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서평>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서평자: 최종덕


철학은 비판과 반성을 겪어가는 삶이다. 정치는 그런 삶의 조건이면서 삶의 현장이다. 철학은 정치에 제약을 받지만 정치를 반성하고 느리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 나로부터 멀어진 정치를 나에게 되찾아오고, 나와 우리 사이의 조작된 경계를 알려주는 철학적 사유의 지도가 정치철학이다. 그런 정치철학의 지도가 탄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 공동으로 쓴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전체주의와 독재 문제를 다룬 영역과 해체주의와 구조주의 프랑스 정치철학의 영역, 차이의 정치 혹은 페미니즘 정치철학의 영역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의 세속화와혁명정치를 다룬 영역, 4 가지 정치철학의 영역을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논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정치철학을 다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내부의 독재를 다룬 영역에서 칼 슈미트(1888-1985), 벤야민(1892-1940), 아도르노(1903-1969), 아렌트(1906-1975), 해체와 구조의 주제를 다룬 영역에서 알튀세르(1918-1990), 푸코(1926-1984), 들뢰즈(1925-1995), 랑시에르(1940-현), 기존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차이의 정치를 다룬 영역에서 프레이저(1947-현), 누스바움(1947-현), 아이리스 매리언 영(1949-2006), 버틀러 (1956-현), 마지막으로 근대성을 해부하여 민주주의의 속살을 벗겨내는 영역으로 하버마스(1929-현), 찰스 테일러(1931-현), 아감벤(1942-현), 지젝 (1949-현), 이렇게 모두 정치철학의 16 가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담론은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매체학, 미학과 문학 및 예술분야를 포함한 한국 지식사회에서 격렬히 논쟁되고 있다. 이들 16명의 국내 번역서가 무려 300종이 넘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논의가 한국지성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평자도 현대 정치철학의 담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긴 알았는데, 너무 전문적이고 너무 방대해서 그동안 그 전체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2019년에 출간된 책,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을 읽으면서 비전문 일반인도 현대 정치철학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6명 정치철학자의 논점을 이 책의 순서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도했다.

<칼 슈미트> 첫째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1부인데, 그 시작은 전체주의를 옹호하고 나치를 정당화했던 칼 슈미트의 정치철학이다. 슈미트 이론 안에는 민주주의의 붕괴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꾸로 말해서 슈미트의 위험한 정치철학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약점과 함정을 피하고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분석에 의미를 두었다고 필자 남기호는 말한다.

칼 슈미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쉽게 말해서 말 많고 겁 많은 의회제도 대신에 일인 통치자 중심으로 강력하게 국가를 끌고 가는 총통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데 있다. 한국정치에서는 이미 박정희 미신으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 글을 읽으니 왜 전체주의가 되살아나는지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군주제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는 민족, 인민 등 이종적 대중들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각축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의회의 당파성으로 인해 협동적인 정치화합은 불가능하다고 슈미트는 단언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로 동일시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의회주의를 이합집산의 자유주의 소산물로 보는 것이 슈미트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합집산의 의회주의 대신에 사회의 자지기조작화로서 국가를 지향해야 하며, 이것이 슈미트가 설계하던 잠재적 전체주의 국가 모습이다.(27-8쪽) 나아가 민주주의에서 선거에 패배한 쪽은 배제되는데, 불평등으로 보이는 이런 현상의 실제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슈미트는 말한다. 이런 자유주의 이합집산을 막는 유일한 길이 파시즘이며 파시즘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칼 슈미트의 궤변이 시작되었다. 20세기형 전체국가를 꿈꾸던 슈미트는 나치를 정당화하고 환호와 갈채를 독재자를 찬양한다. 슈미트의 오도된 민주정치 의식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안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전체주의 괴물을 경계하고 붕괴시켜야 한다고 필자 남기호는 강하게 말한다.

