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계보-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화이트헤드 철학의 존재론적 전환

최종덕 (독립학자, 자연철학; philonatu.com)


1. 존재론적 전환으로서 화이트헤드 철학

화이트헤드(A.N.Whitehead 1861~1947)의 철학적 경향은 보통 3 단계로 나눠진다. 존재의 수학적 근거를 찾기 위해 러셀과 같이 작업하던 초기 수학철학의 시대, 자연 안에 내재된 관계성을 찾으려 했던 중기 자연철학의 시대, 마지막으로 유기체의 사유를 통하여 인식과 존재 그리고 우주를 통합하려는 후기 형이상학의 시대가 그것이다. 초기 수학철학의 시기를 논리주의(logicism)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중기 자연철학 시기를 직관주의 철학의 출발로 표현할 수 있다. 논리주의란 수학적 실재를 전제하고 그런 실재가 표현된 결과가 논리라는 입장이다. 화이트헤드의 직관주의 역시 실재론을 전제하지만 그 실재의조재론은 기존의 실체론적 존재론과는 다른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글에서는 그런 다른 무엇을 알아보려는 데 있다. 1915년 임페리얼 칼리지 이공학부 응용수학교수 취임 이후 자연과학으로 시선을 확장하여 『자연인식의 원리』(1919)과 『자연의 개념』(1920)이라는 대표적인 자연철학 저서를 출간한다. 63세 1924년에 하버드 대학 요청으로 철학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그의 철학은 새로운 전환을 이루는데 그때부터 논리와 사변을 아우르는 유기체의 철학을 정립하게 된다. 이 시기를 <하버드 대학의 형이상학의 시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은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 반성과 우주론적 반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독단론이거나 논리학적 존재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또한분석철학과 논리적 경험주의에 기반한 회의론 철학이라는 20세기 신경향의 철학과 또 다른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전통 형이상학은 세계의 현상으르 운동하게 하는 이면의 법칙을 구하거나, 그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의 시원성을 말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하여 오류와 진리를 구분하는 인식의 체계가 필요했고, 시공간의 그늘에 감추어져 쉽게 드러나지 않는 영원의 존재를 이성의 힘으로 밝히려는 관념적 논리가 필요했었다. 이러한 요청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을 낳게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 뉴턴역학과 같이 역사적 혁명에 해당하는 근대과학의 탄생을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이성의 기능은 추상화의 철학과 과학을 통해 드러났다.

이성을 통하여 철학자들은 감각적 오류와 형이상학적 진리의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험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 그리고 운동의 존재와 불변의 존재를 구획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추상화를 통한 관념만이 지식이 될 수 있었고 흩어진 경험을 하나로 묶어내는 과학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화이트헤드 역시 추상화의 이러한 긍정적 구실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추상화의 기능이 너무 지나쳐서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을 멀게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추상화가 오히려 인식의 독재를 가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감지하였다. 인간의 사변적 진보가 우상화되어 거꾸로 추상성이 구체성으로 둔갑하는 오류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오류의 하나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존재의 일부 측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존재에 대한 추상관념을 존재의 실재성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뉴턴역학의 배후로서 그가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불렀던 실체론적 물질관은 추상화된 물질을 마치 구체적인 양 오류를 범해왔다고 그는 비판한다. 이러한 오류를 화이트헤드는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불렀다. 과학은 가장 구체적인 학문이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데카르트의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지배아래 놓여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은 “객관화의 위기’crisis of objectivity에 놓여져 있다고 한다.(Folse, 37)

구체성과 추상성을 혼동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화이트헤드 철학의 중요한 동기유발이 된다. 우선 그는 사물과 사건의 존재론적 차이, 현실적 계기의 개념, 영원적 대상과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 개념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제시하였다. 런던에 머물던 중기 자연철학 시기 화이트헤드는 뉴턴역학과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난 상대성이론 등의 물리학에 담겨진 추상화의 지식권력을 비판하였고, 이러한 비판 위에서 그의 독특한 후기 존재론이 구성되었다. 그의 존재론의 핵심은 실체의 관념을 관계의 관념으로 대치하는 일이었다. 그의 철학적 존재론이란 대상object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나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그의 독특한 표현대로 대상 사이의 진입방식mode of ingression의 범주로 존재론을 전환시킨 것이다. 이는 주어-술어의 논리와 맞물려 있는 실체-속성의 범주에서 탈피되었음을 뜻한다. 이를 위하여 화이트헤드만의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범주가 필요했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존재의 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생성의 철학으로 전환하는 것과 비슷하다.

