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강신익 교수의 '노화의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한국철학회 2010년 추계 학술 대회

주제 : “늙어감”에 대한 철학적 성찰 일시: 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장소: 대전대학교

[기조강연]‘늙어감’에 대한 윤리학적 성찰– 발표: 황경식(서울대 철학과)

1. 노화와 장수의 개념의 인식 전환 필요성
발표: 박상철(서울대 의학과) / 논평: 강명신(연세대)

2. 노화의 과학과 나이듦 또는 늙어감의 철학
발표: 강신익(인제대 의대) / 논평: 최종덕(상지대 교양학부)

3. 고령화 사회와 성공적 노화
발표: 최성재(서울대 사회복지학과) / 논평: 김영기(경북대)

4. 유학의 관점에서 본 ‘늙어감’
발표: 김문준(건양대 교양학부) / 논평: 최영진(성균관대)

5. 늙어감과 실존적 감정
발표: 최인숙(동국대 철학과) / 논평: 임화연(대전대)
 

논평문 :  강신익 교수의 '노화의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강신익의 논문은 과학이 철학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범례적 글쓰기라고 생각된다. 노화라는 소재를 통하여 동서, 고금 및 자연-문화 사이의 절묘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늙어감’을 익숙해지다가 다시 낯설어지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일종의 문화적 삶의 전개로서 여겨졌다. 동시에 그러한 생의 변화를 뇌의 신경접합(시냅스) 혹은 면역적 기억의 동력학에 유비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하였다. 문화적 실존과 과학적 실재 사이의 밀접한 상관성 혹은 상보성을 시도한 글이었다고 보여진다. 나이듬과 늙어감을 구분하면서도 결국은 삶 속에서 통하게 된다는 필자의 입장을 전개하는 논변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몇몇 질문을 하고 싶다.
 
첫째,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고 전개한 논변에 대한 질문이다. 노화를 방지하는 입장보다는 노화를 수용하는 것이 더 건강한 노인의 삶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언뜻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삶의 실존을 이해하는 중요한 점이라는 데 동의한다. “젊음의 샘은 없다”라는 노화전문가 그룹의 발표는 이를 더욱 확증해준다. 그러나 죽음과 노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응의 태도 혹은 공자가 말하듯 나이 일흔을 받아들이는 초연함의 자세는 보통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너무 멀리 동떨어져있다고 느껴진다. 쉽게 말해서 대부분의 일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으로 가는 통로로서 늙어감을 되도록 막아보려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도교적 의미의 양생론은 그 초연함과 불로장생의 집착이라는 양면을 다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양생養生은 죽음을 멀리하려는 일련의 생물-문화적 시도들의 조합이다. 불로초 등의 신선환에서부터 황제내경의 처방 등에 이르는 생물학적 양생이 있다. 한편 당대 춘추전국시대에서 후한대에 이르는 전쟁의 혼란기에는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양생이 요구되었다. 한때 흥하다가도 갑자기 망하는 권력 이동이 극심한 상황에서 왕을 포함한 관리들이 앞에 나서서 하는 주장과 발언 및 행동을 자제하는 길은 확실한 양생의 한 방법이었다. 나쁘게 말해서 복지부동을 해서라도 내 한 목숨 연장해 보자는 말이다. 반면 아주 좋게 말해서 그런 양생법을 무위無爲의 도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태도는 문화적 양생에 해당한다. 목숨을 부지하고 몸을 보양하여 좀 더 오래 살아보자는 것이 생명의 원래 모습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드린다. 도가의 잠언 수준인 성스런 무위 개념을 이렇게 천박하게 낮추어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노장 전공자들의 비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손 생식의 의무를 마친 이후 현재를 더 버티려는 머무름의 삶과 <황제내경>에서 말하는 정精기氣신神 중에서 정精에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보양하여 자손 생식을 더해보려고 기를 씀으로써 진화론적 노화에 도전하려는 시도들, 모두 무위 안에 이중적으로 포섭되어 있을 수 있다. (정의 보양이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진화론적 노화해석이나 황제내경-도교적 노화 해석은 상대적으로 남성중심적 상징을 내재한다) 어쨌든 죽음과 노화를 삶의 마지막으로 미루는 삶의 애닮음이나 노화를 막아보려는(anti aging) 삶의 전쟁이 과연 어디에서 차이가 생기는 것인지 질문드린다.
 