<벤야민> 문화학자이면서 정치철학자로서 벤야민(1892-1940)은 그의 유명한 저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세계변혁의 도구로서 영화를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매체와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혜안은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와 예술 부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주었다.(40쪽) 소비에트 스탈린과 독일 파시즘의 결탁으로 위기에 맞은 벤야민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장르에 급진적 해방의 밑그림을 입혔다. 벤야민 박사학위 주제였던 낭만주의 예술과 그 비평은 시와 사유의 결합이며 시인과 철학자의 결합이었다. 시가 미의 이념을 구현한 것이라면 철학은 구현된 미의 이념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술이 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52쪽)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연극은 관객이 배우 안으로 빠져들지만, 영화는 상대적으로 배우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남으로써 관객이 비평을 할 수 있는 태도가 넓어졌다. 영화의 영상은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하는 민중의 언어라는 벤야민의 어구는 아주 유명하다.(55쪽)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파시즘은 예술적인 자기만족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을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경고했다. 예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나치 권력의 홍보용이었다는 점을 필자 박지용은 지적하고 있다.(57쪽)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보편사 이념에 기초한 진보 개념을 비판하고 혁명적 실천의 동력을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서평자가 알기에 벤야민은 기독교적인 구원론이 국가권력의 기초로 될 수 있다는 신학 이론을 부정했는데,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진보 개념은 역사적인 연속성의 노정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당시 사민주의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면서도 소비에트 유물론을 거부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지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렇듯이, "벤야민의 기여는 지금까지 좌절된 혁명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데 있다"고 필자 박지용은 강조한다.(64쪽) 당대 아도르노와 브레히트 그리고 아렌트와 벤야민은 나치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브레히트는 결국 당시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에 눌려 동독으로 정착했고, 벤야민은 미국 행 직전에 이주가 좌절되어 약물자살로 삶을 마쳤다. 죽음 직전의 원고에서 그가 한 말이다. "역사유물론은 언제든지 승리한다."

<아도르노>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미학 그리고 음악에까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아도르노(1903-1969)는 히틀러 정권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1953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로 귀환했다. 미국 시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은 그의 미국 시기에서 받은 음악의 문화적 충격과 미국 실증주의의 양면성들, 그리고 미국 시기 이전 루카치와 벤야민 등과 교류한 학문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활동은 68혁명의 이론적 배경에 영향을 끼쳤다.(68-9쪽) 20세기 두 차례 전쟁, 파시즘의 등장, 폭력적 독재 만연 등의 이유를 "계몽의 자기파괴" 혹은 "신화로 퇴보하는 계몽"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의 요체이다.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신화이지만 그 계몽 자체가 신화로 빠지는 역설, 변증법적 역설을 다룬다. 계몽이 추구하는 지식이 오히려 권력의 수단으로 되는 역설을 말한다. 계몽은 주체를 필요로 하는데 그 주체가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보여준 야만성이란 합리적 주체라고 하는 계몽의 주체가 오히려 신화의 주인공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해명한다.(68-71쪽)

전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시스템이다. 동일성을 지키는 주체는 편집증 환자가 된다는데, 즉 자신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광기와 공포를 표출한다는 것을 필자 한상원은 편집증이라고 절묘하게 표현했다.(79쪽) 독재권력의 전체주의로 인해 주체가 퇴보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고가치로 내세우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중은 동일하고 규격화된 삶의 형식으로 빠지게 된다고 아도르노는 진단했다.(80쪽) ‘가상에 빠진 자유’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했다. 당과 계급이라는 교조화된 맑스주의 대신에 개인의 고유한 사람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적 해방이 아도르노가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이었다. 이를 한상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무장해제 시킨 자리에는 곧바로 순응하는 군중이 출현하며, 이는 전체주의적인 지배의 위험으로 이어졌다."(83쪽)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는 듯하다.

<아렌트> 1941년 미국으로 옮긴 후, 1959년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된 아렌트(1906-1975)의 두 저서 <인간의 조건>(1959)에서 인간 활동의 세 가지 기반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라고 했다. 여기서 노동은 생물학적 충족을 위한 생산이며, 작업은 세속화된 물질세계를 만들면서 자연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행위는 말을 통해서 정치적 관계를 풀어가려는 공공적 교환이다. 노동과 작업의 생산관계가 행위의 정치행위를 지배하는 틀에서 탈출하는 일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표현했다. 정치행위가 배제되고 소통을 위한 아고라의 공적 영역이 무시되는 욕망 지배의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복층적인 소통문화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아렌트의 "차이의 정치"이다.(101쪽) 차이의 정치를 보장하는 정치적 삶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비오스bios의 삶이다. 비오스와 대비된 조에의 삶이란 획일적이고 단수적이며 개체화된 삶이며, 기계적이고 운명의 굴레에 빠져 정치적인 삶의 황폐화에 이르는 길이다. 아렌트가 추구하는 차이의 정치는 비오스 삶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102쪽)