화이트헤드는 공간화된 물질 개념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그의 실재론을 전개했다. 객관적 실재라고 했던 자연의 대상들 즉 공간의 점들points of space 과 시간의 순간 instants of time 그리고 물질의 입자들particles of matter에 대한 개념들이 마치 존재의 구체적 실상인양 오해되고 있음을 화이트헤드는 지적했다. 순간과 점으로 구성된 기존의 물질 개념을 잘 설명해주는 러셀의 분석을 보자. (1) 하나의 단순한 질료단위로서 일정 시간에 공간적 위치를 점유하며 동시에 일정 시간동안 존속한다. (2) 어떤 두 개의 질료단위도 같은 시간에 같은 위치를 점유할 수 없다. (3) 일정 시간 폭을 갖는 두 개의 위치는 항상 연속성을 갖는다.(Russell 1903, 468) 결국 공간이 점들의 집합체이며 시간은 순간들의 집합체이며 나아가 물질도 그 자체로 물리적 최소단위들의 집합이라는 생각은 전통적으로 서양 근대과학의 자연관을 지배해 왔다.

근대과학의 정신이란 근원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사실irreducible and stubboren facts에 대한 탐구이며 이는 곧 존재의 보편성을 찾아가는 활동이다.(SM, 16) 화이트헤드는 이런 과학의 존재를 차갑고 건조하며 무색의cold, dry, colorless 본성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의 메타포는 자연 안에 인간과 무관한 <사물의 질서> 특히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이런 사유의 지평선 위에서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근대과학이 성립하였다.(SM, 17) 고전과학이 다루는 고전적 물질의 세계는 추상의 세계이며 이러한 추상의 세계에서 기계론적 해석이 가능하다. 뉴턴은 기계를 작동하는 원리가 바로 신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뉴턴만의 생각이 아니라 근대정신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사유구조이다. 한편 흄은 철저하게 그러한 자연질서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과학이 탐구하는 자연 안에 원인이나 결과가 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일종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흄은 말했다. 인과율을 부정하는 흄은 결국 자연의 보편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흄에게서 추상적 보편이 아니라 관찰된 현상이 중요하다.

근대과학은 20세기 들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시간’, ‘공간‘, ’물질‘, ’에테르‘ 등의 낡은 고전 개념은 지속적으로 수정되었다. 물질의 고전 개념은 고전물리학의 기계론적 자연관의 기초를 이룬다. 기계론적 자연관은 그 자체로서 무감각, 무가치, 무목적성을 표방해 왔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물질관을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과학적 유물론에 기초한 고전적 물질관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한다. 세계의존재를 인지하기 위하여 고전적 물질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과학철학, 새로운 자연철학, 나아가 새로운 형이상학의 축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SM, 37) 우선 과학의 개념은 분석의 관점에서 탈피해야 함을 강조한다. 전통적인 실체론의 관점에서 벗어나 관계와 변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자연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화이트헤드는 강조했다.(PNK, 2) 이런 자연철학의 입장은 후일 유기체 철학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전통적인 물질관은 물질과 공간을 이원화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공간과 물질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연철학의 존재론적 기반이다.(Mays, 38) 이러한 사유는 이미 라이프니츠에게서 찾아질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게 공간의 점들은 그 점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과 동시 존재의 질서order of co-existing로 나타난다. 공간이 존재하고 그 안에 물질이 안착되는 물질의 존재론은 전형적인 뉴턴의 물질관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볼 때 공간 위에 물질이 담겨진다는 생각이다. 거꾸로 말해서 공간과 물질은 이원적이다. 고전과학의 물질관은 플라톤의 실체론적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화이트헤드는 지적했다. 물질이 안착된 그런 공간을 추상화하여, 그런 추상화된 공간을 전제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화이트헤드는 강조했다.

플라톤-뉴턴으로 이어지는 추상화된 실체개념의 전통을 거부하는 반기는 니체로부터 촉발되었으며 베르그손에게서 정립되었다.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손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PR-k, 머리말)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이 바로 기존 시공간의 실체 개념에 대한 대안이었다. 실체개념에 가려졌던 시간의 체험적 특성을 베르그송은 그의 고유한 지속 개념을 통하여 보여주었다는 점을 화이트헤드는 긍정적으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손의 시간 개념은 자연의 대상존재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베르그손은 과학적 시간과 체험적 시간의 구분을 강조했다. 과학을 위한 기계적 시간이 삶을 위한 나의 체험적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거부했다. 베르그손의 의도는 체험성을 자연적 대상object안으로 유입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지만 반면 과학적 시간의 실체성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화이트헤드는 보았다.(Northrop, 168) 형이상학자들은 물질적 대상을 보편적 실체의 그림자로 본다. 경험론자들은 실체의 실재성을 부정하면서 물질적 대상을 단지 경험지각의 다발로 볼 뿐이다. 니체나 베르그손 같은 반실체론 철학자들은 대상세계와 삶의 세계를 구분함으로써, 삶과 도덕이 물질적 대상 안으로 매몰되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존재의 해방을 토로했다. 반면 화이트헤드는 대상세계와 삶의 세계를 굳이 나눌 필요도 없으며 물리세계와 생명세계를 하나의 우주적 통일체로 녹여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물리적 대상 자체도 관계성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했다.