둘째, 생명의 물리적 제한과 연관한 질문이다. 생명의 물리적 제한은 철학적으로 존재의 결정론적 운명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필자가 말했듯이 염색체 양단에 위치한 텔로미어telomere는 세포분열의 횟수에 비례하여 점점 짧아진다. 텔로미어 존재는 2009년도 노벨의학상을 받게 된 주제였고 관련 연구성과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telo’는 아리스토텔레스 목적원인 개념에서 나왔다. 세포 내 효소인 텔로미어는 정해진 존재의 목적을 향해 운동하게끔 하는 원인자 집단에 해당한다. 나아가 세포의 생명을 좌우하는 결정론적 생명물질이 존재한다는 메타포를 강하게 심어주었다. 더 나아가 죽음의 프로그램이 세포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목적을 향해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뜻에서 텔로미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텔로미어의 존재와 기능을 강조할 경우, 노화가 내재적 원인에 한정된다는 점만을 부각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내재적 원인의 결정론적 이해를 거부하면서, 노화의 외재적 혹은 환경론적 원인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환경론적 원인 혹은 상관적 원인을 조명하기 위하여, 필자는 뇌신경세포의 시냅스 작용과 면역기능의 의미를 경험적 사례로 들었다. 시냅스 활동이 보여주는 가소성neuroplasticity과 면역의 기능을 세상과 자아의 통로라고 설명하는 필자의 논거가 과연 결정론적 내재원인론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시냅스의 가소성이나 면역의 자-타 간 통로기능도 여전히 상관성의 외적 원인론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논평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셋째, 언제까지 채우고 언제부터 덜어내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고향을 떠나면 낯설고 고향에서는 익숙해진다. 생명의 고향이 원천적으로 있었다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논의가 여기에 이르면 이미 과학적 논변이 아니라 실존적 추론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채우다가 덜어내는 임계점에 대한 물리적 시점을 묻는 논평자의 질문은 이 논문의 맥락에서 동떨어진 것일 수 있다. 논평자의 질문은 그런 물리적 임계 시점을 묻는 것이 아니다. 논평자가 생각하기에 채웠다가 덜어내는 생명의 행로는 순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면서, 삶이 시작하면서 채우는 일과 덜어내는 일은 함께 한다고 여겨진다. 몸의 신진대사 혹은 신경세포의 정착이라는 과학적 사실도 그러하지만 마음의 기억과 재현이라는 실존적 사실도 그러하다. ‘양육과 본성’nurture or nature 논쟁에 참여 중인 양육론자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경험론적 인식론 주창자가 아니라면 오히려 삶이 시작하는 아기 때부터 채워지기는커녕 덜어내는 일이 나도 모르게 내 몸에서 혹은 내 마음에서 작동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할 것 같다.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가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 했을 것이다. 나이듬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나이 들어가면서도 덜어낼 뿐만 아니라 채우기도 한다. 노인의 인지구조에서 암묵지란 과거에 주어진 지식네트워크를 재현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새로운 네트워크를 재구성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이 의미는 가소성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물론 인생의 끝에서 모든 것은 의지와 무관하게 덜어내어진다. 사람들은 갑자기 덜어내어지는 상황에 매우 당황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채우는 연습과 더불어 덜어내는 연습이 훈육되어야 한다. 그러면 늙어서 죽어가는 삶의 행로에 순응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고 본다. 내 질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채우고 덜어내는 행로가 예측가능하다면 혹시 생명체를 고치거나 새것으로 바꾸어 다시 쓸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다. 사랑과 일 그리고 놀이로 이어가는 삶의 내러티브는 당사자에게 물론이거니와 보는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강신익의 글을 읽는 것도 내 공부의 텍스트를 만들어가는 즐거운 내러티브의 콘티 한 조각을 채우는 것 같아서 좋다. <끝>
한국철학회 학술대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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