과거 독재정치나 전제정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합의가 파괴되고 그들만의 정당성을 합의 없이 축조하면서 그들 스스로 적법성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정치를 아렌트는 "총체적 테러"라고 표현했다.(105쪽) 개인이 느끼지 못하고 저항할 수 없지만 개인의 다양성이 말살된 상태이며, 이런 전체주의는 나치 이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106) 총체적 테러를 극복하고 무작위적인 균등과 다른 진짜 평등성의 권리를 찾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며, 차이의 정치는 정치적 삶과 저마다의 인권을 연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이다.(109쪽) 정치와 인권이 연결되어야만 구성원 사이의 다양성이 보장된 공동체에서 나의 인권이 성취될 수 있다. 개인의 권리를 빼앗기고 소통이 차단되고 사회적 합의가 강압적인 그런 정치권력은 정치행위의 종말이며 정치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필자 조배준은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평등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가능함을 아렌트는 강조한다. 평등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평등은 정치활동을 통해 정의 원칙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평등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의 균등성은 전체주의에 예속화된 삶의 결과일 수 있다.(110쪽) 2010년 이후 극심해진 양극화,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 만연된 혐오 문화 등의 사회적 병리는 제도권 정치수준에서 해결되지 못한다. 아렌트의 공동체 평등주의, 총체적 테러에 대한 붕괴와 방어 노력, 정치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합의공간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그런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푸는 열쇠일 것이라고 필자 조배준은 말한다.(113쪽)

<알튀세르> 알튀세르(1918-1990)의 두 작품, <맑스를 위하여>(1965)와 <자본을 읽자>(1965)는 맑스 최고의 해석서이면서도 동시에 맑스를 철저히 해부하여 혁신시킨 정치철학의 깃발이다. 알튀세를 맑스주의자이면서 맑스주의 비판자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맑스주의가 지닌 경제결정론과 역사목적록을 알튀세르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이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이미 역사적인 형식들, 즉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적 필연성 말고 그 어떤 것도 아닌 형식들 속에 삽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138쪽)

알튀세르는 군대, 경찰이나 법원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 말고 또 다른 억압으로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를 묘사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종교, 교육, 정치, 노동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도 재생산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위한 투쟁은 완성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이은 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152쪽) 여기서 투쟁이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은 투쟁의 강도를 의미하기 보다는 투쟁의 목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목적론과 결정론을 거부하지만 여전히 최종심급이라는 또 다른 방식의 결정적인 기본 토대를 지향하는 알튀세르의 반(反)목적론 맑스주의를 표현하는 듯하다. 필자 최원은 최종심급의 끝에 미래만이 남는다고 표현했다.(154쪽)

<푸코> 푸코(1926-1984)의 권력 개념은 푸코 정치철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이다. 권력은 타자를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복종시키는 힘이다. 권력은 인격적이거나 거시적이거나 억압력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권력은 모세혈관처럼 보이지 않는 망을 이루며 우리 주변 도처에 퍼져있다. 이를 보여주는 푸코의 지도가 '계보학'이다. 푸코가 나누고자 했던 지식은 광기, 병원, 감옥, 성이었으며, 그런 개념 위에서 그의 정치철학의 뼈대가 형성되었다. 필자 박민미는 푸코 철학사유의 뼈대를 아주 쉽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고고학과 계보학이 푸코의 핵심어이며, 사상의 핵심어는 권력/지식, 미시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이다. 최근 주목받는 그의 핵심어는 통치성이다."(162쪽) 주체의 형성사를 발굴하고 문제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역사적 재구성"이라고 했다. 역사적 재구성은 개인이 삶의 주체로 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고고학, 권력의 종속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계보학, 도덕 주체로 되어가는 개인을 다루는 윤리학이다.(162쪽)

