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재단의 논리부재

말 반 토끼 반


교수 연구를 지원하는 정부기관으로 한국연구재단이 있다. 원래 한국학술진흥재단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곳에서 아주 오래 전에 소위 HK사업이라고 해서 대학 연구소가 인문학 분야의 대형 연구사업이 관장되었다. 당시에는 인문 부문 대형 연구사업이 없었던 터라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이 학술진흥재단의 HK사업을 신청했었으니, 그 경쟁도 치열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HK 연구사업 선정 심사위원이였던 필자가 겪었던 집단의 논리 오류에 대한 것이다. 선정대학을 엄격하게 심사하려는 공통 심사기준을 정하는 심사위원 전체 회의에서 신청대학마다의 순위를 매기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심사위원 중에 고참 교수가 아주 공정하면서도 간편하게 순위를 정할 수 있다는 심사기준을 제안했다. 7개나 되는 부문마다 심사위원이 7-8명 정도 되는데, 각 심사위원 각자가 매긴 순위 등수 숫자를 평균하여 최종 순위를 결정하는 이상한 기준이었다. 필자가 배운 대학 1 학년 수준의 수학으로 봐도 말도 안 되거니와, 통계학이나 수학을 굳이 배우지 않더라도 상식의 논리로서도 말이 안 되는 기준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지원 신청서류가 그렇듯이, 그 많은 대학에서 신청한 서류상의 우열은 서로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100점 만점으로 볼 때 대체로 거의 모든 대학이 80점에서 95점 사이에서 평가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7명의 심사위원이 8개 대학을 심사하여 7명 각자가 심사한 순위의 등수 값을 평균한 결과에 따라 대학 간 최종순위를 정했다고 치고, 한편 7명 각자가 심사한 100분율 점수를 평균한 결과에 따라 대학 간 최종순위를 정했다고 치자. 이 두 방식이 선정한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숨겨져 있다.

더 간단히 말해서 80점에서 95점 사이에 몰려있는 7개 대학의 100분율 성적을 평균한 결과와 1등에서 7등으로 매겨진 그대로 1점에서 7점의 숫자 사이에서 점수 하나씩 배정된 성적을 평균한 결과는 큰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인문학자들 50명이나 모인 전체 회의에서 고참 교수님이 제안한 기준, 즉 순위를 매긴 등수 값으로 평균을 내는 기준이 말도 안 되는 오류라고 지적했다. 나의 발언은 무참히 무시되면서 고참 교수의 제안대로 심사가 진행되었다.

결국 그런 기이하고 무지한 심사결과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었고, 최종 선정도 그렇게 되었다. 학술진흥재단 소속 직원들도 그 자리에 많았지만 사전에 제안된 그런 기준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하도 답답하여 옆의 다른 분과 심사위원이며 논리학을 전공하신 교수에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는데, 그 교수는 고참 교수의 기준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전체 집단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보였다.

문학, 예술, 종교, 철학, 역사를 전공하며 우리 학계 중진 교수라고 하는 50명이나 되는 인문학자들 모두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상식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그런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인 셈이었다. 이들 모두, 마음으로는 공정했으나 행동으로는 무지로 인한 불공정한 판단에 손잡은 것이다. 나 역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5일 동안이나 심사위원 소속으로 얽혀진 채 일을 했으니 집단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말 반, 토끼 반' 이라는 러시아 민간 이야기가 있는데, 등수로 매겨진 숫자 값의 평균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 알려주는 이야기다.

중앙러시아를 돌던 어느 여행객이 시골 식당에 들어가서 메뉴를 보니 전에 멋있게 먹어 본 적이 있었던 토끼고기 수프가 아주 싼 가격으로 나와 있었다. 토끼고기 수프는 원래 비싼데, 토끼고기와 말고기를 반반씩 섞은 토끼고기 수프가 값은 싸고 맛은 좋다고 해서 여행객은 토끼고기 수프를 얼른 주문했다. 곧 음식이 나왔는데, 전에 느끼던 맛도 아니고 토끼고기 냄새가 아니라 말고기 냄새만 많이 났다. 그래서 여행객은 식당 주인에게 따져 물었다. 알고 보니 토끼고기 반에 말고기 반을 섞은 수프가 아니라 토끼 한 마리와 말 한 마리를 섞은 수프라고 했다. 한 마리씩이지만 어쨌든 반반이라며 주인은 핑계를 댔다.

무차별한 ‘평균법의 오류’(avaraging fallacy)를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하는 인문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하기야 가장 과학적이어야 하는 이공계 교수단체에서 주관한 "창조과학 학술대회"라는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지식권력과 과학붕괴의 가장 처참한 현장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현실이 이러하니 인문학자들의 논리적 오류와 무지쯤이야 그냥 넘길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것도 마찬가지 현실이다.

호모사피언스는 직관적 감정을 소유하면서 나아가 논리적 이성을 갖도록 진화되었다. 논리적 이성은 전문 지식인만의 소유가 아니라 일반 상식인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인류의 공통 소산물이다. 우리들 모두에게 ‘말 반 토끼 반’의 속임수를 가려낼 수 있는 원초적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민사회의 건강한 상식으로 사회적 권력의 오남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식인의 몰과학과 반논리를 막아내야 하며 막아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문학자이거나 기술공학자이거나 그들의 지식권력에 위축되지 않는다면, 우리 일반 시민들도 그 안에 숨겨진 반과학의 오류들을 상식 수준에서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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