2. 지속, 대상, 사건

2.1 화이트헤드의 지속 개념

화이트헤드의 자연철학이란 객관화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존재론적 시도였다. 그는 존재론적 시도를 설명하는 기초 개념으로 지속 개념을 베르그손과 또 다르게 표현했다. 기존 뉴턴역학의 절대시간관에 의존한 시간 개념은 모멘트moment로서 시간이며, 과학적 설명을 위한 공간화된 추상적 시간이라고 했다. 이는 시간과 그 시간의 내용이 분리되어 있다. 이런 시간은 앞서 말한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에 해당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자연 가운데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존재체계는 경험세계와 대응되는 바가 아무 것도 없다고 화이트헤드는 그의 책 <자연의 개념>에서 강조한다.(CN, 34) 공간화된 시간은 순간instant of time들의 나열일 뿐이며 논리적으로 구성한 관념이라고 했다.(SMW, 95) 화이트헤드는 이런 관념을 형이상학적 괴물metaphysical monstrosity이라는 말로 표현했을 정도다.(PNK, 8) 그런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의 시간이 아니라 정말 구체적인 시간이 바로 화이트헤드의 지속이다. 지속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CN, 75-77)

1. 경험적이고 구체화된 시간이다.
2. 그 자체로서 자연의 추이 passage of nature를 존속시킨다.
3. 감각의식sense-awareness안에 확보된 직접적 사실이며 그런 사실들이 모여 자연을 이룬다
4. 어느 지속은 지속의 전체를 대응할 수 있으며 현재의 지속은 결과의 지속에 대응될 수 있다.
5. 지속은 항상 시간적 폭temporal thickness을 유지한다.

지속은 “고정된 테두리에 갇혀있지 않고”(PNK, 69), 스스로 개방된 상태를 유지하며 자연과 항상 상호소통을 한다. 지속의 연속적 흐름continuous stream가운데 ‘지각된 것’the perceived과 ‘지각 안 된 것’the unperceived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없다고 한다.(PNK 69) 지각된 것과 지각 안 된 것 사이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도 역시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의 하나다. 지속 안의 상호관계성은 자연의 실제적인 모습이며 자연 안의 존재의 자기동일성이다. 결국 존재 자기동일성은 추상적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적 인식에 궁극적 지속에 의해서만 가능하다.”(PNK, 8)

2.2 대상 개념

시간의 의미를 지속에서 찾을 수 있다면 공간의 의미는 대상 개념에서 찾아진다. 기존의 대상 개념은 과학을 위한 추상적 소산물로서 일종의 단순정위simple location된 존재라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관점이다. 한 물질이 지니고 있는 여러 시공 관계에서 다른 공간의 영역과 다른 시간의 기간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설정된 대상을 단순정위라고 한다.(SMW, 83) 이것이 진정으로 대상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그 대상이 경험으로 인지되고 경험에 유입되어야만 한다.(PNK, 62) 추상적 대상이 과학적 분석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점을 화이트헤드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대상 개념으로는 자연을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대상을 세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다.(CN, 149) (1)감각대상sense object (2)지각대상perceptual object (3)과학적 대상scientific object 이다. 이 세 가지 관점이 합쳐진 것이 바로 자연 안에 놓여진 구체적인 대상이며, 이것이 바로 실재이며, 그의 사건 개념의 기초를 이룬다. 감각대상은 ‘붉음’, ‘달고 씀’ 과 같이 로크가 말한 사물의 제2차 성질과 비슷하다. 그리고 지각대상은 책상이나 돌맹이처럼 직접 지각되는 대상을 말하며 사물에 제1차 성질에 해당한다. 셋째 전자나 핵처럼 물리학의 탐구대상을 과학적 대상이라고 했다. 갈릴레오, 뉴턴이나 로크 같이 고전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색이나 냄새 같은 2차 성질을 크기나 부피 같은 1차 성질에서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자연 대상의 실제 모습을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객관화의 위기라고 불렀다. 화이트헤드는 오히려 그 2차 성질을 구제한다. 그는 기존의 2차 성질의 성격을 새로운 감각대상 성격으로 재정의하였다. 감각대상에 대한 감각의식 자체를 자연이라고 했다. 종래에는 자연을 실체화된 객관적 대상들의 집합으로만 여겼다. 반면 화이트헤드는 감각대상이 사물에 포착되는 과정 자체를 자연이라고 보았다. 곧 “자연에 대한 감각대상의 다항관계polyadic relation에 의해 대상으로부터 자연으로 진입ingression하는 과정이 바로 감각의식이다.”(PNK, 84) 앞서도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이트헤드가 객관적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객관적 대상이 마치 자연의 진정한 대상인 것처럼 서술되는 것이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라고 했다. 물질의 ‘궁극성’ the ultimate은 단순히 형이상학적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PNK, 23) 한편 전자나 핵 혹은 수학적 법칙은 그것이 추상화된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설명을 위하여 필요하다. 러셀은 그러 과학적 대상을 ‘추리된 존재’inferred entities라고 부른 반면 화이트헤드는 ‘요청된 존재’postulated objects라고 했다.(Brown, 37)

