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
시민철학교실 1회차 -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원주 철학교실 01

인간의 본성이 어디에 있는가



어느 숲속에 일개미들이 모여 사는 흙두덩 개미집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개미집 흙두덩 안의 일개미들 사이에는 말 그대로 일만 하는 개미들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고 노는 개미들이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생태학자가 발표한 것이 있었다. 그 생태학자는 파일럿 실험이라는 일종의 소규모 표본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개미군집의 생태적 연대성을 부각시켰다.

예를 들어 10만 마리의 개미무리가 하나의 개미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가운데 7만 마리는 일을 하고 나머지 3만 마리는 놀고 있다. 그래서 일하는 개미 7만 마리와 노는 개미 3만 마리를 분리시켰다. 그러자 이와 동시에 일하는 개미 7만 마리 소군집 안에서 자동적으로 다시 30%의 노는 개미가 형성되고, 노는 개미 3만 마리 소군집 안에서 자동적으로 70%는 다시 일하는 개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의 핵심은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두 군집 사이에서 일어난 비율의 변화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과, 그들 사이에서 어떤 개미는 일하고 어떤 개미는 놀게끔 하는 외형의 물리적 신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적으로 노는 개미와 일하는 개미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들에게 매우 놀랄 만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개미의 개체가 분리되었다는 이성적 전제를 가질 경우, 우리는 이런 개미군집의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분리된 존재에 대한 이해는, 이 세계는 상호 아무 관계가 없이 고립되고 개별적인 개체적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原子論)적 사유방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원자론적 사유는 서구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만들었으며, 오늘날 산업사회가 낳은 개인주의의 한 단편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서구과학의 덕분으로 물질적 풍요로움을 얻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오고가는 관계의 끈들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문명론적 상황을 철학에서는 ‘인간소외’라고 표현한다.

인간소외에 대한 위기감은 서구사회에서 먼저 표출되었고, 당연히 이런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안적 사유가 등장하였다. 그중 하나가 세계를 하나의 연결망으로 보는 전일론적 세계관이다. 전일론적 세계관에서는 기존의 분석적인 세계관 대신에 부분들의 단순한 합을 넘어선 전체의 상호연결망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 상호 연결망이라는 것은 분석이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동시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도 아니다. 일종의 관계성이지만 분명히 내재적인 그 무엇이다.

이런 내재적 상호 연결망의 모호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관계적 자아의 의미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관계적 자아란 나와 너 사이의 통합적인 연대와 관계를 통해 전체와 부분이 항상 대화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임을 몸으로 느낄 때 성립한다. 하지만 문제는 불행하게도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나와 너의 공동체적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인가

공동체성이 상실되면서 야기된 삶의 소외는 결국 너와 내가 함께 하는 공동체적 소유가 아니라 나만의 소유를 고집할 때 더욱 가속화된다.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소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심각한 존재의 파괴가 일어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집에서 요리할 때 가끔 양파를 다듬게 된다. 우선 겉껍질을 벗기고 칼질을 하려는데 양파 속의 맨 겉껍질이 물러 터져서 다시 한 겹을 더 벗겨낸다. 그런데 그 다음 겹도 물러서 다시 벗겨냈는데도 또 물러 터져 다시 한 겹을 더 벗겨낸다. 이렇게 자꾸 벗겨내니 막상 먹을 양파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양파는 내용물이 겹층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까지 내용이고 어디까지 껍질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양파는 사과처럼 껍질과 내용물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먼 옛날 신석기 말기부터인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에게서 언어와 삶이 유리되면서 우리는 존재와 인식과 행위를 나누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존재를 지칭하는 주어가 반드시 먼저 있어야만 인식과 행위를 기술하는 동사를 그 주어에 갖다 붙일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얽매어 있다. 존재는 고정된 어떤 틀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고정된 존재가 있어야만 비로소 인식과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세계를 분화시키는 사유의 출발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이분화된 사유는 대상과 나를 구분하여, 나를 중심으로 대상을 보려는 자아 중심적인 언어행위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유는 결국 양파를 겹겹이 벗기다 보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되는 원숭이의 얄팍한 재주에 비유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아와 대상의 구분은 인간에게서 소유의 영원한 욕심을 낳게 하는 사유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동물들에게 소유의 의미는 욕망의 인식이나 그것을 얻으려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행위가 같이 녹아 있는 존재 그 자체이다.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아메바의 포식작용을 예로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메바는 먹이를 포식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 일부를 뻗어 먹이에 부착시킨 후, 몸체를 끌어당겨 그 먹이를 감싸는 행위를 한다. 그렇게 뻗어 내리는 자신의 몸 일부를 우리는 허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허족은 몸체와 따로 분리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몸일 따름이다.

