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협동-행복한 삶을 위한 공부
전자통신연구원 특강자료 2013년5월13일

지식의 협동: 행복한 삶을 위한 공부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

1. 현대 학문의 분화

몇 년전 2009년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이 생긴지 800년이 되는 해였다. 800주년을 맞아 캠브리지 대학 측은 다양한 기념행사를 치루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여러 학문 간의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는 다양한 학술행사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마침 다윈 탄생 200주년 학술 페스티벌이어서 필자는 2009년 7월 캠브리지 행사에 다녀왔다. 다윈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생물학, 화학, 물리학, 역사학, 인류학, 철학, 여성학, 심리학 등의 학자들이 전세계에서 모였다. 다윈 연구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서 캠브리지 대학은 협동성 연구가 기본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을 알게 되었다. 나노 공학을 하든지, 분자생물학을 하든지 혹은 세계 난민 평화운동 분야를 하든지 관계없이 캠브리지의 학문은 이미 학제간 연구를 심도있게 이뤄내고 있었다.

20세기 초 유럽 학문을 풍미하던 실증주의의 분위기는 의학에서 철학에 이르기까지 전 학문에 걸쳐 지배적이었으며, 그 결과 분과학문의 세분화는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분과학문의 세분화가 곧 전문화라는 이미지로 굳히게 된 것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현대적 의미의 원자론atomism이 다시 정립되기 시작할 때였다. 쉽게 말해서 물리적 환원주의가 과학적으로 검증되기 시작한 1930-1940년대 부터였다. 이러한 세분화를 통하여 물리학은 쿼크라는 아원자 시대를 열었고, 생물학은 분자공학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분화하는 속도는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나아감으로써 과학과 사회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는 위협받게 되었다. 이후 과학과 기술을 사회적 시선으로 재조명하는 과학기술사회학STS의 탄생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간 통합이 왜 필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단적인 학문의 현실이다.
2. 개별 과학기술 융합의 필요성

학문간 결합 : 현대사회에서 차지하는 과학기술의 위상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장 큰 지배력을 보여준다. 국제경제는 말 그대로 글로벌화 됨으로써 자본의 집중력이 자본 재생산의 가장 큰 요인으로 떠올랐다. 자본 집중은 거대 산업화의 환상을 주는 소위 원천기술에 대하여 몰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원천기술의 산업화는 특허권 등의 시장 독점권이 유혹을 던져주고 있다. 이에 몇몇 기술 강국들은 원천기술 창출을 목표로 하여 지향적 기술콘텐츠에 초점을 맞추어 주변 관련 기술들을 하나로 수렴토록 하는 접시안테나형 구조를 창출하는 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

한국 역시 최근 들어 융합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로 가는 가시적인 성과를 지향하고 있다. 새로운 휴대전화 모델을 개발하려고 할 경우 통신, 전자, 재료공학, 디자인, 문화콘텐츠학, 인공지능연구, 사회공학, 미디어공학 등등, 연계분야 모두를 합쳐져야만 한다. 이와 유사한 구조의 거대 프로젝트들이 예상 외로 많다. 완성품이 아닌 소재 산업조차도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학문간 융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약개발 하나를 보더라도 기존의 생화학 분야 외에 발생학, 면역학, 뉴로사이언스 등의 연구자 그룹이 공조되어야 한다. 또한 생명공학 연구에서 질량분석기와 같은 측정장비 의존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기계 및 전자 관련 산업분야의 동반 연구는 필수적이다.

이론과 장비의 결합 : 그렇게 유명했던 게놈프로젝트의 사례를 들어 보기로 하자. 10여년에 걸친 게놈 프로젝트는 2001년 초에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람들이 원하던 황금알이 아니었다. 만족할 만한 유전자 연구는 그 서열 확인으로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겨우 깨닫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계기는 중요했다. 분자 차원의 전체 단백질(단백질체)의 공간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유전자 연구의 핵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제로 그러한 연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이론적 성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백질 대량 분리분석장비의 발명에 기인 한 것이었다. 질량분석장비와 그 기법은 과학이론과 방법론 이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타나카Koichi Tanaka 연구원은 거대생체분자를 이온화시키는 방법으로 과거와 다른 질량분석기의 신기원을 마련했다. 그는 이론 학자도 아니고 대학교수도 아닌 단순한 공학기술자였지만 전문연구자의 실험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기술 방법론과 수단을 제시한 셈이다. 이론과 실험의 공조와 협동을 가능하게 한 연구 분위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론과 장비는 본질과 수단이라는 관계를 넘어서 있으며 현대 첨단의 공학연구는 기기와 이론의 일체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첨단기술영역의 경우 측정기기가 연구이론을 선도하는 경우가 점점 더 늘어간다. 이러한 현실은 연구분야간 융합이 절실하다는 것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이다.