2.3 현실태로서 사건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대상은 단순정위된 추상 개념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가능태의 양상으로서, “경험적으로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적 존재이며 사유 절차에 의해 생긴 것이다”.(오영환 1974, 335) 화이트헤드는 가능태의 양상으로서 존재가 아닌 현실적 계기에 드러난 관계 속의 대상을 ‘사건’event이라고 불렀다. 대상이 가능태라면 사건은 현실태이다. 가능태로서 대상에서 모든 현실태로 관계가 맺어질 수 있는 잠재적 다양성의 대상이 있는데, 화이트헤드는 그런 대상을 ‘영원적 대상’eternal object라고 불렀다. 여기서 다양성이라고 말하는 뜻은 영원적 대상이 경험적 현실 사건actual occurance으로 관계하는 방식 혹은 진입하는 방식이 일의적이 아니라 다의적임을 말한다. 그러나 영원적 대상일지라도 그것이 구체적 사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추상적 존재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가능태는 현실태로 진입되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SMW, 252-254) 화이트헤드는 현실태의 사건만이 우리에게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인식영역이라고 했다. 결국 관계화된 대상이 곧 사건이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자연 인식의 원리에 관한 연구>(An E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 1919)에서 사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건은 항상 연장 속에서 드러나며 다른 사건과 외적 관계성을 지니며 스스로는 내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건은 다른 사건을 연장extend하며 또 연장되고extended 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의 부분도 그 자체로서 사건이 된다”(PNK, 61) 사건은 구체적 사태에서만 의미가 부여된다. 거꾸로 말하면 자연의 구체적 사태는 사건 개념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은 현실태의 담지자이며 또한 생성becomingness의 주체이다.(PNK, 61)

직접사태와 추상관념을 연결하려는 것이 화이트헤드 유기체 철학의 방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양자론 등장 이후 고전물리학의 기초가 많이 흔들렸다. 고전 물리학에서 보는 에너지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었다. 그러나 양자론의 입장에서 에너지는 하나의 유기체적인 사건의 양태이다.(SM, 71) 고전물리학에서 사실fact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stubborn 불변의 존재였지만 화이트헤드에게서 사실이란 운동 중에 있는 과정의 존재becomingness이다. 이를 그는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개념은 후일 현실적 존재의 기초가 된다.

존재의 연속성은 항상 붕괴될 수 없는 존재의 지속이다. 존재의 연속성은 겉으로 보기에 존재의 통일성처럼 보일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존재의 연쇄는 헤겔과 같은 일원론적 세계관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적 사태와 객관적 사태가 경험적 맥락에서만 맺어지는 상호연결성interconnection일 뿐이다.(Oliver, 69) 한 사건은 다른 사건과 독립적일 수 없으며 홀로 고유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은 대상 개념에 의한 단순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다양화된 관계이다. 그것도 추상적 관계가 아니라 사건 개념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연관된 사태”이다.(PNK, 13)

사건은 그 지각되는 방식에서부터 대상과 다르다. 화이트헤드 고유의 표현에 의하면 대상을 지각하는 것을 ‘인지’recognize라고 한다면, 사건을 지각하는 방식은 ‘파악’apprehend된다고 말한다.(Palter, 24) 대상은 시공을 초월해서도 인식이 가능하다고 해서 인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사건은 감각-지각에 의한 구체적 상황에서 인식이 가능하다고 해서 화이트헤드의 특유한 용법인 파악의 인식을 사용했다. 파악은 경험지각이지만 지각활동의 양태를 결합하는 힘이기도 하다. 경험지각이란 세 가지 양태의 지각활동으로 드러난다. 지각내용perceptual content과 개념분석conceptual analysis이며, 지각내용은 현시적 직각성presentational immadiacy과 인과적 유효성causal efficacy으로 된다. 지각내용과 개념적 분석은 항상 밀접하게 교호작용을 한다. 인지는 지각내용과 개념을 구분하여 지각하지만, 파악은 그 내용과 개념을 동시에 받아들이다.

사건이 과학적 대상으로 전환되는 경우, 영원적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사건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의 기초가 된다. 현실적 존재는 구체적인 하나의 계기이다. 이것이 과학의 법칙으로 승화하기 위하여 현실적 존재는 영원적 대상eternal object과 만나야 한다. 현실적 존재는 사건의 현실태이며 영원적 대상은 가능태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현실태와 가능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차용한 것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다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주체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능태와 현실태의 주체는 곧 유기체적이며 과정적이다. 이 점이 바로 화이트헤드 후기 형이상학의 기본 토대이다.