세상의 사물과 관계를 경계지우는 경계선이 권력인데, 사회가 그어놓은 금기의 경계선에 도전하는 것이 푸코 정치철학의 기초이다. 푸코는 지식의 권력부터 스스로 거부한다. 지식은 권력을 떠날 수 없으며,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 지식은 권력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특정 권력이 아니라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관계 전체를 말한다. 권력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집단을 권력 안에 머물도록 강제화하는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갖는다. 권력은 대상화된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효과이다. 이를 권력효과라고 한다. 한편 권력은 저항을 산출한다. 이 점에서 권력과 저항은 역설적인 상호관계론으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효과의 위험성을 투시하고 투쟁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한다.(164쪽) 권력망을 투시하고 자신의 삶을 부단히 창안하는 자유를 동력으로 삼아 사회가 보이지 않게 쳐놓은 금기의 선을 '감히 넘어서 보라'(173쪽)는 필자 박은미의 말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들뢰즈> 들뢰즈(1925-1995) 철학에서 좌파는 소수자이다. 백인, 기독교인, 남성은 다수이며 인간을 정의하는 표준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표준에 들지 못하는 주변인의 소외는 늘어난다. 들뢰즈는 표준을 거부하고 소수자에서 새로운 생성의 힘을 발견한다. 표준에 속하는 집단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표준성에 안착하여 변화에 대한 의지나 욕구가 사라진다. 반면 소수자는 생성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발휘한다. 들뢰즈는 유명한 카프카의 사례를 든다. 땅속 줄기(뿌리)는 리좀이며, 자신은 땅속에 있지만 다른 것에 연결되어 그 다른 것을 활용하여 에너지와 힘을 생산하고 제공한다. 다양체로 번역되는 리좀은 더 위를 향해 생성의 지도를 그린다.(180쪽)

개인의 주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다른 세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체된 실체가 아니다.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뢰즈는 주름에 비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 관계가 서로 주름을 안으로 접으면서 내부성을 만들면서 ‘되어가는’ 과정이 인간의 주체화다. 이차원의 평평한 밀가루 반죽을 접으면 그때 비로소 안으로 접혀진 면을 우리는 내부라고 부르고 밖으로 재껴진 면을 외부 표면이라고 부를 뿐이지, 원래는 다 같은 평평한 하나의 동일면이었다. 내부는 안으로 접혀 들어온 외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주름이 안으로 접혀진 밖인 것처럼 말이다. 밖을 경험하면서 밖의 경험들이 안으로 차곡차곡 혹은 어지럽게 접혀져서 여전히 밖의 표면이지만 마치 안처럼 내부화된 것이 바로 인간의 주체화라고 들뢰즈는 설명한다.(182쪽) 주체는 동일성에 의해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철학을 너머서 있는 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재화된 주체로부터 벗어나는 길과 주체의 동일성에서 탈출하는 길과 같지 않다고 한다. 주체를 넘어서기 위해서 주체 안에 차이가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는 다른 것과 비교해서 만든 차이가 아니라 주름의 뒤집어진 껍질이며, 밖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의 주체이다. 변화의 주체란 주체가 변한다는 뜻이기보다는 변화 자체를 품고 있는 주체이다. 그래서 기존 관념으로 본 주체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차이가 행위의 조건이며 내적인 힘으로 형성되는 사건의 도래라고 필자 김범수는 설명한다.(188-90쪽)

차이의 내재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들뢰즈의 욕망이론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나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혹은 내 국가에 결핍된 무엇을 채우려는 목적의지와 다르다. 목적 없이 욕망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욕망인데, 들뢰즈는 이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개인에 얽매이지 않은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며 생산적이라고 필자 김범수는 말한다. 이렇게 욕망은 내재된 차이의 변화의 힘과 소수자만이 누리는 생성의 힘을 결합한다. 표준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효과에서 탈출하기 위해 욕망을 동일성의 주체로부터 걷어내도록 하는 일이 들뢰즈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랑시에르> 경직화된 이데올로기로 변한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인민 스스로의 통치'라는 의미를 이미 상실했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평등의 정치가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치안'으로 전락한 현 제도의 정치체계 즉,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체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정치 개념과 치안 개념을 구분하면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전개된다.(198-9쪽)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제안한 ‘감각적인 것의 부활’ 개념을 미학에 적용시켜 미학의 정치성을 부각시켰다. 이 시기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와 결별했다. 계몽과 지도의 노력 없이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고 필자 조은평은 랑시에르의 철학적 방법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206쪽) 이 점에서 랑시에르와 양명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랑시에르에서 개인의 성향과 소질이 다르다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지 결코 지적 능력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207쪽) 그러나 세상은 무지한 자와 유식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 "자기 무시의 늪"은 지식인에게도 두 가지 경고를 던진다. 그 하나는 지식인끼리 서로 지식의 우위를 따지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인이라는 자기 오만에 빠져 자신의 지적 능력을 뽐내는 경우이다.(208쪽) 랑시에르 표현대로 “무지한 스승”에서 탈출하여 계몽과 지도 대신에 무지한 삶에서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해방의 의미이며(208쪽), 이런 해방의 평등정치가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기초라고 필자 조은평은 설명한다.(201쪽)

