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


주제1: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


주제2: 공부에 대하여



토론주제1: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

비어 있는 항아리에 쌀을 부우면 끝내 항아리는 쌀로 꽉 채워진다. 항아리의 상태는 결핍에서 충족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체의 경우는 다르다. 채우면 빠져 나가고 다시 채우면 또 빠진다.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항아리와 달리 항상 결핍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결핍상태가 한때 채워질 수 있지만, 다시 결핍의 불완전한 순환계에 영원히 걸쳐있다. 결핍은 그 자체로 채움의 지향성을 내포한다. 결핍은 완전한 채움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결핍에서 충족으로 가는 지향성은 최종의 종착역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서구 사상사에서 결핍에서 완전한 충족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라인이 바로 플라톤 이래로 서구인이 제작한 ‘형이상학의 책’이다. 그 책 안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기독교의 신의 말씀까지, 아르카디아와 천년왕국에서 유토피아까지, 근대 이후 개정판에는 보편적 과학법칙이나 절대 정신이 써져 있다. 19세기에 개정된 현대판 ‘형이상학의 책’에는 형이상학 같지 않은 형이상학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과학기술과 자본의 권력이 추가되었다. 즉 과학기술에 대한 신념과 자본에 대한 신념이 형이상학적 유토피아의 지위를 대신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 나은 과학기술과 더 많은 자본이 더 풍요로운 미래를 보장한다는 신념이었으며, 이러한 신념의 실현이 곧 진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학기술과 근대 자본이 유토피아를 대신하면서 심대한 역사적 질곡에 빠지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역설적이지만 물질적 진보는 형이상학적 진보의 배경을 두고 있었다.

‘형이상학의 책’을 조금만이라도 들춰보면 결핍에서 충족으로 가는 길이 거의 앞으로만 뻗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백 리를 간 사람과 천 리를 간 사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충족함의 종착역에 누가 더 많이 다다랐는지 쉽게 판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누구든지 종착역에는 원천적으로 결코 도달 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종착역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종착역으로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종착지의 절대 존재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한다면 충족함의 목적점 자체도 처음부터 없었음을 뜻한다.

그런 형이상학의 절대적 지위를 처음으로 위협한 도전이 같은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하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 <종의 기원>이 말하는 진화론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모든 종은 동일한 선조를 갖는다는 사실과 (2)종은 절대자에 의해 불변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변화의 흐름은 일정하게 주어진 목적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과학적 사실은 원천적으로 기존 ‘형이상학의 책’에 조금도 실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자연의 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변화의 책’ 이었다.

그러나 ‘변화의 책’을 여전히 형이상학의 책읽기로 읽는 사람이 많았다. <종의 기원>에서 말하는 진화론을 약육강식 논리로 포장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이다. 소위 스펜서의 색안경으로만 진화론을 읽는 계층들을 말한다. 그런 읽기 방식은 이름만 변화일 뿐 실제로는 옷을 갈아입은 전통 형이상학의 재현이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읽기 방식 안으로 진화론을 가두어 놓으려는 제국주의적 수순이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진보를 믿는 근대 유럽인의 신념체계는 밖으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승화시켰지만 안으로는 빈부격차나 환경파괴 등의 인간소외를 야기했다.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변혁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과학기술과 자본의 진보가 아닌 현실사회의 진보가 실질적인 진보라고 확신했다. 사회적 진보는 곧 정신의 역사가 오늘에 재현되는 삶의 현장으로 투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적 진보를 해명하는 정신의 역사는 ‘변화의 책’에 실리게 되었다. 진화론이 제시한 생명의 역사와 함께 말이다. 과학과 사회의 서로 다른 스펙트럼이 묘하게도 ‘변화의 책’으로 같이 묶이게 되면서 진보와 진화가 만나는 통로가 열렸다. 사회변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가 ‘형이상학의 책’에서 탈피하여 변화의 진보론을 축조하게 되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맑스는 “다윈의 책은 매우 중요하며, 나에게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라고 썼다. 우리는 ‘변화의 책’, 진화론의 장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경쟁논리가 아닌 사회평등주의자들의 진보논리를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런 진보 개념을 나는 <진화론적 진보>라고 말한다. 진화론적 진보는 (1)종착역 즉 목적의 설정을 부정한다. (2)권력의 도구로 전락된 목적지향적 이데아를 거부하는데서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은 시작한다. (3)인간의 욕망이 무한 보충될 것이라는 환상, 자본의 무한증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기초한 진보가 아니라, 결핍을 그 자체를 인정하는 진보를 뜻한다. (4)진화론적 진보의 철학적 성격은 결핍은 부족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5)오히려 결핍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것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진보의 중심이다. 너무 당연한 말만 했지만 이것이 진화론적 진보를 담고 있는 ‘변화의 책’의 서문이었다.

