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어른들의 이야기
인문학, 어른들의 이야기

최종덕
(독립학자, 상지대 명예교수)
http://philonatu.com



필자는 오래 전에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인문학이 무엇이고 인문학을 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기계공학이나 분자생물학 등과 달리, 인문학은 눈에 확 들어오고 딱 떨어지는 실체를 가진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어른의 인문학을 말하려는데, 인문학을 정의하고 서술하는 방식보다 사람들이 사는 삶의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하나는 미국 보디빌더 출신 65세 남성 앤드레이드 이야기이며, 다른 이야기는 심장 수술을 원하는 87세 여성의 심정을 그린 담당의사의 보고서이다.

젊었을 때부터 철인경기를 포함한 근력운동으로 미국 보디빌더 계에서도 유명했었고, 어느 덧 65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30대의 몸매로 부러움을 받아온 앤드레이드Eddie Andrade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건강강박증으로 시작된 우울증으로 65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을 한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지금의 몸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극심한 불안증에 시달려 왔었다. 남들이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정도의 탄탄한 몸매를 가졌지만, 자신이 보기엔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미래의 그림자만이 자신에게 비춰질 뿐이었다. 결국 그는 남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으로 향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노인을 보는 선입관에 관한 것이다. 대동맥 판막과 관상동맥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된 87세의 여성 이야기인데, 그녀는 이미 개심술에 관한 의료정보를 충분히 인지하고 수술을 요청했다. 처음에 담당의사는 그녀가 개심술을 받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다. 담당의사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그녀의 의지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 나이에 자연적인 노화현상이라서 위험한 개심술 같은 큰 수술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당의사는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환자의 의지는 환자 나이 87세이거나 혹은 37세이거나 무관하게 질적으로 같다는 점을 깨달았다. 의사는 개심술을 결정했고, 이후 그녀는 6년을 건강하게 살았다. 담당의사 티볼트는 87세 환자의 관점에서 이런 임상상황을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그 논문제목이 “87세, 내 나이가 어때서”Too Old For What?이다.

‘나’라는 인생 안에 이 두 가지 삶의 흔적들이 이미 상존하고 있다. 첫째 이야기처럼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는 나이와 무관하게 나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끊임없이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잘 아는데, 실상은 인정욕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나아가 둘째 이야기처럼 나 역시 나이 들어 제풀에 죽지 않고 젊게 살아보려고 애 쓰고 있지만, 남들은 나의 노력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남들이 나이든 나를 쳐다보는 편견과 선입관을 뭐라 탓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도 젊었을 때 노인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직 교수였기에 남들보다 비교적 가진 것도 많아서 시니어로서 쌓아온 내 인생의 노하우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지만, 요즘 시절에 함부로 그랬다가는 ‘꼰대’라는 오명을 받기 십상이다.

급속한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에 대하여 많이들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노후를 살아가는 구체적 대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취미생활도 찾아보고 새로운 것에 도전도 해보고 저 멀리 여행도 가보지만 아직도 오래 남은 노후의 여지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50대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오팔 세대도 자신을 나이 많이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베이비붐 세대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래도 세대 차이에서 오는 나이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느낌과 남이 나를 생각하는 느낌 사이에는 크레바스 간극처럼 깊이 파인 내면의 갈등이 존재한다. 내가 돈이 많아도, 권력이 세도, 친구우정이 쌓여도, 내 몸이 건강해도, 하다못해 사랑하는 배우자가 곁에 있어도 이런 크레바스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간격을 좁히지 못할지라도 간극을 연결하는 다리가 가능한데, 그것은 세상을 해석하고 나를 행동하게 하는 인문학 공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이란 외로움에 마주한 나 자신을 직시하는 삶의 태도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가장 두려워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그런 사회적 그물망에서 빗겨난 외로움을 자기 파멸로까지 인식할 정도다. 그렇게 무서운 외로움을 극복하고 탈출하기 위하여 우리는 가족도 이루고, 친구도 찾고, 돈도 벌고, 유투버로 활동하거나 SNS에 댓글을 열심히 올리는 등, 취미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아무리 그런들 내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외로움을 없앨 수는 없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망이듯이, 아무리 이겨내려고 인생을 투자해도 악순환의 외로움은 계속 밀려올 뿐이다. 욕망이나 외로움이나 본질적으로 인간 본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엄마의 품을 찾는 순간부터 왕따를 당했던 외로움의 어린 시절을 거쳐 친구와 애인을 갈애하며 질풍노도로 몰아치는 청년의 고독 전쟁 시절로 넘어서 왕성한 사회활동에 외로움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였던 중년에게도 내면의 외로움이 엄습하는데, 임종 직전까지도 외로워하면서 이 세상을 마감한다. 이렇게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외로움과 함께 하여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나이 먹는다고 자동적으로 되지 않고 항상 연습해야 가능해진다. 연습하는 매뉴얼이 바로 인문학 공부다. 인문학 공부는 인문학자만의 소유가 아니다. 철학은 전문 철학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판과 성찰을 시도하는 모든 이는 지금 철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인에게는 정의로운 정치철학이 필요하고, 운동선수에게는 소위 스포츠 정신이라고 하는 운동철학이 필요하고, 투자가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멘탈(러티)의 투자철학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인문학도 인문학자만의 지적 소유물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찾아가는 삶의 플랫폼이다.