정치 공동체란 각 계급이 기여한 합리적 몫에 따라 권력을 분배하도록 합의하는 공동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정치 공동체에는 불화가 없을 듯 보이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몫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인민들은 자신의 몫을 찾지 못하는 불평등이 생긴다. 여기서 계급투쟁이 생기고 공동체 질서도 깨진다. 권력자는 이런 사람들을 공동체를 방해하는 자들로 여긴다. 여기서 유한계급층은 그런 방해자를 제어하는 치안police의 정치만을 필요로 한다고 랑시에르는 지적했다. 랑시에르는 이런 불평등을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체계"라고 표현했다.(215쪽) 평등을 되찾는 것이 정치이며 민주주의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217쪽)

<프레이저> 구소련의 몰락과 좌파 사상의 동반 몰락 그 틈을 파헤치고 다양한 인정투쟁이 나타나는 시대를 포스트사회주의의 조건이라고 낸시 프레이저는 파악한다. 프레이저는 재분배 중심의 정치가 사라지고 인정recognition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재분배와 같은 경제적 투쟁 대신에 정체성의 문화적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강조하는 것이 프레이저 정치철학의 내용이다.(229-30쪽) 프레이저가 구분하는 사회적 부정의는 첫째 잘못된 분배로 인한 사회경제적 부정의와 둘째 지배적 타자 문화에 종속되거나 경멸 혹은 무시(불인정) 당하는 문화적 혹은 상징적 부정의이다.(231쪽) 여기서 프레이저는 경제적 부정의가 해결되면 문화적 부정의도 따라서 해결된다는 롤즈의 환원주의 방식을 비판한다. 물론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가 서로 모순되어 변증법적 관계라는 안티-테제론도 반대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필자 이현재는 강조한다.

여성은 경제적 부정의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문화적 부정의의 피해자인데, 프레이저는 이런 여성의 모습을 이가적 집단bivalent collectivities이라고 표현했다. 경제적 부정의의 내용인 재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폐기시켜야 하고 문화적 부정의의 내용인 불인정의 사회를 없애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강조해야 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두 가지 양면 가치를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 딜레마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4쪽) 프레이저는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이가적 태도에 대하여 긍정 해소책과 변혁적 개선책을 구분한다. 그리고 재분배 변혁을 위한 사회주의와 인정 변혁을 위한 해체주의의 결합이 서로간의 상충이나 딜레마 없이 부정의를 해소하는 개선책이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5쪽)

정치적 대표자로서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여성은 3가적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237쪽) 주디스 버틀러나 아이리스 영은 재분배와 인정의 구분이 이분법적 사고의 창조물이라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 논쟁은 우리 한국사회의 젠더 운동과 방향을 제공할 것이라고 필자 이현재는 말한다.

<누스바움> 정치철학자 누스바움은 "철학자란 무엇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철학의 통합성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도덕적 삶의 기초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여성운동처럼 근본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도록 해준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249-50쪽) 분석적이고 범주화된 누스바움의 기초적 질문은 1997년 <성과 사회정의>, 2007년 <성과 윤리학>, <여성과 인간개발: 역량개발법> 등에서 구체적인 페미니즘이론과 정치철학으로 발전했다. 누스바움의 ‘대상화’ 개념은 페미니즘 핵심개념으로 여성을(사람을)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상화의 일곱 가지 성질을 표현하면, (1)사람을 도구로 삼거나 (2)남의 자율성을 부정하거나 (3)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무력화시키거나, (4)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거나 (5)다른 사람 아무나 침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거나 (6)타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거나 (7)타인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경우이다. 레이 랭턴Rae Langton은 여기에 세 가지를 추가했다고 한다. 사람을 (8)몸으로 나아가 (9)외모로만 환원하여 판단하거나 (10)남을 아무 말 못하게 침묵시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이다.(251쪽)

삶, 육체적 건강, 육체적 통합성, 감성, 상상과 사고, 감정, 실천이성, 친밀성, 놀이, 환경 등에 관한 제어능력이 사람답게 사는 기초 역량이라고 한다. 이러한 핵심역량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특히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데 힘들어진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누스바움의 역량 개발은 국제기구나 미국 정치계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60쪽)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이런 역량들이 제한되어져 왔다. 이제 우리 사회는 역량의 최소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필자 유민석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82년생 김지영"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으며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그런 역량의 현실화가 중요하다는 점이다.(261쪽)

