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민의 서평: 비판적 생명철학
박영민의 서평,  비판적 생명철학(최종덕씀 ,당대출판사 2016), 의철학연구 22집(2016 겨울) 수록

【서 평】
  󰡔비판적 생명철학󰡕  (최종덕 씀, 당대출판사, 2016)

박 영 민(연세대학교 인문사회의학 협동과정)

최종덕의 ‘비판적 생명철학’에 대한 서평 의뢰를 받고, 생명철학에 문외한인 필자가 과연 소화해낼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책을 읽는 내내 다양한 학제 간 경계를 넘나드는 저자의 논의가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낯선 생명철학의 개념들과 최신 과학적 연구들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독서를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이 내놓은 해석들을 거쳐 발전적인 논의로 이어지는 계기로 본다면, 필자의 서평이 그러한 해석적 시도들 중의 하나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따라서 필자는 서평에서 전문연구자의 관점보다는 생명철학에 관심을 가진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접근할 것이다. 곧, 저서에 대한 전반적이고 심층적인 분석보다는, 전반적인 인상과 주요 장들에 대한 개요를 제시한 뒤, 저자의 논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서평을 구성하려고 한다.
먼저 서명에 보이는 ‘비판적’이란 수식어로부터 받은 인상에서 출발해보자. 이는 철학 자체의 비판적 성격을 의미할 수도 있고, 칸트의 ‘비판철학’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작을 살펴보면, 기존의 신비주의적 생명사상이나, 생기론, 심층생태론과 같은 생명철학 담론들을 비판하는 있다. 또한, 논리적 근거의 토대로서 칸트의 인식론을 기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는 인지과학의 성과들을 적극 수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생명철학’이란 어떤 철학을 말하는 것인가? 모든 학문에는 그 나름의 철학적 토대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생명에 관련된 학문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에 관한 학문은 ‘생명학’으로 불리지 않는다.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동질적인 대상을 지배하는 현상의 법칙을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다르게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은 하나로 규정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생명을 다루는 생물학, 의학, 철학, 윤리학과 같은 다양한 담론들이 ‘생명’에 관한 동일한 존재론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생명’이란 개념이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거나 규정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가 ‘생물철학’이 아니라 ‘생명철학’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생명을 자연과학의 일부인 ‘생물학’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겠다는 의도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개별학문이 토대로 하고 있는 생명적 현상에 대한 논의에 한정짓기보다는 생명과 연관된 담론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로 보인다. 무엇보다, 생명현상을 생물학적 토대뿐만 아니라, 사회적 확장까지 통합적으로 다루겠다는 것이 저자의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 언급되는 신비주의적 생명담론에 기초한 생명유토피아나 인간 생명보다 환경으로서의 생태계를 중심에 두는 극단적 심층생태론에 대한 비판은 이런 담론들이 생명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경시하거나 배제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자가 내면성찰과 현실도피를 옹호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주술적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반면, 후자는 사회적 제도개선과 변혁이 요구되는 현실에 눈감고 있다고 본다. 저자는 심층생태론에 대한 독일 사회학자 하버마스와 사회적 생태론자 북친의 견해에 공감하면서, 사회생태주의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153쪽) 
저자가 생명현상을 사회적인 맥락과 함께 분석하고자 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한국현실과 관련해 분명하게 제시된다. 한국사회에서 터져나오는 생명파국의 상황들이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분석되어서는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명파국적 사태들을 단순히 사회적 현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토대인 생명성의 파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유기체로서의 생명체가 겪는 생태계 파괴와 사회적 혼란상이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파악한다. 사실, 생명체에 관한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논의에서 거시적인 사회와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연관짓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구한말 이후 한국의 생명운동 사상가들인 함석헌과 장일순에 대한 논의에서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곧, 노장철학과 유학사상을 토대로 전개되는 이들의 생명사상이, 암울했던 군부 독재 시기의 치열한 반독재 투쟁뿐만 아니라 일상 속의 생명에 대한 실천적 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물론, 저자는 진화론과 인지과학의 연구들을 활용해 생명현상에 대한 실증 과학적 토대를 뒷받침하는 시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결국 저자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은, 생물학적 진화론과 인간행동과 정서에 대한 인지과학적 연구들에서 비롯된 생명현상에 대한 해석들이 어떻게 사회적 맥락과 연관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저자가 서두에서 제시한 ‘생명의 사회 확장성: 사회로 확장된 생명’이라는 화두가 기존의 생명철학과 어떻게 다르며 새로운 녹색사회를 향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지 세부적인 논의를 통해 확인해 보려고 한다. 