2.4 화이트헤드의 자연 개념

화이트헤드에게서 자연은 감각-지각sense-perception에서 드러난 관계이며, 그러한 관계들의 복합체complex of entities이다.(Palter, 1) 자연은 감각의식으로 현시된 전체적 지속이다. 지속은 서로 연장되며 연장한다고 앞서 말했다. 그 의미는 지속의 원자적 단위로서 지시물reference이 없다는 것이다.(CN, 77) 즉 자연은 원자적 단위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관계적 생성 그 자체이다.(PRel, 310)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인과율적 자연causal nature과 현상적 자연apparent nature으로 구분하는 기존 방식을 넘어서 있다. 이러한 구분은 형이상학이 과학철학에 불법적으로 도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CN, 39) 그러한 자연의 이분법bifurcation of nature은 주체를 고려하지 않은 자연관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했다. 자연의 이분법 사유구조에 따르면 인과적 자연만이 자연의 실체이며 기반이다. 현상적 자연은 기반으로 깔린 인과적 자연 표피에 드러난 심리적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런 생각에 반대했다. 오히려 인과적 자연은 형이상학이 낳은 추상적 존재라고 했다.(CN, 42)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구체적 자연은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직접 나타나며 감각적으로 의식되는 전체적 지속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성, 구체성, 연속성, 개체성이라는 성질을 구비한 사건event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지속 또는 사건의 복합체는 우리의 감각적 의식에 대하여 혹은 사유에 대하여 똑같이 자기충족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런 복합체의 특성이 과학의 출발기점이 된다.

3. 초월체와 합생 그리고 합목적성

수학적 존재론이 곧 물리과학에 적용되는 것을 화이트헤드는 크게 경계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를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라고 표현했다. 보편자는 수학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자연 전체를 이해하기 위하여 보편자의 존재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존재를 보편자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통일적 존재론이 가능하다는 것이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중심이다. 예를 들어 직접사태immediate occurrence란 자연을 마주한 개인의 판단작용을 기반으로 한 사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태를 나중에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직접사태는 개인의 한 지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조우하는 인식의 연결망과 비슷하다. 화이트헤드에게서 독특한 점은 개인의 직접사태의 시스템과 수학적 일반화의 지식 시스템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다른 포스트모더니스트와 다르다. 또한 이 점에서 베르그손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화이트헤드 자연철학 시기의 사건 개념이나 지속 개념은 후기 형이상학적 색채를 통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20세기 철학의 문을 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주체와 대상이 만나고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을 자연철학 시기에 마련했다면 후기 형이상학의 시기에서는 언어로 원래 규정할 수 없었던 운동성의 개념들을 그만의 독특한 언어구조 안으로 포섭하는 철학적 사유를 제시했다. 우리는 그러한 철학을 유기체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3.1 자기초월체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가 상호 진입되고 대상과 대상 사이에서 상호 진입이 이루어진다. 상호진입을 통하여 존재는 생명성을 보전하게 된다. 소위 유기체 개념은 여기서 나온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유기체적 상관성은 다음과 같다.
① 부분-부분은 모두 내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② 부분-부분은 전체와 통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세포 하나하나는 별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내적으로 상관된다. 상관성의 핵심은 자기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고 부속인 존재가 또 새로운 것을 낳을 수 있다.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 사이의 통신은 존재들 사이의 함께하는togetherness 내재적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통신의 작용을 화이트헤드는 ‘합생’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했다. 합생은 유기체의 창조성을 낳는 둥지이며 존재 간 합목적성을 배태한 중요 개념이다.

