가진 호모사피언스로서 그 분노의 지속성이 더욱더 길다. 이래서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짧은 분노는 나를 생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긴 분노는 나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 나아가 인류 공동의 역사를 파괴하는 기본요소가 되기 때문에 더욱더 큰 문제다. 마약적 분노에서 벗어나려면 분노에 중독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최종덕씀2008년8월21일)
철학의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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