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삶>을 향한 실천철학
원저 : 임홍빈, 기술문명과 철학
실린 곳 : 서평문화21집, 서평문화21집
1996 서평 : <깨어있는 삶>을 향한 실천철학, 임홍빈 저, 기술문명과 철학에 대한 서평, 서평문화 21집,1996


임홍빈 교수의 기술문명과 철학에 대한 서평        최종덕(상지대 교수,철학)

철학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현대 산업사회에 들어와서 점점 왜소하게만 보여진다. 첨단과학의 발전이 정교화된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우리의 삶의 양상은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변모하는 물적 조건들을 우리들은 다 따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기존 윤리의 틀은 이제 더 이상 이렇게 다원화된 산업사회를 포용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윤리의 틀은 당위적이다. 임홍빈 교수의 기술문명과 철학 은 이러한 당위성을 중요한 과제거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실천철학의 방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철학은 사회적 지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사회적 지표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관습 혹은 관념적 형이상학의 명제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나 시류적인 사회운동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꼬여진 문제를 풀기 위한 철학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비판철학의 지평에서 출발할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의 철학적 기본틀은 이성비판이지만 그 이성비판이 이성으로부터의 도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관념철학에 대한 반성이 곧 실천운동의 깃발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틀 속에서 과거의 관념적 철학을 비판하는 동시에 기능적 실증주의도 비판한다. 그리고 도구화된 이성을 비판하지만 이성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티도 거부하는 듯 보인다. 병리적 현상을 갖는 기술문명에 대하여 치료적 효과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철저하게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양비론적 입장은 사실 현대 독일 철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상이다. 현대 독일 철학자들 더 구체적으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게서 나타나는 철학적 노선은 대체적으로 근대철학이나 고전과학의 세계관에서 볼 수 있는 계몽주의나 미국 류의 실증주의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류의 탈근대화도 부정하는 틀을 보인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입장이 강한 듯 느껴졌다.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역사없는 과학주의와 이성없는 낭만주의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철학적 논쟁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우리의 삶의 조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전반적인 문제의식은 <깨어있는 삶>의 사회적 실현이다. 이런 시각에서 저자는 실천철학의 지평선을 모색하고 있다. 실천철학의 길을 찾아나서는 길에서 저자는 서구 근대과학의 사회적 배경이나 세계관을 분석한다. 과학을 단순하게 객관적인 지식의 집합으로 규정하려는 탈역사적 과학주의를 비판한다. 저자는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을 <가공성의 원칙>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역사초월적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과학이나 철학도 인간의 이해방식과 연관된 역사적 장르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은 원론적인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경윤리와 여성문제에 까지 적용시키면서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특히 환경문제는 현대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실천철학의 중요한 전개과제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환경윤리 논쟁에서도 여지없이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립적인 두개의 논지인 과학기술주의 혹은 환경개량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환경생태주의를 같이 비난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환경생태주의를 비판하는 애트필드(Attfield)의 논지를 여과없이 소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여과없이 소개한다기 보다는 저자의 생각이 애트필드와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환경위기에 대한 원인을 인구증가나 자본주의의 발달 혹은 기술공학의 발달이나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한 인간의 집착에서 보는 일방적 분석론을 단적으로 비난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원인분석은 낭만주의적 성향이라고 몰아치는 것은 지나치게 자기 방어적 대응으로 보였다.

환경위기의 원인은 저자도 인정했듯이 분명히 복합적이다. 환경문제는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 즉 정치경제 혹은 사회문제와 분리시켜서 보면 해결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애트필드나 저자의 표현방식은 일반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칫 인구증가나 자본주의의 병리적 발달, 혹은 군수산업과 같이 정치와 결탁된 기술공학의 발전이 지금의 환경위기와 전혀 무관하다는 무책임론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려 있다는 점이다. 애트필드의 설명방식은 전형적으로 일차 비판론에 대한 재비판에서 나올 수 있는 비판지식인의 자기함정을 노출하고 있다. 실천철학을 위한 비판은 철학적 반성이 끊임없이 따라 붙어야 할 일이지만, 지식비판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말 그대로 실천을 위한 실천철학이 되어야지, 비판을 위한 실천철학은 경계해야 한다.

여성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문제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매우 독특하다고 여겨진다. 생태주의와 패미니즘 사이의 단순한 연결동인을 저자는 부정적 시각으로 본다. 전통적인 남성의 권위로부터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는 일이 공격적인 ‘분리주의’나 남성혐오적인 ‘여성중심주의’의 의 차원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패미니스적 제안은 사실은 새롭다기 보다는 많은 남성들 중에서 계몽적 여성론자들이 갖었던 것이지만 과감히 공표하지 못했던 사실일 뿐이였다. 왜냐하면 물꼬터진 여성해방론자들의 목소리에 눌려있었던 계몽주의자의 속마음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과감하게 자율적 여성론을 계몽주의 정신 안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의 문제는 이제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권력의 재분배나 권리의 문제를 넘어서 노동과 생물적 재생산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저자의 책, 370쪽)

이러한 저자의 여성론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만약 여성론자들이 이러한 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하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지금의 여성과 남성의 힘의 분배결과가 합리적 소산물이 아니였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저자와 같은 합리적 대안은 실제로 여성해방을 위해서 실효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환경문제에서나 여성문제에 있어서 계몽주의와 반이성주의의 대립은 논리적 차원을 벗어나 있다. 환경/여성문제는 실제로 이론의 차원으로 극복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보여진다. 저자의 말대로 반이성주의가 새로운 권위주의를 야기시킬 수도 있겠지만 계몽주의는 여전히 보수권력구조를 존속시키는 이론구조에 그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반이성주의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공된 계몽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생각을 서평자가 보기에, 저자는 반이성주의 혹은 완화된 이성비판주의와 계몽주의라는 양극의 스펙트럼 상의 연결된 논의구조 속에서 완충적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 사회철학을 채택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장르에서 벗어난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 혹은 이와 유사한 사회실천운동의 구체적 모습을 너무 단순하게 ‘심리적 보상’(86쪽) 혹은 ‘문화적 반동’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친 이해가 아닌듯 싶다.

마지막으0로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4부 <현실과 철학의 정체성>이라는 장에서 한국철학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여기서 저자는 과학철학의 시대적 유형과 윤리학 그리고 거시적으로 한국에서의 인문학의 전개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책의 처음부분에서 말했듯이 <깨어있는 삶>의 지향점을 위해서 지식과 실천의 조화를 한국철학에 접목시키려는 작업은 비판적 대화와 창조적 실험을 통해서 재편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실천철학의 준거를 위해서 저자는 자유와 책임의 DNA적 구조전개가 독선적 도덕주의와 즉흥적 가설이 나열된 화석화된 지식체계를 거부할 수 있는 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우리 철학, 우리 시대에 있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기술철학의 영역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에서부터 인문학 그리고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통해서 반성적으로 되물어보고 있다.  우리의 지적 풍토에서 외국서가 아닌 한국철학의 소산물로서 생산되었다는 점에서 저자의 폭넓은 시각을 배우고 싶다. 저자의 이런 뛰어난 학문적 잉태물이 실천적 한국철학의 가능성을 당겨줄 것이라고 분명히 믿고 있다. 


서평자  : 최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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