3. 학문융합을 위한 조건 : 기초연구의 기반 확대

이렇게 현대 첨단과학기술 분야에서 과학기술 연구성과들 사이의 수렴적 융합의 가능성 여부는 기술응용적 산업화의 폭발적 팽창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곧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구체화하는 열쇠가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오늘날 학문융합의 실질적인 의미는 과학기술의 산업적 적용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데 있다. 이러한 학문융합을 실질적으로 이뤄내기 위하여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융합 이전에 기존 성과가 중요 : 개별 과학 간의 학문 융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먼저 개별과학의 기존성과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개별과학간 융합은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시대가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 형태이기 때문에 융합을 이루는 요소 영역은 원래부터 융합학문을 위해 탄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뜻은 대소형 프로젝트 콘텐츠와 무관하게 융합 이전 기존 개별과학의 연구성과가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과학의 연구 독립성이란 순수연구 혹은 기초 이론연구가 장려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먼저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융합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먼저 융합의 요소가 되는 개별과학의 연구성과가 충분히 전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기초 학문이 수행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철학을 전공한 필자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인공지능센터 HCI 기초이론팀에서 전산, 수학, 심리학, 철학 관련 연구자들이 모이는 공동연구팀에서 학제간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15년 전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협동연구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러나 철학과 같은 분야와 공동연구를 하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행위라는 기관 심사자들의 판단으로 인해 공동연구 프로젝트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현재 개별과학 영역에서 당장의 현안이 되고 있는 거대 과학기술 네트워크에 포섭되지 않는 연구영역이 많다. 이런 연구영역들은 점차 소외되고 있다. 더 쉽게 말해서 융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런 과학기술 영역은 연구비도 사라지고 따라서 석박사 과정생도 줄어들고 결국 후학 연구자 형성이 미비하고 마침내 소외영역의 연구분야는 아예 사라지게 될 판이다. 이론물리 분야에서 지리학 분야 등등, 소외영역은 점점 더 학문의 자리를 차지하게 어렵게 되어간다. 이는 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학문융합의 이면들이다. 학문융합이 성공하려면 개별과학 연구가 사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미래과학기술의 향방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현존하는 융합 프로젝트 영역 안에서의 개별과학에만 집중지원되는 현실 앞에서 궁극적인 융합학문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4. 선택이란 무엇인가

기술 분야 향후의 선택은 거의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집중을 시도하려면 이론과 기초를 포함하여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과학기술 연구영역을 골고루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한국 위정자들의 웃지 못 할 코미디 중의 하나는 노벨상 수상을 목적으로 특정 학문을 지원하고 특정 그룹을 교육해야 한다는 둥의 표현을 너무 쉽게 남발한다는 점이다. 노벨상 수상은 기반연구가 충분히 성숙된 과정에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노벨상을 수상하려는 목적을 갖고 하는 연구는 결단코 없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캠브리지 학문의 경향은 바로 기초연구와 협동연구를 학문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캠브리지 대학은 67차례나 (연구소 및 대학원 포함시킬 경우 82회) 노벨상을 수상한 학문의 대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노벨상이 목표였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기초연구와 협동연구만이 미래의 과학기술을 책임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를 뿐이었고 그 결과가 노벨상 수상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주체적 선택에 앞선 시대적 선택 : 선택이란 선택의 주체가 고정적으로 존재하여 기존의 대상 중에서 선택주체가 임의로 선택한다는 뜻이다. 이런 선택은 주체적 선택의 경우에서 가능하다.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려면 먼저 미래의 현실적 상황에 맞게 시대적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대적 선택은 주체적이 아니라 수동적인 경우가 많다. 과학기술 분야 중에서 오늘의 시대적 선택은 유비쿼터스에 기반한 GNR (Genetics-Nanotech-Robotics) 기술로 최적화되고 있는 것이 추세이다. 추세 정도가 아니라 21세기라는 시대가 선택한 기술혁명에 가깝다. 우리는 21세기에 의해 주어진 시대적 선택을 받아 그 중에서 겨우 몇몇에 대하여 주체적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착각을 하면 안 된다. 현재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호는 단지 시대상황이 낳은 기술 영역 중에서 수동적으로 몇몇을 겨우 고르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선택’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한 선택마저도 불안하다. GNR/U 영역의 향후 변화가 예측 불허여서 당장 10년 후의 선택영역이 어떻게 다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소위 현행 지식권력 집단이 선택하는 융합학문의 영역은 매우 협소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융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소외된 일반 기초 학문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대폭 확대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학문융합을 성공적으로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아주 더 쉽게 표현다면 다음과 정리될 수 있다.

i) 융합요소로 나중에 선택된 개별과학기술 영역들을 기획적으로 보육시키는 일은 진정한 융합을 위해서는 이미 늦다.
ii) 개별 과학기술들이 사전에 기반연구로 잘 되어 있는 상황에서만 비로소 융합이 가능하다.
iii) 집중을 위해서 선택이 전제되고, 선택의 대부분은 주체적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에 따른 최적화 과정일 뿐이다.