책의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전반부에서는 ‘공감’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생물학적 공감에서 사회적 공감으로의 확장을 다루며, 후반부에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생명 파국 현상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공감이 인간 행동의 양식임과 동시에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공감이 사회적으로 학습되거나 정서적 반응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진화의 행동형질 중 하나라고 파악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스 요나스의 직관적 도덕주의의 토대인 선천적 도덕심도 생명 자체의 본성임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의 생명파국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까? 저자는 공감이 긍정적인 면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소집단 내에서의 폐쇄성을 초래할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이타심과 함께 이기심도 생명체의 본성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따라서 공감과 선한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이라는 전제에서 저자는, 공감이 발현되는 상황 의존적 맥락에 초점을 맞춘다. ‘감춰진 공감’과 ‘드러난 공감’이라는 대비를 통해, 공감능력이 선천적으로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더라도 발현될지 여부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우드러프의 마음이론과 리졸라티의 거울신경계 연구와 같은 인지과학의 관점과는 다르게 공감의 문제를 바라보고자 한다. 타인에 대한 감정을 인지하는 과정에 대한 뇌신경과학의 연구들을 통해 공감의 인지적 측면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생물학적 공감이 사회적 확장을 위해서는 문화적 공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권력집단의 공감성 결핍과 같은 사회병리적 현상들이 인지과학적 연구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저자의 논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48쪽)
요컨대 공감의 사회적 확장에서 바라본 “생명파국의 심리적 기반은 소집단적 이기심과 개인의 욕망이며 분화의 방식은 불통과 독단의 방식이며 그 전략은 기만과 은폐의 무임승차론이다.”(99쪽) 이는 회색사회로 저자가 규정한 한국사회의 권력소집단, 동반기만 집단, 광기의 집단에 대한 생명철학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의 조직적 진실 은폐와 국민들 간의 정서적 분리주의가 극에 달했던 세월호 참사 이후 상황에서 어버이연합과 극우지식인, 일베와 같은 집단들은 이러한 폐쇄적 공감성이 사회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4대강 사업의 경우 용수확보라는 기만적 정책으로 포장한 경제적 탐욕을 위해 온갖 불법 속에 자행된 생명파괴시도가 정부와 재벌, 이에 편승한 어용지식인들의 결탁으로 자행됐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1000조를 넘어선 막대한 가계부채라는 일견 정치경제학적 문제도 생명파국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는 생태계를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경제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부동산 투기라는 광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의 현실이 생명파국의 사태와 다를 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회색사회에서 저자가 바라는 녹색사회로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먼저 저자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생명담론들의 실태를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들이 모두 생명의 존재 근거를 외부에서 찾는 공통점을 갖는다고 비판한다. 즉, 개인의 기복신앙과 유사한 신비주의가 불로장생의 영약을 추구하거나 영성이나 우주적 생명담론에 함몰되는 점을 비판한다. 무엇보다 영성과 우주론적 심층생태론과 사회적 실천을 토대로 한 사회생태론의 변증법적 대화를 모색함으로써 대안적 생명철학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이원화되어 상충관계에 놓여있던 지난날의 생명운동을 극복하면서 노동과 환경이 생태변증법의 구도 속에서 동일한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녹색사회의 생명철학이 적용될 구체적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유전공학, GMO, MSG, 기후변화와 관련된 과학적 연구 성과들과 이와 관련된 생명윤리와 관련된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오늘날의 철학이 과학적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저자가 인용한 아도르노의 ‘슬픈 학문’은 과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생명 없는 사회에서 철학이 느끼는 무기력감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통제와 예측 불가능한 위험성을 드러내고 있는 유전공학의 시대를 회피하지 말고, 철학이 적극적으로 과학을 수용해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함석헌과 장일순으로 대표되는 한국 생명사상의 역사에 대해 조명한 의도가 보다 분명해 진다. 바로 생명사상이 개인적 은둔이나 명상, 철학적 담론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역사적 경험을 오늘날 잊지 말고 되살리자는 것이다.