이렇듯 아메바의 몸이 아메바의 존재라면, 행위를 담당하는 허족도 아메바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아메바에게서 존재와 행위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허족의 뻗침은 아메바에게 있어서 행위이듯이 동시에 그 행위는 먹이를 포식하려는 인식작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메바에게서 인식과 행위는 같은 것이다. 요컨대 아메바에게서 존재와 인식 그리고 행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현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의 진화과정에서 존재와 인식과 행위의 일체가 깨어지고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명사회로 들어서면서 인간의 인식과 행위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있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적어지고, 아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었다. 문명은 인류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은 끝없는 소유의 유산이었다. 그래서 나의 소유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나의 소유는 필연적으로 너의 결핍을 동반하게 마련이었다. 소유의 나는 살아남을 수 있고 결핍의 너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강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문명사회의 지배논리로 되었다.

인간 소유욕구의 특징은 그 욕구가 충족될지라도 여전히 소유욕을 버리지 못하고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존재와 인식과 행위가 통합된 동물의 소유는 존재의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소유의 욕구도 그치고 만다. 이 점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특징이다. 동물은 존재의 소유가 해결되면 그것으로 소유의 행위도 그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소유를 지향한다. 존재를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소유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땅의 사자나 혹은 물의 상어도 배가 채워지면 먹이사냥을 그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오로지 소유를 위해서 계속 소유욕망을 실현코자 한다.

인간의 소유욕망은 더 이상 개체의 존속과 종의 증식을 위한 인식적 도구가 아니라, 문명사회와 함께 주어진 인간의 가장 큰 존재특징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소유욕이 오히려 인간상실과 집단절멸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의 환경위기, 인간소외, 자원고갈, 국제분쟁 등에서부터 주변에서 일어나는 화내고 다투고 시기하고 뽐내고 남 업신여기는 등의 행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세간사의 분화된 존재는 모두 소유의 질곡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

관계론적 자아의 회복

관계론적 자아의 모습이 상실되면서 우리는 과연 내가 누구인지를 아주 자조적으로 묻는 소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복잡한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기껏해야 나는 내 직장의 총무부 대리이고 동네 조기축구회의 총무이며, 고등학교 동창회 간사이고, 두 아이의 아비이며 등등의 역할의 집합으로서 나를 규정하고 말기 십상이다. 이런 자아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집착의 자아를 낳을 뿐이다. 이런 자아는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양파와 같은 자아이기도 하다. 역할의 집합으로서의 자아는 결국 기계 부속품들의 집합으로서의 자아와 진배없다.

기계를 조립하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맞추어 똑같은 부속품을 똑같은 방식으로 조립하는,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할뿐이다. 어떤 노동자가 소변이 마려워도 그 노동자의 생리적 상황에 맞추어 컨베이어벨트가 멈추지 않는다. 단지 컨베이어벨트가 정기적으로 멈추는 휴식시간에 그 노동자는 참고 있던 소변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공장 시스템은 인간을 위해서 기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는 셈이 된다.

현대 산업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이를 일러 철학에서는 ‘소외’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외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로부터 혹은 물질문명으로부터 당하는 문명적 소외를 일컫는 것이다.