그리고 <생물철학> 전반에 흐르는 기조이다. 변화의 기조를 면역학과 발생계이론, 그리고 신경과학의 가소성과 후성유전학에서 흩어볼 수 있다.


토론주제2: 공부에 대하여

1. 지식과 삶의 상보성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우리들의 공부는 다양한 통로로 실현된다. 책읽고 책쓰기도 한다. 강의듣거나 강의하고 세미나에 참석하여 토론하고 발표하기도 한다. 논문쓰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런 행위는 주로 지식행위에 속한다. 삶을 꾸려가는 삶의 행위도 공부에 속한다. 삶의 행위에는 크게 2가지가 보인다. 하나는 먹고사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 내부의 가족관계의 문제이다. 부업으로 학원을 하거나 작은 사업을 꾸려가는 경우를 보더라도 상당한 공부의 노력이 있어야 잘 된다. 또한 집안 관리를 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공부 중의 하나다. 내 주변에서 가정문제 때문에 지식공부를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우리 사회는 아직 가부장적 성격이 많이 잔존하여 여성지식인이나 남성지식인이나 이와 관련한 어려움이 많다. 혹은 아이를 키우는 것도 상당한 수준의 공부를 필요로 한다. 먹고사는 문제와 가족관계 문제는 상당히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리면서 가족관계 문제의 많은 것이 자동적으로 풀렸던 나의 경험이 큰 증거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리면 지식공부도 많이 할 수 있다는 점은 더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리면 지식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지식공부의 손을 놔버리는 경우가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통해 논문쓰기 공부가 공부의 모든 것이었다는 전형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공부는 다층적으로 해야 한다. 삶에 대한 공부와 지식에 대한 공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공부, 이 공부를 함께 꾸려야만 우리들의 노후가 좀더 안정적으로 될 수 있다. 30-40대 공부하는 이는 노후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쁠 것이다. 그러나 50대 이상의 공부하는 이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말하는 노후란 공부를 하는 지식공동체를 오래 유지하자는 그런 의미에서 사용했다.

2. 공부가 왜 필요한가: 글쓰기와 강의하기

2.1 남의 지식과 남의 삶을 배려하는 공부

오래전 마누라는 돈벌러나가고 내가 살림하면서 조카와 같이 살던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데 양파가 필요했다. 석관동 옛날 동네였는데 구멍가게들이 꽤나 있었다. 5살 먹은 조카아이더러 바로 옆집 가게 가서 양파 하나 사오라고 돈을 줘 보냈다. 5분 후에 왔다. 양파 대신 양파깡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나에게 양파깡을 주면서 잘 나눠먹자고 그러더라. 아이는 그 아이 바로 그 수준에서 아이가 이해한 그대로 심부름을 한 것이다. 조카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자기 생각한 것만 믿는 경향이 강하다. 공부는 자기 생각만 아니고 다른 사람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알려줘야 한다.

2.2 현실에 눈감지 않는 구체적인 공부
또 다른 조카는 초등학교 이학년이 되었어도 셈을 잘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정상인데 학교에서는 공부 못한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내가 셈을 가르쳐 보았다. 얘는 구체적인 사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200+300에 대한 셈을 하지 못했던 그 아이에게 내 주머니에 있는 100원짜리 동전 2개를 주고 다른 동전 3개를 더 준다면 모두 얼마냐고 물으니 총알같이 500원이라고 답했다. 200+300이라는 질문 대신에 200원과 300원을 합하면 얼마냐고 묻는 질문이 필요하다.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개체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전체의 보편성을 찾아가는 공부이다. 여기서 특수성은 구체적이고 보편성은 추상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추상화하는 능력은 아마도 인류가 획득한 최대의 수혜이며 업보일 것이다. 그런 공부를 혼자만 하면 아무 쓸모없는 것이 또한 철학의 운명이다. 그래서 철학을 좀 하는 이는 철학 공부를 남들과 공유해야만 그때 비로소 철학함이 수행된다. 의학은 물론이거니와 철학과 역사는 돌돌 말려진 그런 추상성을 다시 풀어서 구체적인 개체에 맞추어 투사할 때 가능해진다.

