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정책과 기초학문의 위기
교수신문 2010년10월4일 게재


학단협-교수신문 ‘학술정책 진단’ 연속기고 ①
<교수신문>은 학술단체협의회과 공동실시한 ‘인문사회과학 학술정책’ 설문조사에 이어 ‘학술정책 진단’ 연속 기고를 7차례에 걸쳐 싣는다. 순서와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학술정책과 기초학문의 위기
2. 학문생산과 학문 적실성의 위기 (논문 양산과 필생 역작 개념 상실)
3. 연구재단의 사업구성 문제
4. 연구지원사업 대형화 문제
5. 연구재단 심사과정
6. 비전임교원의 학술정책과 연구지원 방식
7. 국가의 학술 교육정책과 연구자율성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학술정책과 기초학문의 위기



최종덕(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학술정책에 관련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통계수치 가운데 하나가 SCI 이다. 과학기술 관련 SCI 수록논문 집계에서 한국은 1989년 1,382편에서 2008년 35,569편으로 무려 26배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실질적인 논문의 영향력을 가름하는 통계치인 논문 1편 당 평균 피인용수준 수치는 통계가 잡혀진 1993년 1.33회에서 2008년에는 3.28회로 증가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소위 국가경쟁력 주도자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세계 순위 수치로 따져보자. SCI 수록 수치는 20년 사이에 세계 29위에서 세계 12위로 껑충 뛰어오른 괄목의 성장을 나타낸다. 그런데 논문 1편 당 평균 피인용수준의 수치는 1993년에서 2008년 15년 사이에 세계 31위에서 세계 30위로 오히려 하락했다. OECD 국가 중 하위권에 머무는 순위이다. (“피인용 상위 1% 논문 현황 분석”, 한국연구재단, 2009)

이 통계의 의미는 분명하다. SCI 논문게재 수량적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지만 오로지 양적인 성장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통계치이다. 이같은 지식의 물량중심 현상은 연구자 개인보다는 한국 학술정책의 허점에서 드러난 결과이다. 수치 중심의 양적 성장에는 성공했으나, 비가시적인 지식기반 연구에 대한 균형적 지원정책이 미흡했다는 뜻이다. 성과위주의 산학협동이나 가시적인 국가경쟁력이라는 엄청난 구호 아래 이론과학 분야 혹은 인문 기초연구 등의 기초학문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공공 정책이 소홀해 진 것이다. 국학분야에서조차도 SCI 논문을 특별대우 해줄 정도니 말이다.

노벨상 강박증이 학문정책에도 드러난다.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특정 학문을 지원하고 특정 그룹을 교육해야 한다는 등의 기이한 정책들이 너무 쉽게 남발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은 기반연구가 충분히 성숙된 과정에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다. 노벨상을 수상하려는 목적을 갖고 하는 연구는 결단코 성취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캠브리지 대학은 67차례나 (연구소 및 대학원 포함시킬 경우 82회) 노벨상을 수상한 학문의 대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어느 상황에도 SCI나 노벨상 수상이 정책목표였던 적은 없었다. 그들은 기초학문 연구와 협동성 연구만이 미래의 학문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따랐고, 그 결과가 노벨상 수상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원고분량이 넘칠 경우, 이 문단 전체를 빼세요. 가능하면 빼지 마시구요.)

<조립화된 학문융합> 신자유주의는 지식의 유통을 시장으로 내던졌다. 지식의 시장화는 자본재생산이 높은 쪽으로 지식생산이 집중되는 현상을 유발했다. 거대 산업화의 환상을 주는 소위 원천기술에 대해 자본이 몰리게 되었다. 원천기술 이동은 특허권 등의 국제화된 시장독점권을 목표로 한다. 한국 역시 최근 들어 융합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를 쫒아 가시적인 성과에 올인하고 있다. 권력의 소유가 아닌 대중과 만나는 지식을 구하기 위해 학문간 담을 허무는 일은 상아탑에서 벗어나 실천적 학문을 실현하려는 학자의 첫째가는 덕목이다. 그래서 융합학문은 성장되어야 한다. 문제는 융합학문의 지식이 자본의 시장구조에서만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식시장은 거대한 자본축적을 장악하기 위하여 학문간 융합을 요구한다. 그런 시장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학술정책이 기획된다는 점이다. 학술연구자는 정책적으로 기획된 연구주제에 맞추어 연구신청을 하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연구의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출발한 학문융합이지만, 결국 학문의 다양성이 제약되고 만다. 과학기술 연구자 개인은 이런 연구자유의 축소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경우 한 국가의 창의적 연구역량은 자동적으로 축소하게 된다.