<아이리스 매리언 영> 잘 알려진 대로 정치철학자 롤스에서 정의는 공정성이다. 자유권 보장과 분배의 공정성이라는 두 원칙에 입각한 존 롤즈의 분배 정의론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1949-2006) 정치철학의 시발이다. 롤스의 분배정의는 개인주의, 이성 중심, 남성 중심, 원자적 개인 중심이지만, 영은 한 개인에게 책임을 몰아가지 않으며,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구조에 상관적이어서 동적이고 과정적이라고 본다. 개인마다의 차이, 집단마다의 차이를 조명하는 차이의 관점에서 정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정의론 기초이다.(266쪽) 차이를 무시한 동질화는 억압을 더 가중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래서 영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등권의 실현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적 공중을 지향하는 "차이의 정치"를 요청한다.(280쪽)

정치에서나 일상에서나 권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영은 받아들이면서, 그런 권력 망 속에서 분배논리로 파악되기 어려운 부정의가 산발되고 있음을 아이리지 매리언 영은 지적했다.(270쪽)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의를 도덕심에만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은 정의를 도덕에서 분리하여 정치적인 것으로 설명할 필요를 역설한다. 영이 비유한 “새장의 비유”는 독자에게 앞의 권력구조를 단박에 이해시켜 준다. 억압을 새장에 비유한 마를린 프라이(Marilyn Frye 1983)를 영이 인용한 것이다. 새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각각의 철사 하나하나는 새를 밖으로 날지 못하게 하는 잠금과 갇힘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철사가 서로 얽혀 연결되어 새장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되었을 때 새는 밖으로 날지 못하도록 막히게 되어 갇히게 된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는 바로 이런 새장의 구조와 같다는 비유이다.

공중, 공공성, 공적인 것이란 통일성이 아니라 복수성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영의 정치철학은 바로 그런 복수성 때문에 진보정치권에서조차 연대를 파괴하는 분리주의와 고립주의를 낳게 될 것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은 거꾸로 차이의 정치가 민주적 소통의 자원resources을 제공한다고 항변했다.(282쪽) 획일화된 정체성의 정치는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주변화시키며 구성원 모두의 동일한 이해관계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질 것을 은연중에 압박하기 때문에, 결국 파벌과 갈등, 배제의 모순을 낳는다고 한다.

영은 심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이 포괄inclusion인데, 포괄이란 토론과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거나 소수인 구성원조차도 실질적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은 주변화된 이들을 소통의 과정으로 끌어오고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286쪽) 포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학과 더불어 영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민주적 공공성을 실현하면서 구조적 부정의에 저항하고 차이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영의 차이의 정치학의 구현이라고 필자 김은주는 강조한다.(290쪽)

<버틀러> 섹스도 젠더와 같이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표현은 버틀러 <젠더 트러블>의 주요 메시지이다. 젠더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주체로서 행위자를 가정할 필요 없다고 한다. 주체는 권력이 생산하는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몸이 물질이지만 몸이 담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버틀러의 <혐오발언>(1997)에서는 우리 몸이 권력에 어떻게 지배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개인은 권력에 복종함으로써만 주체로 된다고 한다.(294쪽) 여기서 우리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지고 만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은 넘지 못할 규범을 만들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버틀러는 강조한다. 예를 들어 젠더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기를 수술하여 성을 수정하는 것, 즉 정체성의 재배치가 몸에 가해진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라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페미니스트조차도 변화된 각기의 남녀 성적 정체성에 고정되는 것을 버틀러는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의 여성 주체성 강조는 정체성 확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버틀러는 보기 때문이다. 기존 이성애적 질서를 부정하듯이 일체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버틀러는 같이 부정한다.

주체 부정의 노선으로 버틀러는 헤겔에서 벗어나는 기획에 집중했다. 최근 버틀러의 관심은 삶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사회적 조건이 그것이다. 헤겔에서 이성은 분열되었던 의식이 다시 통일되어가는 운동이다. 의식은 타자가 보는 나에서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동일성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헤겔의 동일성으로 표현된 ‘나’ 대신에 변화하고 타인과 다른 나의 차이를 본다. 헤겔처럼 분열된 의식의 통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타인마다 나를 보는 관점과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타자의 철학이 출발된다고 필자 조주영은 평가한다. 나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며, 변화에 있는 동적인 나를 정적인 무차별로 다루는 정체성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이 버틀러 정치철학의 핵심이라고 한다.(309쪽)

<하버마스> 하버마스 공영역 개념은 사적 개인들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담론행위로서 그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영역은 중세의 '과시적 공영역'과 질적으로 다르다. 근대 공영역은 공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적 인간들이 모여 생활 속의 공동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던 공간이다. 예를 들어 시장가격, 문학작품, 과학적 발견, 정치적 사건 등을 신문이나 잡지 등의 새로운 형태의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한다.(325쪽)

