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안의 찰스다윈 |
발표자 : 최종덕 제 목 : <사르트르 안의 찰스 다윈> 일 시 : 2014년 6월 25일(수) 오후 2시 ~ 5시 장 소 :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 주 최 :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참 조 : http://www.hanphil.or.kr/board/board.php?b_id=notice&cmd;=view#=400&PHPSESSID;=b3945fc17f97fd4085020b7addf2baf8 ----------------------------------------------------------- 인간과 지식에 관한 생각 사르트르와 다윈을 통하여 최종덕(한철연) 1. 인간은 인간성을 지닌다. 인간성은 인간의 본질과 다르다. 인간성은 새롭게 창조되며 고정된 본성에 제약되지 않는다. 인간성은 있으나 인간의 본질은 없다는 뜻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고 표현했다. 2. 사르트르에게서 인간성은 실존적 자아이다. 나는 나의 실존을 의식한다. 그러나 실존을 정의할 수 없다. 실존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인간을 빙자한 신앙의 유포와 같다. 나의 실존의 이유는 없으며, 그냥 실존한다.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 근거를 질문할 수 없다. 근거를 질문하는 습관은 우리 스스로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선험주의 인간론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3. 동물원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주면 껍질을 까서 먹는다. 그런 침팬지에게 양파를 주면 스스로 꽤나 영리하다고 자부하면서 양파 껍질도 까서 먹는다. 까니깐 또 껍질이 있다. 그래서 또 깐다. 그러나 또 껍질이 있어서 계속 까니 결국 먹을 것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 인간은 바나나와 달리 양파와 같은 존재이다. 오래 전 현상학은 이를 눈치 챘지만 양파 껍질 그 자체에 너무 많은 형이상학의 조미료를 쳤다. 4. 자유롭고 싶다면 현재를 즐기면 된다. 미래를 꿈꾸는 많은 기획가들에게, 그래도 불안하면 현재와 단절된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맞닿아 있는 미래를 보면 된다. 그런 미래는 겨우 2-3초 후일 뿐이다. 5. 자기는 자신을 의식하는데 여기서 자기는 자아에 대한 지칭이다. 보는 자아와 보여지는 자아가 하나라는 점을 인간은 깨닫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에게서 대자와 즉자를 구분하는 것은 이미 유명하다. 대자적 존재는 간단히 말해서 의식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는 내가 있으며 나를 바라보는 타자도 있다. 나는 타자에 의해 보여 지고 있다. 그렇게 보여지는 눈길이 바로 시선이다. 6. 시선은 힘이다. 타자는 나와 다른 밖의 존재이지만 이 시선에 의해, 시선의 힘에 의해 자유를 상실하고 만다. 거꾸로 나도 타자에 의해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결착을 사르트르는 피를 흘리는 이미지로 설명하는데, 수치심, 부끄러움은 이런 부자유의 증상이다. 7. 결국 나는 타인의 시선에 묶여있다. 나는 나이가 먹다보니 남이 생각하는 나를 만들어서 거기에 나를 꾸역꾸역 맞춰 나간다. 일개미는 일하고 싶지 않은데 인간이 “일” 개미라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그 개미들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행동한다. 일개미는 인간의 시선에 죽어가고 있다. 애완견(반려견 용어 이전)은 인간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에 존재하며 그들은 사랑을 받는다고 인간은 오해하고 있다. 인간 아래 애완견이 아니라, 언어 아래 애완견이라는 타자가 애완견을 사랑하는 자아를 지배하고 있다. 8. 군대있을 때 나는 철학을 공부했다는 죄 때문에 타자의 손금을 봐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며 몽둥이가 나를 봐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손금 읽는 방법을 몰래 공부했다. 그런데 공부가 필요 없다. 왜냐면 적절히 기분 좋게 그들의 타자의식만 맞춰주면 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라는 본질이 나에겐 필요 없었다. 종북자는 남들에 의해 종북으로 불려지는 사람들이다. 가스실에 끌려가는 유대인이란 타인들이 유대인이라고 불려지는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사르트르는 깨달으면서 본질과 존재의 차이를 되새겼다. 9. 많은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시간으로 생각했다. 