지식의 시장화에 따라 학문융합조차 자본의 확대 재생산의 수순이라면 이는 정말 슬픈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지식시장 구조에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시장구조는 실질적인 기대효과를 생산하지 못한다. 융합학의 실질적인 성공여부는 융합의 요소가 되는 개별 기초학문의 토대가 얼마나 건실하게 구축되어져 있느냐에 달려 있다. 융합학의 가시적인 기대치를 장밋빛 희망으로만 기획하거나 그에 따라서 거대프로젝트 형태로만 치달을 경우 기초학문의 중요성과 의미를 볼 수 없는 지식 문맹이 된다. 학문의 외형적 융합은 이루어진다고 해도 학문의 협동성은 놓치고 만다. 결국 모방의 지식은 증가할 수 있어도 미래의 창의적 학문은 설 수 없다. 지식의 시장화를 선도하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 있다.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우리가 아이패드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면 기초학문이 오히려 더 실용적이라는 말이다.

<마스터플랜의 부재> 2005년 국가수리과학연구소가 생겼다. 수학 관련 기초학문 지원정책의 눈여겨 볼만한 사례였지만, 그나마도 융합학의 요소로서 응용수학 분야를 지원하는 정책일 뿐이다. 수리과학이 그 정도이거늘 인문사회과학 영역의 기초학문 지원은 말할 나위 없이 척박하다. 누구는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해 반발할 것이다. 인문한국(HK) 사업이다, 중점연구소다, 토대연구다 해서 엄청난 인문기초 지원이 현존하는데 웬 투정이냐고 말이다. 맞다. 그러나 그 전체 지원규모는 미미한 수준이다. 2008년도 기준 인문학 지원규모는 공학 부문에 비해 1 / 15 수준이었다. 인문학의 속성 상 공학과 비교하여 지원규모를 따진다면 정말 투정부리는 일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인문학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한국에 없다는 점이다. 요새 HK 인문한국 사업을 미래 한국을 위한 인문학 마스터플랜 혹은 그 일환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아무도 없다.

3기 인문한국 사업이 진행되면서 원래 실행목표였던 학문후속세대의 안정적 연구상황이 이루어졌는지 솔직히 반성해야 한다. 외형적 실적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연구자간 경쟁체제를 요구하는 기존 지식권력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존 비정규직 교수들이 향후 안정된 연구지위를 보장받은 것도 아니고, (2)우선 눈치 안 보고 자기 하고 싶었던 주제를 연구하고 논문발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중간심사 대비 연구소 실적을 위해 치레행사 준비하느라 연구집중이 강사 시절보다 더 늘어난 것도 아니고, (4)창의적 지식생산을 위한 석박사 후학들과의 중간 매개 역할도 하기 어렵고, (5) 그나마 HK라는 폭풍의 배를 탄 비정규직 교수의 수도 매우 작은 비율인 것이 현실이니, 과연 뭐가 좋아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정책자의 입장에서 돈은 쓸 만큼 썼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인문학에 대한 마스터플랜의 부재만이 아니라 기초학문 일반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장기 계획이 없다는 점이 우리 학술정책의 최악이다. 지식이 자본의 시녀임을 당당하게 표방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기초학문이 설 자리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지식의 시장화를 선도하는 미국에서조차도 국가인문예술지원법이 있고, 영국도 최근 2005년 AHRC(Arts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와 같은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시행했다. 일본의 기초학문에 대한 국가차원의 마스터플랜은 이미 범례적이다. 우리도 마스터플랜을 당장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과거 창의적 연구사업, 프런티어 사업, 지역협력연구사업(RRC), BK, HK 등도 출발할 때는 전부 마스터플랜의 일환이라고 했다. 불행히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따라서 바뀌고 마는 그런 정책사업들은 당연히 마스터플랜일 수 없다. 지식을 이념의 도구로 삼는 일, 가시적인 실적 위주, 기성학자들의 권위주의, 자본화된 지식권력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학문의 마스터플랜은 공허한 말로 들릴 수 있다. 한국의 정책적 학술지원 규모는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했다. 지원정책 체계가 향상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증가된 물적 규모가 적시적소에 활용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기초학문에 대한 마스터플랜의 부재 때문이다.

<사람을 위한 학술정책> 과학기술 분야나 인문사회분야 할 것 없이 집중화된 대형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한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미래에 삶의 보장이 쉽지 않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장기적이거나 창의적인 연구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다. 거대 프로젝트의 특성인 융합의 허상을 깨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연구자의 개인연구가 보장되어야 한다. 기초학문에 대한 학술지원정책의 원칙은 다양성이 보장되는 개인연구들의 협동화 정책이어야 한다. 그래서 조립방식의 융합형 대형프로젝트 중심은 지양되어야 한다. 거대 연구프로젝트 네트워크에 들어오지도 못한 기초학문 영역은 아예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이론물리 없이 국산 인공위성은 없다. 생화학 기초 없이 신약개발은 불가능하다. 지리학 연구 없이 GIS(지리정보시스템) 구축은 없다. 전통 고증연구가 많았어야 문화콘텐츠산업도 크게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 공부가 있어야 학문이 제 갈 길을 간다. 인간을 공부해야 공학기술도 비로소 유용해진다. 사회를 공부해야 지식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되지 않는다. 기초학문에 대한 학술정책의 원칙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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