고대희랍 의학사이건 조선중기 의료사이건, 동양이나 서양과 무관하게, 현대나 고전이나 관계없이 특수에서 보편을 들이쉬는 공부에서 다시 보편에서 특수를 내쉬는 공부로 이어가야 한다. 전공과 무관하게 실천적 보편, 구체적 추상을 실현하려는 몸부림 그 자체가 공부의 몸체이다.

2.3 공감하는 공부
고무지우개로 장난감 조각을 만들기 시작한 철수도 나름대로 남모르는 절실함이 있었다. 철수의 절실함은 철수의 물질-심리적 상황이 (어느 어느 상황) 언더under에 스탠드stand되어 있는가를 공감해야만 비로소 철수의 공부아닌 공부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철수의 절실함은 우선 피동적인 상황에서 유래한다. 영어 선생이 이유없이 (선생님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욕적 발언을 하거나 수학선생님이 이상하게 강압적이라든가 하는 사소한 이유로 보이는 상황들이 철수에게는 거부감의 전환을 만든다. 선생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철학개론 서두에 theoria테오리아 어원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다. 멀리서 보는 행위이다. 멀리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보다는 나 자신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을 설명하는 공부법의 수식어가 바로 테오리아이다. 요즘 말로해서 객관적이 되려면 내가 대상에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과 주관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어터(극장)의 어원과 같다. 극장 무대는 관객석과 분리되어 있다. 극장에서는 무대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에 관객이 흥분하여 관객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일체 금지한다. 테오리아의 공부법은 지나온 이천년 인류의 지식체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근대과학의 탄생은 바로 테오리아 공부법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극장 이야기 나온 김에 마당놀이를 꺼내 비교해보자. 민중들이 놀던 시장판의 놀이판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다. 우리네 놀이인 마당극이 그 대표적인 무경계의 놀이판이다. 테오리아의 극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이를 공감의 놀이라고 표현한다. 테오리아의 극장에서는 배우로부터 관찰적 감동을 받을 수 있지만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섭동적 감동이 결핍되어 있다. 관찰적 감동은 지식을 더해줄 수 있지만 삶의 실천을 변화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감동으로 과학이 잉태했다. 그래서 그런 감동도 중요하다. 과학이 중요하듯이 철학이 중요하다는 뜻을 뭇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과학에서 테오리아가 중요하듯이 철학에서는 앰퍼시empathy와 심퍼티sympathy가 중요하다.테오리아와 공감성이 어느 것이 더 좋으냐는 그런 원색적인 질문은 그만하자. 그 대신에 사라져가는 공감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에 대한 질문과 반성을 하면 좋다.

역사에서 실증주의 방법론이나 비교법, 철학공부법 중에서 현상학이나 양명학 혹은 실존철학이나 탈근대적 스터디플랜들은 비교적 공감성이 엄밀한 과학적 글쓰기 위에 얹혀져야만 한다. 과학적 엄밀성 없는 공감성은 주술과 미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실천하는 공부: 규범적 실천과 공감적 실천

실천공부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규범적 실천공부법이다. 삶의 양식, 행동유형, 사회체계 나아가 역사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체계 혹은 이데올로기를 학습하는 것을 실천적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런 규범적 실천이 아니라 공감적 실천, 즉 둘째 실천공부법이다. 지시형 가르침(기존 관행적 교육)은 공부를 재생할 수 없다. 그 대신 거울형 가르침이 공부를 재생산한다. 거울형 가르침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너 내 말 안들려!, 밤나 또 그 짓이야!, 옆집 순엉이 공부하는거 반만이라도 쫒아가봐라” 아내에게 자식에게 함부로 대하고 지맘대로 대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부하라, 말잘들어라’ 백날 훈계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쯤이야 다 알 것이다. 아버지의 행동이 바뀌지 않고 아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쁜 남자들이 하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인이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만 들면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가 동원된다고 해도 끝내는 오히려 독자들과 멀어진다. 아버지 어머니의 구실을 학습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모방하는 것이지 부모의 훈계와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지식인은 그 스스로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줌으로써 타인이 지식과 삶을 배우게 된다. 공부의 재생산은 나의 지식이 아니라 나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실천철학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실천철학은 금지의 윤리학에서 탈피한다. 그 대신 주체의 윤리학으로 수렴한다.