근대성의 주축이 되어온 이성 개념은 해체주의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을 구제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론이 의사소통 합리성 이론이다.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보는 아도르노의 자기파괴적 합리성 이론을 비판하고, 지배권력으로서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의사소통 패러다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을 구제한다. 의사소통행위 안에 들어있는 일상생활의 상호관계적 실천행위가 이성이 지닌 도구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제안했다. 일상에서 언어행위는 인간 사이의 지배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성 또한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뜻이다.(327-8쪽) 이는 하버마스 의사소통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필자 한길석은 일상언어행위의 구체적인 대화사례를 들어 그 어려운 의사소통이론을 선명하게 해명해주었다. 책에 나온 예를 보자. 말하고 듣는 일상언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1)객관적 진리성(대화 내용이 객관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 (2)주관적 충실성(대화내용이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만의 콘텍스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문제) (3)사회적 타당성(대화내용이 그들이 속한 사회집단 안에서 사회적으로 불편부당한 점은 없는가의 문제)의 여과장치를 돌리고 있다.(329-330쪽)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징적 가치와 규범으로 내면화된 생활세계lebenswelt와 체계, 즉 화폐(경제체계)와 권력(행정체계)의 조정매체인 체계System라는 두 차원을 통해 전개된다. 체계가 생활세계와 분화되고 자립화하면서,(331쪽)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의 역할은 축소되고 체계의 목적합리성이 확장된다. 이렇게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위험스런 현상을 하버마스는 경고한다. 체계의 식민지화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 환경, 반핵운동 등 시민사회의 생활세계가 이끄는 신사회운동을 확대하여 의사소통의 실천을 강화하여, 끝내 시민 차원의 생활세계의 힘이 입법과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 정치철학의 전략이다.(332쪽) 하버마스의 정치철학의 방향은 인간적 삶의 해방, 혹은 해방적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 해방적 삶을 찾기 위하여 계몽적 이성과 의사소통의 이성을 구분하고 의사소통의 합리성으로 이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한다. 소통을 통해서, 쉽지 않더라도 사회의 합리적 통합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필자 한길석의 설명이다.

<찰스 테일러> 테일러는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도덕철학의 지평을 정치에 확장시켰다.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가능한 자유를 최고의 인류성으로 보는 헤겔 <법철학>의 전체주의 사상을 테일러는 공동체 가치를 결속하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공동체 가치에서 자유의식은 중요하다.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는 다름을 테일러는 강조한다. 서구 근대화의 기저는 자유주의 가치의 확산이라고 본다. 여기서 테일러는 헤겔과 다르게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를 구분한다.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근대 세속화가 형성된다. 이런 과정을 테일러는 "탈주술화"disenchantment라고 부른다. 개인의 삶의 의미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 연관되어 있는데, 근대 이전 주술의 기능은 공동체 개인에 신념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해온 것으로 테일러는 분석한다. 즉 근대화의 탈주술화는 도덕적 지평의 상실 과정을 대신한다고 설명한다.(347쪽)

도덕적 지평이 상실되어가는 근대의 세속적 시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테일러는 "보다 높은 시간" 개념을 제시했다고 한다. “보다 높은 시간”은 도덕적 지평을 상실하기 이전의 시간이며 영원성의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시간이며, 사물의 질서가 세워진 시간이다. 도구적 이성, 도구적 합리성으로 상실된 도덕을 되찾는 일이 테일러가 말하는 <불안한 현대사회>로부터의 극복이며, 그의 정치철학의 과제이다.(348쪽) 불안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외양은 민주주의이지만 실제로는 '현대판 독재', 이 세 가지라고 쓰고 있다. 이런 불안은 결국 자유주의가 마치 자유의식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유의식을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필자 유현상은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식이란 '자기결정의 자유'인데, 자기결정의 자유는 정치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해주는 "인정의 정치"로부터 나온다고 필자 유현상은 설명해주고 있다.