인문학은 논어나 도덕경 같은 고전읽기에만 있지 않으며 박물관 교양강좌에 개설되는 예술론이나 미학 강의를 경청하는 데만 있지 않으며, 나의 생각과 습관을 정말로 바꾸어 보려는 의지실천과 행동이 바로 인문학 공부의 핵심이다. 논어나 미학 같은 인문학 지식을 받아들이는 단계는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따라하는 단계, 해당 텍스트가 나에게 감동을 주어서 잠시 느끼는 단계, 마지막으로 텍스트의 의미대로 나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보려는 단계이다. 따라하는 인문학, 느끼는 인문학 공부는 교실에서 학습하는 과정이고, 바꾸어 보려는 단계가 바로 어른 인문학 공부의 과제이다. 인문학은 인생을 끌어가는 행동양식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공부해야 비로소 그 결실을 볼 수 있다.

인문학이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기능주의 학습과 다른 점은 양파와 바나나 차이로서 은유된다.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주면 껍질을 벗겨내 버리고 맛있는 속만 먹는다. 그만큼 원숭이는 영리하다는 뜻이다. 그런 원숭이에게 양파를 던져주면 바나나처럼 껍질을 벗겨내고, 벗겨내니 또 껍질이 있어서 다시 벗겨내고 보니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자기 똑똑함에 빠져 아무 것도 건질 수 없는 인생의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인문학 공부에 관심 둘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 실체의 환상에서 벗어나 행복을 만들어가는 행동 자체에 진짜 행복이 묻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양파의 인문학이다. 특히 어른들의 인문학 공부는 젊은이들이 느낄 수 없는 절실함이 배어 있다. 배우느라 30년에 일하느라 30년을 보냈는데 아직도 30년이 더 남았으니, 이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허상의 실체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찰하는 삶의 행동을 소중히 여길 때이다.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외로움에 적응된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활동도 더 잘한다. 왜냐하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행동습관은 결국 공동체 유지와 번성에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이겨보려는 한 가지 수단으로 사회적 활동에 빠지는 사람은 결국 그 공동체에서도 자신의 연결망을 직조하기 어렵다. 대학 수업시간에서 혹은 기업 내 그룹별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을 피하지 않는 구성원이 더 많은 집단일수록 성공적인 협동성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연구결과는 많다. 외로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업수행율을 높이는 기능성 학습보다는 인문학 공부를 권유하면 더 좋다. 당면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업이나 공학 교실 학생에게 당장 인문학 공부를 요청하는 일은 비현실적이지만 교실수업이나 기업실무로부터 비교적 여유롭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니어들에게는 현실적이다.

외로움과 싸우지 말고 내 삶의 방편으로 함께 하는 인문학 프로젝트는 요즘과 같은 코비드-19 시절에 딱 맞는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외로움의 방편을 ‘외로움의 사회화’라고 부른다. 외로움과 싸우느라 지쳐서 오히려 외로움 안으로 깊이 빠져버리는 것을 ‘외로움의 내재화’라고 한다면, 외로움을 향유하여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성찰하고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외로움을 ‘외로움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공부하려는 인문학은 이런 외로움의 사회화를 체현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나는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호칭은 이미 완성된 존재를 표현하는 것으로 하릴없이 대접받는 저 높은 부류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간은 완성될 수 없다는 미완성 인간형을 전제하고 인문학 공부를 말한 것이어서, 외로움이 들어설 자리 없는 완성형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나의 인문학 이야기는 필요 없을지 모른다. 이런 나의 이야기는 아래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외로운 존재인데, 나이가 들면서 더 외로워지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외로움의 내재화에 빠지지 않고 외로움의 사회화를 연습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하다. 교양을 쌓는 인문학, 지식을 넓히는 인문학, 여가시간을 보내기 좋은 인문학, ‘나 인문학까지 공부하는 사람이야’라고 폼 재는 인문학은 결국 내재화된 외로움의 수렁으로 빠질 수 있다. 반면 어떤 인문학 공부를 하던지 관계없이 나 자신을 순간순간 관찰하여 호기심을 버리지 않는노력이 소중한데, 그런 노력이 바로 외로움의 사회화를 이루는 공부이다. 외로움의 사회화란 나의 뇌를 행동하게 하여 인지력을 높이고, 나의 몸을 행동하게 하여 운동력을 유지하게 하며, 우리 공동체를 행동하게 하는 공감능력을 넓히는 일이다. 노화의 결과로 행동력을 잃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노화가 온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외로움의 사회화는 나에게 자동적으로 체현된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진다.

둘째 바이러스 팬더믹으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와 여행 제한이라는 이 난국의 시기를 외로운 사회화를 체현하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 좋다. 본격적으로 변화하게 될 외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5G 시대, 그리고 5G 기술이 온 세상과 온 사물에 적용되는 6G 시대가 오면 진짜 개인군의 세상이 될 것이다. 파격적 변혁의 미래가 새로운 정상사회로 될 것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미래 예측이 아니라 불과 향후 6-7년 안에 우리 모두를 압도할 수준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오늘의 코비드-19 상황은 예측불가의 비정상 상황이지만 외로움의 사회적 관점에서는 파괴적 변혁으로 변모된 정상사회의 초입을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파괴적 변혁의 정도는 너무 강력하고 급속해서 비정상적 정상사회를 따라가기에는 어른이나 청년이나 다 같이 힘들다. 문제는 물리적 나이가 아니라 인문학적 공부와 삶의 행동이 준비되어 있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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