주체의 윤리학을 위해서 생물의 생명성을 인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 <생물철학>은 그런데 조금 일조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 style="width:100%; height:500px;"> without immunity

주제1: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


주제2: 공부에 대하여



토론주제1: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

비어 있는 항아리에 쌀을 부우면 끝내 항아리는 쌀로 꽉 채워진다. 항아리의 상태는 결핍에서 충족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체의 경우는 다르다. 채우면 빠져 나가고 다시 채우면 또 빠진다.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항아리와 달리 항상 결핍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결핍상태가 한때 채워질 수 있지만, 다시 결핍의 불완전한 순환계에 영원히 걸쳐있다. 결핍은 그 자체로 채움의 지향성을 내포한다. 결핍은 완전한 채움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결핍에서 충족으로 가는 지향성은 최종의 종착역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서구 사상사에서 결핍에서 완전한 충족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라인이 바로 플라톤 이래로 서구인이 제작한 ‘형이상학의 책’이다. 그 책 안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기독교의 신의 말씀까지, 아르카디아와 천년왕국에서 유토피아까지, 근대 이후 개정판에는 보편적 과학법칙이나 절대 정신이 써져 있다. 19세기에 개정된 현대판 ‘형이상학의 책’에는 형이상학 같지 않은 형이상학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과학기술과 자본의 권력이 추가되었다. 즉 과학기술에 대한 신념과 자본에 대한 신념이 형이상학적 유토피아의 지위를 대신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 나은 과학기술과 더 많은 자본이 더 풍요로운 미래를 보장한다는 신념이었으며, 이러한 신념의 실현이 곧 진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학기술과 근대 자본이 유토피아를 대신하면서 심대한 역사적 질곡에 빠지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역설적이지만 물질적 진보는 형이상학적 진보의 배경을 두고 있었다.

‘형이상학의 책’을 조금만이라도 들춰보면 결핍에서 충족으로 가는 길이 거의 앞으로만 뻗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백 리를 간 사람과 천 리를 간 사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충족함의 종착역에 누가 더 많이 다다랐는지 쉽게 판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누구든지 종착역에는 원천적으로 결코 도달 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종착역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종착역으로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종착지의 절대 존재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한다면 충족함의 목적점 자체도 처음부터 없었음을 뜻한다.

그런 형이상학의 절대적 지위를 처음으로 위협한 도전이 같은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하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 <종의 기원>이 말하는 진화론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모든 종은 동일한 선조를 갖는다는 사실과 (2)종은 절대자에 의해 불변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변화의 흐름은 일정하게 주어진 목적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과학적 사실은 원천적으로 기존 ‘형이상학의 책’에 조금도 실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자연의 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변화의 책’ 이었다.

그러나 ‘변화의 책’을 여전히 형이상학의 책읽기로 읽는 사람이 많았다. <종의 기원>에서 말하는 진화론을 약육강식 논리로 포장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이다. 소위 스펜서의 색안경으로만 진화론을 읽는 계층들을 말한다. 그런 읽기 방식은 이름만 변화일 뿐 실제로는 옷을 갈아입은 전통 형이상학의 재현이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읽기 방식 안으로 진화론을 가두어 놓으려는 제국주의적 수순이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진보를 믿는 근대 유럽인의 신념체계는 밖으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승화시켰지만 안으로는 빈부격차나 환경파괴 등의 인간소외를 야기했다.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변혁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과학기술과 자본의 진보가 아닌 현실사회의 진보가 실질적인 진보라고 확신했다. 사회적 진보는 곧 정신의 역사가 오늘에 재현되는 삶의 현장으로 투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적 진보를 해명하는 정신의 역사는 ‘변화의 책’에 실리게 되었다. 진화론이 제시한 생명의 역사와 함께 말이다. 과학과 사회의 서로 다른 스펙트럼이 묘하게도 ‘변화의 책’으로 같이 묶이게 되면서 진보와 진화가 만나는 통로가 열렸다. 사회변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가 ‘형이상학의 책’에서 탈피하여 변화의 진보론을 축조하게 되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맑스는 “다윈의 책은 매우 중요하며, 나에게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라고 썼다. 우리는 ‘변화의 책’, 진화론의 장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경쟁논리가 아닌 사회평등주의자들의 진보논리를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런 진보 개념을 나는 <진화론적 진보>라고 말한다. 진화론적 진보는 (1)종착역 즉 목적의 설정을 부정한다. (2)권력의 도구로 전락된 목적지향적 이데아를 거부하는데서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은 시작한다. (3)인간의 욕망이 무한 보충될 것이라는 환상, 자본의 무한증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기초한 진보가 아니라, 결핍을 그 자체를 인정하는 진보를 뜻한다. (4)진화론적 진보의 철학적 성격은 결핍은 부족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5)오히려 결핍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것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진보의 중심이다. 너무 당연한 말만 했지만 이것이 진화론적 진보를 담고 있는 ‘변화의 책’의 서문이었다.