저자의 논지에 대해 들었던 의문점과 논리적 구성에 대한 비판을 정리해 보면서 서평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에 대한 평가를 통해 당시의 문명비판론과 이성비판이 철저하게 이성적 기준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에는 의문이 든다.(150쪽) 포스트모더니즘의 규정 자체가 영미 학계의 규정일 뿐만 아니라, 푸코의 경우 광기의 역사를 비롯한 이후 저작들은 실제로 서구적 이성과 합리성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는 저자가 공감의 인지적 측면을 통해 사회적 확장을 꾀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이성이 어떤 토대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뇌신경생리학을 토대로 한 인지과학이 칸트의 인식론적 통찰과 깊은 연관을 가졌다고 본다면, 저자의 인지적 측면에 대한 적극적 옹호는 프랑스 인식론 전통에서 수행했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일 수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한 동일한 신뢰를 기반으로 했던 것일까? 과연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지적했던 이성에 의해 배제된 역사들의 이면을 추적하는 작업의 의미와 맞닿는 지점이 인지과학에서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한국 사회의 구한말 이후 생명담론의 역사가 서구 제국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면, 오늘날 한국 학계의 이성과 합리성이 서구 학문의 그것과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푸코는 자신의 스승 깡귀엠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서문에서 이 점에 대해 지적했다. 즉, 서구적 합리성이 보편적인 타당성을 가졌다고 주장할 권리가 어디 있는가를 서구를 향해 따져 묻는 운동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를 통해, 저자가 근대과학이 생명담론들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갖는 양가적 의미가 명확했던 것인지 재검토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뉴턴으로 대표되는 근대과학이 반생명적 사회적 파국 현실에 일조했던 측면이 있다고 판단하는 한편, 신비주의적 생명담론이나 심층생태론들이 근대과학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뉴턴의 연구가 가졌던 생명현상에 대한 불가지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즉, 수학화된 추상적 자연에 대한 역학적 연구에 매진했을 뿐인 뉴턴에게 생명현상까지 포괄하려는 기획이 없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뉴턴의 개별연구가 이미 당대의 사회적 요구들에 충실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과학지식 체계가 사회적 담론과 무관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뉴턴의 지식체계가 포함되어 있는 오늘날의 과학이 현대의 생명파괴 양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순수한’ 자연과학적 연구에 대해 강조했던 것은 자칫 근대과학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 아닐까? 프랑스 과학사가였던 조르주 깡귀엠이 ‘과학’과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을 상호 간에 보다 밀접한 관계 속에서 파악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깡귀엠의 분석은, 저자가 주장했던, 철학이 과학을 수용해 적극적으로 생명윤리의 담론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기획과도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과학적 이데올로기로서 어떻게 출현했다가 사라져갔는지를 추적했던 깡귀엠의 작업은 오늘날의 유전공학과 생명과학의 담론들에 철학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시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저자의 논지 전개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개념들로 인해 독자로서 흐름을 파악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이 점은 필자가 생명철학 전반에 관해 견문이 좁은 탓도 있겠지만, 저자가 비판하려는 점괘와 운세와 같은 사회적 신비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언급되거나(124쪽), 심층생태론과 영성생태론, 사회생태론에 대한 별도의 개념설명 없이 논의 속에 갑자기 도입되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유토피아라는 개념규정으로 포괄하는 다양한 생명담론들이 분명 공통된 점을 가질 수 있겠지만, 신비주의와 심층생태론과 영성생태론이 모두 포함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생태변증법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심층생태론이 이들과 어떤 차이점을 갖기에 대화상대자가 되는 것인지도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136-138쪽) 심층생태주의의 네스와 세션즈가 정리한 강령 8항에 따르면 이들이 사회적 정책 변화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정책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질적, 내재적 가치에 관심을 갖고 인간적 오만을 경계하며, 무엇보다 인간주의적 기획이 갖는 위험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회생태주의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가 저작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154쪽) 생태변증법의 대화상대로서 심층생태론과 사회생태론이 만나려면, 양자간의 차이가 보다 세부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로지 인간이성과 합리성을 토대로 이 모든 것들이 해결가능하다고 믿는 것인지, 인간의 과도한 간섭과 적극적 개입이라는 근본적 관점의 차이가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해결될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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