1930년대에 나온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가 있다.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이 영화는 톱니바퀴로 상징되는 차가운 기계성에 의해서 인간성이 상실되고 인간이 기계의 노예로 전락해 가는 피폐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철학적 소외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삶의 소외는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을 위한 도구로서의 과학기술이었건만, 이제는 오히려 과학기술이 주인 행세를 하고 인간이 도구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도구화되어 버린 인간은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조차 던질 수 없게 되었고, 결국은 나는 엄청난 과학기술의 권위 앞에서 돌에다 계란 한번 던지는 그런 시늉조차 해보지 못하고 나 자신을 포기해 버리곤 한다. 이를 우리는 인간소외의 극대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극도로 산업화되어 가는 현대 과학기술 사회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일종의 중독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은 물론이거니와, 요즘은 종교를 가장한 주술과 신비주의 중독이나 정보 유토피아를 가장한 인터넷 게임중독 혹은 소비중독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중독현상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을 그 어디에도 천착시키지 못하고 표류하는 삶의 방황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신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나아가 미래를 상실하는 중독증이 인간 자신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상업주의가 결정해 준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런데 잉여의 소비재까지 소비하도록 만드는 현대 산업사회의 진짜 문제는 소비재뿐만이 아니라 소비주체인 자기 자신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문화적 역류구조에 있다.

아마도 현대인에게서 과학기술은 피해갈 수 없는 문명적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상황들이 현실적으로 우리 인류에게 머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현대 과학기술은 우리 인류에게 엄청난 물질적 혜택을 주었음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만큼 부정적인 측면인 인간성 상실이라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부작용의 근원은 과학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과학이 기술과 산업 그리고 자본과 결합하면서 생긴 인간의 욕망과 경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옛날에도 사람들끼리의 경쟁과 욕망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인류의 종족보존이라는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문명사회에서는 지나친 이기심의 충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과학문명사회의 부작용을 해결하는 열쇠를 과학 그 자체에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근원적으로 물질문명이 가져다준 과도한 욕망과 경쟁을 줄일 수 있는 인간적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한 치유는 바로 관계론적 자아를 되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연인과 몸을 서로 부딪길 때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저 멀리 아프리카 땅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의 몸을 내 몸처럼 같이하는 일은, 내가 너와 만나고 내가 너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일상적인 관계망의 한 부분임을 느끼는 것이다. 나 하나의 존재는 실은 전체의 그물망 속의 한 매듭일 뿐이다. 그 매듭은 삶 속의 작은 만남의 실현을 통해서 거대한 우주적 삶과 만나기도 하고, 전체 그물망을 하나로 반영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호 관계망은 억지로 만들거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에게 있는 것을 찾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자연 그 자체는 원래부터 일체의 신비성이 없으며 그 모든 것이 다 일상적인 소통의 내적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상성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이 언어에 의해 멀어져 버렸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논리언어의 지배력에 눌려서, 자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소통의 내적 구조를 읽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꾸 밖에서 신비함을 찾으려 하는 소외의 나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나의 손가락 끝만을 볼 수밖에 없는 네가 말하기를 나의 손가락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다섯 개의 개별적인 개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손가락들이 손에 붙어 있는 하나의 손일 뿐이다. 너는 나의 손가락들이 모두 떨어져 있는 개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내 새끼손가락이 다친 것을 엄지손가락이 동시에 같이 아파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터이지만, 나는 나의 손가락들이 모두 나의 손으로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손가락끼리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손가락끼리의 아픔을 동시적으로 공유하는 일이 너에게는 신비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성일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소통망은 대단한 외적 구조를 지닌 것이 아니라, 공기를 숨쉴 수 있고 계절을 감각하며 아픔을 느끼며 두려움과 기쁨을 느끼는 생명진화의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자연의 소통망은 생명개체의 진화와 더불어 진화한 환경의 진화결과이며, 대단한 신비의 교조적 터울이 아니라 저편 하늘의 노을과 각양의 단풍들의 어우러짐, 작은 씨앗의 생명기운, 눈의 깜박거림이나 심장박동처럼 일상성의 바구니와 같으며, 단지 ‘어떻게’가 밝혀지지 않은 일상성의 현시일 뿐이다. 가짜 신비의 환상에서 벗어나 진짜 신비한 일상성을 찾는 일이 바로 삶의 구체성이다.
원주시민철학교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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