그리고 <생물철학> 전반에 흐르는 기조이다. 변화의 기조를 면역학과 발생계이론, 그리고 신경과학의 가소성과 후성유전학에서 흩어볼 수 있다.


토론주제2: 공부에 대하여

1. 지식과 삶의 상보성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우리들의 공부는 다양한 통로로 실현된다. 책읽고 책쓰기도 한다. 강의듣거나 강의하고 세미나에 참석하여 토론하고 발표하기도 한다. 논문쓰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런 행위는 주로 지식행위에 속한다. 삶을 꾸려가는 삶의 행위도 공부에 속한다. 삶의 행위에는 크게 2가지가 보인다. 하나는 먹고사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 내부의 가족관계의 문제이다. 부업으로 학원을 하거나 작은 사업을 꾸려가는 경우를 보더라도 상당한 공부의 노력이 있어야 잘 된다. 또한 집안 관리를 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공부 중의 하나다. 내 주변에서 가정문제 때문에 지식공부를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우리 사회는 아직 가부장적 성격이 많이 잔존하여 여성지식인이나 남성지식인이나 이와 관련한 어려움이 많다. 혹은 아이를 키우는 것도 상당한 수준의 공부를 필요로 한다. 먹고사는 문제와 가족관계 문제는 상당히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리면서 가족관계 문제의 많은 것이 자동적으로 풀렸던 나의 경험이 큰 증거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리면 지식공부도 많이 할 수 있다는 점은 더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리면 지식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지식공부의 손을 놔버리는 경우가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통해 논문쓰기 공부가 공부의 모든 것이었다는 전형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공부는 다층적으로 해야 한다. 삶에 대한 공부와 지식에 대한 공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공부, 이 공부를 함께 꾸려야만 우리들의 노후가 좀더 안정적으로 될 수 있다. 30-40대 공부하는 이는 노후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쁠 것이다. 그러나 50대 이상의 공부하는 이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말하는 노후란 공부를 하는 지식공동체를 오래 유지하자는 그런 의미에서 사용했다.

2. 공부가 왜 필요한가: 글쓰기와 강의하기

2.1 남의 지식과 남의 삶을 배려하는 공부

오래전 마누라는 돈벌러나가고 내가 살림하면서 조카와 같이 살던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데 양파가 필요했다. 석관동 옛날 동네였는데 구멍가게들이 꽤나 있었다. 5살 먹은 조카아이더러 바로 옆집 가게 가서 양파 하나 사오라고 돈을 줘 보냈다. 5분 후에 왔다. 양파 대신 양파깡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나에게 양파깡을 주면서 잘 나눠먹자고 그러더라. 아이는 그 아이 바로 그 수준에서 아이가 이해한 그대로 심부름을 한 것이다. 조카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자기 생각한 것만 믿는 경향이 강하다. 공부는 자기 생각만 아니고 다른 사람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알려줘야 한다.

2.2 현실에 눈감지 않는 구체적인 공부
또 다른 조카는 초등학교 이학년이 되었어도 셈을 잘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정상인데 학교에서는 공부 못한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내가 셈을 가르쳐 보았다. 얘는 구체적인 사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200+300에 대한 셈을 하지 못했던 그 아이에게 내 주머니에 있는 100원짜리 동전 2개를 주고 다른 동전 3개를 더 준다면 모두 얼마냐고 물으니 총알같이 500원이라고 답했다. 200+300이라는 질문 대신에 200원과 300원을 합하면 얼마냐고 묻는 질문이 필요하다.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개체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전체의 보편성을 찾아가는 공부이다. 여기서 특수성은 구체적이고 보편성은 추상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추상화하는 능력은 아마도 인류가 획득한 최대의 수혜이며 업보일 것이다. 그런 공부를 혼자만 하면 아무 쓸모없는 것이 또한 철학의 운명이다. 그래서 철학을 좀 하는 이는 철학 공부를 남들과 공유해야만 그때 비로소 철학함이 수행된다. 의학은 물론이거니와 철학과 역사는 돌돌 말려진 그런 추상성을 다시 풀어서 구체적인 개체에 맞추어 투사할 때 가능해진다.