사르트르는 역사를 인간이 인간을 접촉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모험하는 시간으로 보았다. 인간을 관찰하면서 그 안에 자연을 본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연에의 모험이란 욕구와 생존의 변증법이며, 변이와 적응을 거치는 자연선택의 진화과정이다. 인간은 주변을 통해 만들어가고 만들어진 자아이며 타자이다. 10. 의식의 지향성 : “모든 의식은 그 무엇인가에 관한 의식이다” 11. 주체성과 자유, 무와 무아, 진보와 보수 12. 존재는 필연이 아니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뿐이다. 13. <완전성>을 향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다윈은 처음부터 죽는 날까지 말했다. 개체의 본질은 없다는 자연의 사실만 잘 파악해도 종교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4. 종교의 위선은 그 스스로 위선임을 모른다는 데 있다. 나는 이를 문화적 자기기만이라고 부른다. 위선을 탈피하는 것을 세계와 인간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다윈과 사르트르는 같다. 15. 다윈 진화론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변화”와 반목적성“이다. 변화는 실체론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반목적성은 ”주어진“ 것을 부정하면서 환경에 조응하여 세계를 만들어간다.(세계가 만들어진다) 목적의 설정은 자기기만의 문화적 소산물이다. 16. 자기기만: 실체론 기반 형이상학, 본질론, 절대자 종교 17. 진화는 개체의 적응도에 따른다. 개체의 자유와 같다. 18. 19. 20.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intellectuel organique과 다르다. 유기적 지식인이나 자기가 자신을 창출하는 자생적 지식인이다. 프로레타리아는 자신을 옹호하는 자신의 지식인이 자신의 내부 계급에서 나오고 그런 내부인이 진정한 지식이라고 보았다.(초기) 그러나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21. 거짓된 보편성: 그들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식인은 가자 지식인이다. 사이비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 마치 과학적인 듯 합리적인 듯한 가짜논증을 통해 그들만의 이익논리를 동원한다. 이들은 휴머니즘을 표명하기도 하는데, 브르조아 휴머니즘이 그 가짜 보편성의 하나다. 22. 지식인인 일 (1)조작된 이데올로기 숭배를 파괴해야 한다. (2)지식과 자본을 민중을 위한 보편적 문화로 바꾼다. (3)현실을 냉철히 인식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유기체적 지식을 갖는 전문인이 된다. (4)지식의 보편성과 사유의 자유, 현실세계의 진리를 향하고 인간 미래의 통찰력을 갖는다. (5)노동계급의 역사적 목표를 기억하며, 기억을 실현하는 행동을 실천한다. (6)기성권력을 비판하고 대항하며 그 방향은 항상 대중의 역사적 의식과 맞아야 한다.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학사, 2007, 94-95쪽) 23. 고독은 지식인의 운명이다: (1)지식인은 노동자 편에 서야 하지만 노동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영원히 프티부르주아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프티부르주아입니다. 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내가 노동자, 농민, 계급 편에 섰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프티부르주아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나를 비판하고 진보의 응시를 수용하여 조금씩 프티부르주아의 모순을 거부해갈 수 있습니다.”(앞의 책, 92쪽) (2)노동계급으로부터 의심을 받으며 지배계급으로부터는 배신자로 보인다. 지식인 스스로 계급화 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지식의 보편성과 계급의 특수성 사이에서 이중성을 가지지만, 우왕좌왕 하기를 거부한다. 정치적 나섬과 관망하는 물러섬의 이중성이라는 뜻이다. 24. 이론이란 실천의 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올바른 지식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지식의 고민은 내적 반성을 통해 공허함을 붕괴시킬 수 있다. 이러한 고민은 지식인의 삶의 방식이다. ➪ 반성 지식이 없는 비판을 경계한다. 비판의 설득력은 지식의 객관성(공감성)에 있다. 이런 인식이 곧 철학 공부의 본체이다. ➪ 비판 쉬운 언어로 지식을 공유한다. 지식은 정보가아니라 비판력과 반성력이다. 교실 현장에서, 대중강좌 강의실에서 역사인식의 배포자가 된다. ➪ 교육 |
한철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