테일러가 말하는 인정이란 개인의 평등한 인격적 처우만이 아니라 문화공동체에 대한 인정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북미원주민에 대한 인정은 원주민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만이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 문화, 즉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358쪽) 한국사회에서 테일러의 자기결정의 자유가 정치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동체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여 일반시민들의 사회적 연대가 필요다고 필자 유현상은 강조한다.(361쪽)

<아감벤>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Homo Sacer란 "죽여도 되지만 희생양으로는 삼을 수 없는 생명"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 탄생과 더불어 생긴 호모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자(법)가 가진 생사여탈권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었다면 근대 권력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필자 이순웅은 이런 권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호의 비극을 예로 들었는데, 세월호 승객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게 내버려 둔 비극이라고 한다. 세월호 승객들, 장기간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내 이웃으로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필자 이순웅은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통해 설명한다.(371-2쪽)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는 사회계약론자가 말하는 주권sovereignty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통치government를 통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고 한다. 주권권력이 생명권력으로 바뀌었다는 푸코의 인식을 아감벤도 같이한다. 생명권력의 행사라는 점에서 근대적 주권권력은 그 형성과정에서부터 폭력적이다. 아감벤에서 통치성은 폭력성이다. 폭력성은 비오스bios를 무시하고 물질적 신체 조에zoe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정치적 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폭력성은 근대국가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강조점이다. 오늘의 정치는 조에와 비오스 자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라고 한다. 근대 민주주의조차도 벌거벗은 생명을 통제하고 보살펴주고 관리하는 효율적 정치형태를 찾는 데에 머물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비관적인 아감벤 정치철학을 해명한다.(378-9쪽)

출생과 동시에 조에 생명이 국가의 관리체제 안에 흡수된다. 이주외국인이나 불법체류자 혹은 미혼모의 자식, 외국난민의 자식 등 이런 체제에서조차 배제되는 조에 생명의 벌거벗은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더더욱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말한다. 문제는 눈에 띄는 호모사케르 이상으로 눈에 띄지 않는 호모사케르가 더 많이 편재한다는 점이다. 조에에서 비오스의 생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렌트의 해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비오스를 되찾는 아감벤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이지 필자 이순웅이 더 보태주면 좋을 듯하다.

<지젝> 지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이데거의 주체 해체론을 비판하는 데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해체주의 존재론은 기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그 이면에 세계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용인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해체론 기반의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철학을 반대한다. 라캉철학의 거울을 통해서 헤겔의 전체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무정부주의 자치주의나 협동조합주의를 비판하고 레닌의 혁명정치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지젝의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다.(402-3쪽)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지젝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모시켰다. 즉 급진민주주의에서 혁명적 전위주의로, 계몽적인 라캉에서 낭만적이고 총체적인 정치혁명의 전위주의자로의 변모이다. 그 이유는 지젝이 본 진보진영의 자기한계에 있었다.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신자유주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즉 그들의 규칙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본다. 기존 프레임 안에 갇힌 진보진영의 투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단지 비판적 문화연구에 그치는 자기한계에 빠져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지젝이 보기에 포스트모던 정치는 고전 맑스주의의 제스쳐를 반복하거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배우의 연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필자 김성우는 표현한다.(405쪽) 예를 들어 진보진영의 포스트모던 정치이론의 전략은 문화적인 인정투쟁이나 무지개(사회주의,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연합정치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탈정치화된 경제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화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젝의 혁명정치학이다.(407쪽)

이렇게 모두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흐름을 한국의 신진철학자 16명이 한 주제씩 잡아 서술한 책이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이 책이다. 현대정치철학의 흐름을 넷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정치철학 지성계의 지도를 보는 것 같아서 서평자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관련 전공자 16인이 모여서 쓴 글이라서 통일된 문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필자마다의 글쓰기 성향이 각자 드러나면서도 일반 독자를 배려한 원고 작업이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서문에서 이 책은 대중적 입문서라고 밝혔는데, 하나 두 개 꼭지는 마치 논문을 읽는 것 같아 비전공자가 독서하기에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여기 서술된 16명의 정치철학자의 사상이 철학사 맥락에서 얽혀 있으며, 20세기 현대사 맥락에서도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정치사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더 큰 소득이었다.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이 현대정치철학자 모두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사회적 현실의식과 철학적 문제의식을 다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가 살아왔던 지난 100년을 투영한 그들의 정치철학적 대안과 주장들 모두가 마치 3.1운동 이후 한국의 100년 정치사를 반영하고 해석하는 듯해서 전율을 느꼈다. 여기 전개된 정치철학의 흐름이 남의 이야기 아니라 바로 오늘의 한국인이 겪고 있고 풀어가야 할 큰 과제라는 뜻이다. 일반 독자 분들이나 철학 전공자라도 전체 흐름을 엮어보는 분들,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정신사에 관심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끝>
e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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