부분들은 각기 창조적 존재로서 스스로 존재의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개별 존재의 자유는 우주의 합목적성에 조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자기목적성을 갖지만 그 목적성은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외재적 힘이 아니다. 여기서 자기 목적성은 칸트의 합목적성과 다르다. 목적은 '내재적 목적성'과 '외재적 목적성'이 있는데, 화이트헤드 관점에서 보자면 칸트의 합목적성은 외재적 목적성에 가깝다. 화이트헤드의 내재적 목적은 '자기 합목적성(self-organization)'이며 유기체 활동성의 근원이다. 생명이 기계와 다른 중요한 점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조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조직성은 생명의 자기 합목적적 구현에 해당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파악'prehension'하는 '주체subject'가 있는데 그것을 자신만의 용어로 'superject(초월체 혹은 자기 초월체)'라고 표현한다. 초월체가 파악'prehension'하는 사태는 어떤 사건에 있어서 주체와 행위가 항상 같이 있음을 의미한다. 언어의 영역에서 볼 때 주어와 동사가 함께 있어야 성립되는 것과 같아서 주어(주체)만 따로 존재하는 방식은 성립 불가능한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나는 빗속을 걷는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비오는 날 빗속을 걸어가는 것은 나는 걸어가는 동사와 비가 오는 상황에서 분리하여 나를 생각할 수 없다. 나를 의미하는 주어 하나만 가지고 문장이 성립할 수 없듯이 사건이 성립할 수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어(주체)와 관련한 동사 행위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 화이트헤드의 주체 개념은 이미 상황적 환경을 포섭한 주체이다. 그런 주체를 초월체라고 한다. 이런 주체는 세계의 모든 주체와 연결된다. 연결되지만 구속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상호연결 개념은 기존의 전통철학에서도 있었다. 전통철학에서 존재 간 연결은 반드시 존재의 구속을 함의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주체는 상호연결되어 있지만 각자는 자유롭고 새로운 모습novelty을 지닌다. 그러한 주체를 자기초월적 주체superject-subject라고 했다.

초월체는 자기 내부에 갇혀있지 않다. 그래서 몇몇 화이트헤드 주석가들이 우려한 것과 다르게, 주체는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초월체는 유아론에 빠지지 않는다. 분명히 화이트헤드에서 외재적 목적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이 작동되는 방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외재적 목적은 없지만 내재적 목적은 'superject'의 자기 합목적성 안에 간직된다. 초월체에 의해 자기합목적서이 구현된 체계를 화이트헤드 자연철학 시기의 표현에 의하면 제일성'uniformity'이라고 한다. 혹은 일자'oneness'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제일성이라는 말은 자연의 '제어성'을 함축하고 일자'oneness'란 말은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세계의 통일성을 말한다. 어쨌든 주어진 목적성은 아니지만 자기 제어가 되는 통일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이 목적성에 자기 갈 길을 가지만 조화 안에서 존재의 운동이 이루어진다. 이를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실재라고 했다.

3.2 합생

초월체는 주체의 포괄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주체의 포괄성이란 한 주체가 달성되면 또 다른 주체가 형성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는 주체의 자생성이다. 자생성은 유기체의 특징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의 자기조직적 맥락이다. 그 자기조직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화이트헤드는 기존의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세계관과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 기존의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기존의 히브리즘 신학자들은 신이나 절대자 혹은 이데아를 그 힘의 원천으로 말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존재들의 합생concrescence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잉태한다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는 순환하는 존재이다. 다른 말로 해서 나라는 존재와 세상을 파악하는 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 주체'subject'는 서로 수평적이다. 이분법적 존재론에서는 현상은 ‘존재’의 그림자이며, '존재'가 현상계의 대상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현실적 존재'와 '영원적 대상'을 연속성의 상관관계로 보는 자연철학의 사유구조와 후기 유기체 철학의 사유구조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난다.

앞서 말했듯이 인식의 단위는 전통적 의미의 실체나 고립적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 존재"라고 하는 화이트헤드 고유의 "과정적 원리"에서 탄생되는 생성의 존재이다. 바로 이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이다. 현실적 존재는 세계의 기본 실재이다. 현실적 존재는 서로에게 이입되며 새로움을 창출한다. 현실적 존재는 서로에게 호응하며 서로에게 만족한다. 그렇게 만족의 상태로 가면서 현실적 존재는 합생한다.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주체적 경험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기 창조적 존재이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창조성의 문제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창조는 외부의 에너지가 필요 없는 내적인 자기 창출과정이며, 이는 합생concrescence을 통하여 실현된다.

합생은 현실적 존재가 성장하는 과정이며 그 자체로 현실적 존재이다. 합생의 위상은 편의상 네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호응적 위상', '개념적 위상', '비교적 위상', 그리고 '만족'이다. 이 위상의 구분은 일차적인 감각자료에서부터 만나고 느끼며 반복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며 다시 통합하며 자기완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합생은 물리적 조건에서 출발한다. 합생은 물리적 파악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만족에 이르면서 합생은 새로운 합생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합생의 과정 자체가 바로 합생이다. 실체론의 전통철학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존재방식이었다. 이를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원리’라고 했다.(PR-k, 500)