고대희랍 의학사이건 조선중기 의료사이건, 동양이나 서양과 무관하게, 현대나 고전이나 관계없이 특수에서 보편을 들이쉬는 공부에서 다시 보편에서 특수를 내쉬는 공부로 이어가야 한다. 전공과 무관하게 실천적 보편, 구체적 추상을 실현하려는 몸부림 그 자체가 공부의 몸체이다.

2.3 공감하는 공부
고무지우개로 장난감 조각을 만들기 시작한 철수도 나름대로 남모르는 절실함이 있었다. 철수의 절실함은 철수의 물질-심리적 상황이 (어느 어느 상황) 언더under에 스탠드stand되어 있는가를 공감해야만 비로소 철수의 공부아닌 공부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철수의 절실함은 우선 피동적인 상황에서 유래한다. 영어 선생이 이유없이 (선생님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욕적 발언을 하거나 수학선생님이 이상하게 강압적이라든가 하는 사소한 이유로 보이는 상황들이 철수에게는 거부감의 전환을 만든다. 선생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철학개론 서두에 theoria테오리아 어원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다. 멀리서 보는 행위이다. 멀리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보다는 나 자신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을 설명하는 공부법의 수식어가 바로 테오리아이다. 요즘 말로해서 객관적이 되려면 내가 대상에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과 주관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어터(극장)의 어원과 같다. 극장 무대는 관객석과 분리되어 있다. 극장에서는 무대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에 관객이 흥분하여 관객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일체 금지한다. 테오리아의 공부법은 지나온 이천년 인류의 지식체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근대과학의 탄생은 바로 테오리아 공부법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극장 이야기 나온 김에 마당놀이를 꺼내 비교해보자. 민중들이 놀던 시장판의 놀이판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다. 우리네 놀이인 마당극이 그 대표적인 무경계의 놀이판이다. 테오리아의 극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이를 공감의 놀이라고 표현한다. 테오리아의 극장에서는 배우로부터 관찰적 감동을 받을 수 있지만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섭동적 감동이 결핍되어 있다. 관찰적 감동은 지식을 더해줄 수 있지만 삶의 실천을 변화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감동으로 과학이 잉태했다. 그래서 그런 감동도 중요하다. 과학이 중요하듯이 철학이 중요하다는 뜻을 뭇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과학에서 테오리아가 중요하듯이 철학에서는 앰퍼시empathy와 심퍼티sympathy가 중요하다.테오리아와 공감성이 어느 것이 더 좋으냐는 그런 원색적인 질문은 그만하자. 그 대신에 사라져가는 공감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에 대한 질문과 반성을 하면 좋다.

역사에서 실증주의 방법론이나 비교법, 철학공부법 중에서 현상학이나 양명학 혹은 실존철학이나 탈근대적 스터디플랜들은 비교적 공감성이 엄밀한 과학적 글쓰기 위에 얹혀져야만 한다. 과학적 엄밀성 없는 공감성은 주술과 미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실천하는 공부: 규범적 실천과 공감적 실천

실천공부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규범적 실천공부법이다. 삶의 양식, 행동유형, 사회체계 나아가 역사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체계 혹은 이데올로기를 학습하는 것을 실천적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런 규범적 실천이 아니라 공감적 실천, 즉 둘째 실천공부법이다. 지시형 가르침(기존 관행적 교육)은 공부를 재생할 수 없다. 그 대신 거울형 가르침이 공부를 재생산한다. 거울형 가르침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너 내 말 안들려!, 밤나 또 그 짓이야!, 옆집 순엉이 공부하는거 반만이라도 쫒아가봐라” 아내에게 자식에게 함부로 대하고 지맘대로 대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부하라, 말잘들어라’ 백날 훈계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쯤이야 다 알 것이다. 아버지의 행동이 바뀌지 않고 아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쁜 남자들이 하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인이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만 들면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가 동원된다고 해도 끝내는 오히려 독자들과 멀어진다. 아버지 어머니의 구실을 학습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모방하는 것이지 부모의 훈계와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지식인은 그 스스로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줌으로써 타인이 지식과 삶을 배우게 된다. 공부의 재생산은 나의 지식이 아니라 나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실천철학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실천철학은 금지의 윤리학에서 탈피한다. 그 대신 주체의 윤리학으로 수렴한다.

주체의 윤리학을 위해서 생물의 생명성을 인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 <생물철학>은 그런데 조금 일조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한국의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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