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1월 15일

(맨 위 사진: 스맛폰으로 찍으면 제한된 뷰사이즈 각도 때문에 길바닥에 새겨진 동판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서 파노라마 촬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길바닥 동판이 둥글고 길게 보입니다.)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시내 한 복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극우 폭력단 <자유군단>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하고 근처 개천(란트베르 운하)에 버려졌다.


로사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 속했던 폴란드 루블린 지역에서 유대인 가족으로 태어났다.
Rosa Luxemburg

16세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츄리히로 이주하여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및 독일 사회민주당 창설 주도하고, 독일 전 공산당인 스파르쿠스 동맹 리더다.

그는 국민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계급없는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지식인 혁명가로서 "붉은 로사"로 불리웠다.


대중을 지배하는 권력기관으로서 당을 규정하는 레닌과 레닌주의를 반대한다.
당보다 대중이 우선이며 대중이 주체라는 점이 로사의 기본이념이다.
혁명의 주체 또한 대중이기 때문에 프로레타리아 투쟁의 실현을 최일선의 과제로 삼았다.

점진적 노동조합 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역설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마력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권력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관권이 아닌 대중의 자발성으로 권력이 재창조되어야 한다고 한다.
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다른 공산주의나 사회주에서 볼 수 없는 <시민권>과 <정치적 자유>를 최우선 과제로 보았다는 데 있다.

노동조합 운동은 급진적 대중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1919년 1월 11일 투쟁군의 시위가 일었으나 3천 명의 군인들이 진압하면서 무수한 희생자가 났다.

로사는 1919년 1월 15일 독일 군부 갱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가 죽자 혁명은 수포로 돌아가고 부패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이러한 불행의 역사는 히틀러의 탄생을 예고하게 된다.
Rosa Luxemburg
로사가 체포된 바로 그 장소 로사룩셈부르크 광장, 대중극장Volksbühne 근처 어느 길바닥에 동판으로 새겨진 로사의 함성이 담겨진 문구이다.


Euro "Ordnung" ist auf Sand gebaut.
Die Revolution wird sich morgen schon "rasselnd wieder in die Hoh'
richten" und zu eurem schrecken mit Posuanenklang verkunden:
Ich war, ich bin, ich werde sein!

당신들의 체제는 모래성일 뿐이다.
혁명은 내일 또 다시 총성과 함께 일어날 것이며
나팔소리와 함께 포효의 선언이 선포될 것이다.
나는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Rosa Luxemburg

1919년 1월 15일 그는 1차 대전 참전군으로 조직된 극우 폭력대 자유군단(Freikorps)에 잡혀 개머리판으로 뇌가 깨지는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었던 그의 애인 요기헤스와의 900통이나 되는 로사의 편지 속에는 부드러운 면모가 읽히기도 한다.

혁명과 개혁 사이, 급진과 점진 사이에서 항상 급진적 혁명을 추구했던 그녀이지만 그에게서 혁명은 유토피아로서 먼 발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했던 "개혁과 점진"이 실질적으로 성취되려면 처음부터 개혁이 아닌 혁명의 깃발을 들어야만 비로소 개혁의 가치도 실현될 것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해석은 여전히 논란이 있다.) 무장투쟁을 선동했지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문제를 더 소중하게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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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를 읽어가면서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혁명과 개혁
급진과 점진
기동전과 진지전(그람시)
불연속과 연속(로고스 철학)
단박에 혹은 시나브로
돈오와 점수

"사이의 사이"에서 중도와 체융이 과연 가능한 가를 되물으면서,,


로사 룩셈부르크 역사 다큐 (적극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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