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공동체
국학진흥원 포럼 <유교와 공동체> 토론문; 2010년 7월 23일 서계 고택
 
공동체 개념은 작다는 뜻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함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
 
동양학 선생님들 모임에서 나 같은 서양 학문하는 이를 불러줘서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런데 <유교와 국가공동체> 논문을 읽고 당황했다. 내가 생각한 공동체 의미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글을 대하자마자 단박에 정치학 논문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논문은 나의 지식과 사유의 범위를 넘어서 있어서 내가 논평하면 분위기를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토론자로서의 몫을 해야 한다. 정치학 내용에 대해 왈가불가할 처지가 못 되고, 그냥 공동체 일반에 대해 말한다.

서양윤리학에 따르면 개인주의에 대비되는 개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집단주의collectivism이다. 또 하나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 이다. 여기서 우리 관심은 공동체주의일 것이다. 요즘 책방에서 신기할 정도로 제일 잘 나가는 책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번역서인데, 그 저자 샌델이 공동체주의 이론가이다.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공동체는 기초적인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지역성locality이며 다른 하나는 공동체 정서community sentiment이다. 지역성은 작은 공간을 뜻하며, 공동체 정서는 소박한 마음을 뜻한다. 둘 다 작다는 뜻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이렇게 공동체 개념은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 공동체 규모가 크면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이 될 우려가 많다. 우려라는 말은 겸손한 표현이다. 사실대로 말하라고 한다면 큰 공동체는 누구를 위한 권력유지의 이론적 도구로 전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큰 공동체들 예를 들어 민족공동체는 배타주의를, 국가공동체는 제왕주의를, 세계공동체는 제국주의를 나아가 우주공동체는 신비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나 혼자만 그런 연상을 하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큰 공동체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뜻이 아니다. 큰 집단은 현대문명이 짊어지고 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큰 공동체가 작은 공동체의 집합임을 인정할 경우, 큰 집단의 행복에 접근하기 위해 작은 공동체의 조건들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철학적 조건들에 초점을 둔다. 내가 생각한 작은 공동체의 철학적 조건은 수평과 소통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수직 관계에서 수평 관계로
2. 권력 관계에서 평등 관계로 - 성적/물적/신분적 평등
3. 중심 지향에서 주변 지향으로 - 중심 없는 중심, 모든 주변의 중심화
4. 나를 말하기보다는 너에게 경청하기
5. 고상한 엄숙함 대신 흥겨움(樂)을 서로 나누기
6. 관조보다는 참여
 
큰 집단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집단 규모가 크면 클수록 열거한 작은 공동체의 철학적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렇다고 큰 집단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구성원들이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역사적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열거 조건 4,5,6은 禮樂 공동체 조건에 맞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예약공동체도 규모가 커진다면 예악의 기능이 능동적 조화가 아니라 억압적 도덕으로 될까 걱정이다. 조건 1,2,3 없는 예악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보다 집단 내 권력소수집단을 위한 언어의 잔치로 바뀌었던 것이 인류 역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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