5. 협동성 연구는 융합을 위한 기초조건이다.

융합이 이루어지려면 개별 과학기술 영역 간의 방법론이 일치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분자 수준의 유전자 공학과 양자quantum 수준의 물리 박막 공학을 상호 융합하려면 생명과학의 방법론을 물리과학의 환원주의 방법론에 맞추어야만 한다. 이 경우 상호간 조율에 실패하고 충돌되는 경우를 추정할 수 있다. 이론적 방법론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수행을 실질적으로 결실로 맺게 하는 연구방법론은 사이의 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 그룹 및 연구자 간의 상호 소통은 필수적이다.

지금까지 학문영역의 분화는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응용공학 분야에서는 지나칠 정도였다. 예를 들어 토목공학이나 재료공학 분야에서 나와 다른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실험연구는 동일종의 학문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외계영역처럼 느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학문간 융합이나 협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설사 국가 기획 차원에서 공무상으로 학문융합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모여 있을 뿐 실질적인 융합은 될 수 없다. 융합을 이뤄내기 위하여 비슷한 용융점을 가져야 하듯이 방법론 상의 소통이 요구된다. 방법론 상의 소통은 영역간 공통분모를 찾는데서 시작한다.

요소학문 사이의 공통분모 : 융합을 이뤄내기 위하여 융합 요소학문 사이의 공통분모가 전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공통분모 없이 정부주도형 기획 프로젝트 안에 모여진 개별 과학기술 분야는 결국 기름에 물을 섞는 격이 될 것이다. 개별학문간 공통분모란 바로 학문의 협동성을 의미한다. 학문의 협동성은 학제간 연구이거나 복합학이거나 학문융합이건 간에 관계없이 연구자 개인들 사이 혹은 연구자 그룹 사이의 접착제 구실을 한다. 협동성 연구의 실제적 의미는 (1) 상대 혹은 타자 연구를 경청하려는 태도, (2) 그리고 자칫 연구윤리를 붕괴할 수 있는 개인의 독단연구가 아니라 공동연구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말한다. 또한 협동성 연구의 중요한 의미는 (3) 융합을 위해 협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협동을 통해서 융합의 신과제가 창출되어진다는 점이다. 협동연구가 기반되어야만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융합의 주제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휴대전화 시장은 과학기술 융합이 성공적으로 산업화되었던 대표적인 부문이다. 한국 휴대전화 기술의 성공은 유무선 통신, 인터넷, 인공지능이나 LCD산업 혹은 케이블 산업 등 관련 기술개별 분야가 골고루 발전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시장의 안정성이 융합의 폭을 넓혀주고 있었다. 자본은 시장의 선택을 쫒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은 시장의 향방에 민감한 정도를 넘어서서 거의 종속적이다. 돈은 돈 되는 곳으로만 몰린다는 뜻이다. 몇몇 첨단의 과학자나 탁월한 기술력을 소유한 집단이 미래의 과학기술의 방향을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시장이 원하는 기술의 향방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선택은 주체적 선택 이전에 시대적인 비주체적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결국 더욱더 편중된 개별학문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기반 학문에 집중을 배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6. 사람을 위한 지식 협동

과학기술 분야나 인문사회분야 할 것 없이 집중화된 대형프로젝트가 현실화되려면 개별 연구자의 개인연구가 보장되어야 한다. 기초학문에 대한 이해로부터 다양성이 보장되는 지식의 협동성이 가능해진다. 조립된 지식과 협동화된 지식은 다르다. 거대 연구프로젝트 네트워크에 들어오지도 못한 기초학문 영역은 아예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이론물리 없이 국산 인공위성은 없다. 생화학 기초 없이 신약개발은 불가능하다. 지리학 연구 없이 GIS(지리정보시스템) 구축은 없다. 전통 고증연구가 많았어야 문화콘텐츠산업도 크게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 공부가 있어야 학문이 제 갈 길을 간다. 인간을 공부해야 공학기술도 확장된다. 사회를 공부해야 지식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되지 않는다. 기초학문에 대한 지식의 협동은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데서 시작한다.

(인문정책포럼 22호에 실렸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대화

지식의 협동: 행복한 삶을 위한 공부
최종덕 (상지대, 과학철학)
2013년5월13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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