합생의 이러한 측면은 관계적 본질의 핵심이다. 관계적 본질이 가능하려면 영원적 객체의 동시성이 실현될 수 있는 우주의 존재방식을 수용해야 한다. 합생을 통해서 잉여의 새로움이 발생한다. 그 새로움은 어떤 새로움과도 동일하지 않다. 합생조차도 화이트헤드 의미의 관계이다. 철수와 영희의 관계는 사랑하는 관계라고 말할 때 철수가 영희를 만날 때마다 같은 관계가 아닌 것처럼 관계는 상황의존적이다. 상황과 무관하게 관계를 설정한다면 그런 관계는 관계성이기는 하지만 추상적 관계성이다. 관계는 상황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창조성이 잉태된다. 관계를 이해하려면 관계가 놓여진 주체의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인식을 앞서도 말했듯이 화이트헤드는 파악이라고 했다. 파악에 의하면 철수가 영희를 사랑하는 사건과 영희가 철수를 사랑하는 사건은 다르다. 다른 창조성을 낳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합생은 주체의 파악이 중요하다. 그리고 동일한 주체라 할지라도 다른 계기에서는 다른 관계가 합생된다. 그러한 주체는 현실적 존재이다. 현실적 존재는 일차적으로 경험으로부터 창발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 계기와 큰 차이가 없다. 현실적 존재는 대상화된 존재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하는 존재의 과정이 포함되어 동사를 머금고 있는 명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실적 존재 그 자체가 주체적 지향subjective aim의 결과라고 보는 의미론적 해석이 중요하다.

4. 화이트헤드 철학의 사상사적 의미

4.1 실체에 대한 부정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기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를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이다. 그래서 그의 존재론은 난해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표현했던 언어 전체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기존 과학이나 형이상학에서 다루던 실체는 이성이 조작한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의 실상을 밝히려는 노력이 바로 화이트헤드 철학의 핵심이다. 존재의 실상은 존재 자체가 주체와 독립될 수 없으며 항상 주체와 교통하고 있음을 파악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존재는 항상 환경적 요인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1)주체와의 관계 (2)환경과의 연결 (3)이성언어의 한계를 인식한 20세기 화이트헤드의 사유구조는 이미 니체와 베르그손, 구성주의와 역사주의 나아가 탈근대와 해체론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이들 구성주의적 특성이 철학적 사유는 (1) 기존의 고립적 실체론 철학에 저항하며 (2) 근대과학혁명의 기저인 기계론적 물질관에 대한 반혁명 (3) 절대적 진리관 혹은 진리 대응 언어관에 대한 전적인 부정 (4) 이성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5) 획일적인 전체성을 거부하고 개체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사유의 형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 사유의 흔적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는 니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니체(Nietzsche, 1844~1900), 마르크스(Marx, 1818~1883), 프로이트(Freud, 1856~1939) 세 사람으로부터 실체론의 허구를 밝히려는 철학적 사유가 비롯되었다. 그중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의 계통수의 원형은 니체에 가깝다. 니체에서 베르그손을 거쳐 화이트헤드에 이르는 철학의 통로는 생성 존재론의 강물이 흐른다.

4.2 생성철학의 원형으로서 니체 철학

니체 철학은 기존 존재 동일성을 강하게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플라톤 철학의 전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이데아라는 실체적 존재를 최고점에 둔다는 데 있다. 플라톤의 존재는 정지성, 불변성, 독립성, 완전성, 무모순성, 유일성, 영원성을 지닌다. 우리가 경험하ᅟᅳᆫ 이 세계는 그런 존재의 저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 현상계는 운동하고 변화하며 의존적이며, 불완저하며, 다수적이고 시간의존적이다. 현상계는 독단의 원천인 반면, 존재계는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 철학은 진리를 구하는 학문이므로 현상계 이면에 숨겨진 존재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이데아의 철학이 2,500년 이성의 시간을 지배했었다. 니체는 이런 2,500년 플라톤 존재의 형이상학을 붕괴시키고자 했다. 오히려 그의 존재는 변화하고 상호적이며 다수적이고 운동성을 지닌 특성을 갖는다. 소위 생성의 존재이다. 생성존재는 영원한 자기동일성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있다. 존재는 영원회귀하는데 회귀하는 그 순간순간 어느 하나도 동일한 모습은 없다. 회귀하지만 회귀하는 모든 것은 같은 것이 없다. 그런 존재를 생성의 존재라고 하며, 존재의 다수성과 창조를 구현하는 원천이다.

생성의 철학에서는 대상화된 존재보다 주체성을 중시한다. 주체의 활동이며 운동이 바로 존재의 원형이다. 플라톤 철학으로 비춰본다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억측이 된다. 그러나 니체는 주체를 강조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홉스의 자연관이 설정되어 있으며 인간의 자기보전 권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창조적 존재 형질이 생성된다.

플라톤 고전 형이상학은 진리가 담겨진 존재의 불변성에서 출발하며 그런 존재는 모든 현상계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절대성을 갖는다. 이런 존재론은 많은 경우 전체론적 사유구조를 낳는다. 그런 절대 존재 앞에서 개체 인간은 중요하지 않으며 같은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다. 절대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은 동일해져야 한다. 이로부터 만들어진 인간의 도덕은 다른 사람과 동일해지도록 만드는 행동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웃사람과 똑같은 인식과 행동만이 기존 도덕의 규범이 된다. 이런 동일성의 범주에서는 타인과 동일하게 행동하라는 규범만이 허용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주체성이 있을 수 없다. 균질화된 인간만이 삶을 허락받는다. 이런 인간을 니체는 노예라고 불렀다. 노예란 전체 속에서 자아 개체의 특성을 상실하고 전체에 휩쓸려 균질화된 인간을 의미한다. 이런 노예의 도덕은 짐승과 같은 도착적 도덕이라고 니체는 비판했다.

이렇게 균질화된 현실은 플라톤 철학의 실체론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니체 철학의 본 모습이다. 여기서는 창조성도 없고 생동성도 없다, 생명도 없으며 나아가 진정한 인간도 없다. 그래서 니체는 노예에 대비되는 주체적 존재를 찾고 있다. 자기 내부에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주체에의 충동을 존재의 지위에 올려놓은 전환을 마련했다. 이런 전환은 니체 외에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철학적 혁명이었다. 이런 혁명을 계승한 철학자는 베르그손이었다. 베르그손의 지속은 기존의 실체론적 특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운동생성의 주체이다. 나아가 화이트헤드는 생성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19세기를 중심으로 니체와 베르그손 그리고 화이트헤드에 이르는 100년간은 2,500년 플라톤 철학전통을 뒤집으려는 고통의 역사였다.

니체, 베르그손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생성의 철학은 결국 실체론 부정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존재의 모습이 불변의 실체 특성이 아니라 운동의 생성 특성이라는 점이다. 생성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는 그들 세 사람에게서 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외재적 실체론이라면 그 운동의 원천을 신이나 절대자 혹은 이데아에 돌림으로써 문제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생성의 철학에서는 운동의 원천은 자기조직성에 있다. 이 점에서 니체는 베르그손과 화이트헤드와 다르다. 베르그손과 화이트헤드에게서 이 세계는 목적성을 갖는다. 물론 플라톤 철학이나 기독교철학에서 목적의 지향점이 외재적 절대자에 둔 반면 베르그손과 화이트헤드에게서 목적의 지향점은 내재적이다. 내재적 목적성으로 인해 베르그손과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질서적이며 통일성을 갖는다. 물론 니체에서 세계는 우연에 의한 발전운동뿐이지만 말이다.

니체와 베르그손 그리고 화이트헤드를 관통하는 생성 철학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1)주체성은 대상 ‘존재’ 에있지 않으며 오직 주체의 활동 혹은 운동에 있다. (2)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3)그리고 존재의 운동을 통해 존재의 창조성이 생성된다.

4.3 난해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미래

화이트헤드가 니체의 생성존재론의 흐름에 있지만 니체나 베르그손과 다르게 전통적인 실재론을 구현하려는 데 있다. 니체나 베르그손과 같이 실체를 부정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지만 화이트헤드는 앞선 두 사람이 분명하게 내세우지 않았던 존재론적 실재론을 분명하게 고수했다. 이 점은 오히려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든 계기였다. 실체를 부정하고 생성 혹은 과정의 특성을 그만의 존재론으로 재구성시켰다. 종래의 형이상학은 실체를 기반으로 실재론을 유지했지만 화이트헤드의 생성철학은 실체를 부정하고 다른 존재 특성을 재구성하여 실재론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실재론은 그의 고유한 실재론이 되어버렸다. 또한 그의 고유한 실재론을 표현하기 위하여 화이트헤드는 그만의 고유한 언어와 개념을 사용했다. 기존의 언어적 규정에서 탈피하여 그만의 개념을 규정화했다. 바로 이 때문에 화이트헤드의 개념은 우리들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화이트헤드에서 “언어는 존재를 해명하기에 불충분하며 모호할 뿐이다, 그래서 존재를 확정하여 말할 수 없다”.(PR, 11, 264)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현대철학사에서 크게 각광받지 못하게 된 이유라고 본다. 존재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진정한 실재의 모습을 본 존재론적 혁명가의 외로움이다.

화이트헤드 후기 형이상학은 양면성을 안고 있다. 하나는 개념의 외로운 전사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의 생성철학은 실체론 부정에서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화이트헤드만의 조어법으로 새롭게 탄생한 신 개념을 기독교의 신 개념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또한 화이트헤드가 우려한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에 해당할 수 있다. 그 외 신조어와 수사적 비유로 만든 용어들이 해석되려면 더 많은 외로운 글쓰기가 요청된다. 또 하나의측면은 화이트헤드의 후기 형이상학은 현대 해체론 철학이나 불교철학 혹은 신비주의 철학으로 연관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초기이건 후기이건 관계없이 신비주의 사상이나 이성 해체론적 사유구조와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논리학과 자연학, 과학과 예술, 신학과 불교 등 그 다양한 분야와 창조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큰 사유의 그릇이지만, 신비주의 논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문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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