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주의에서 본 연결주의
1994 논문: 생물학주의에서 본 연결주의, HCI 94 3권1호, 1994년 2월, 49-58쪽

생물학주의에서 본 연결주의


Connectionism in the Light of the Biologicalism

<요약> 기호표상주의 패러다임과 반대로 연결주의 패러다임은 체계구성체의 구문론보다는 의미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유사두뇌구조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연결주의는 기호표상주의에 대한 소극적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비판에 대한 이차대안으로서 생물학적 접근을 통하여 연결주의에 대한 인지철학적 모색이 요청된다.

1. 문제제기

수학과 관련하여 인공지능의 시효는 1950년 튜링테스트를 통해 인간과 계산기능의 기계가 어느 정도의 유형성 혹은 차이성을 갖는가의 문제제기로 부터 출발한다.  폰노이만은 계산기계의 자체재생산 기능을 연구하였다. 물론 이 문제는 지금까지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열려진 문제로 남아있다. 인공지능의 본격적인 논의는 1956년 다르트마우스에서 열린 학회에서 존 맥카아티(John McCarthy)가 인공지능 시스템의 특성을 정형화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출발된 인공지능 논의는 주로 인지체계가 세계와 대응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보는 기호표상주의의 모델에서 이루어져왔다. 이러한 모델을 통한 인지과학은 철학적으로 보면 환원주의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되어 왔다. 최근 기호표상주의 모델의 한계를 지적하고 연결주의 모델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으나 그 연결주의 모델도 환원주의라는 전통적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서 기술적 문제해결의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가는 재고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공지능의 대조적인 두 모델이 환원주의의 패러다임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를 비판적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2. 기호표상주의의 한계와 연결주의의 실상

맥카아티의 인지모델 체계는 다음의 세가지로 형식화할 수 있다.

1) 형이상학적 요청 : 시스템은 세계의 표상을 가져야 하며, 세계를 조작
  하고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2) 인식론적 요청 : 표상의 핵심은 논리적 추론으로서 문제해결을 확보할
  수 있는 형식론에 있다.
3) 발견적 요청 : 형식론의 프로그램은 일정한 탐구전략을 통해 체계적으
  로 발견되어지거나 혹은 연역논리를 통해 체계적으로 증명되어질 수 있
  도록 만들어져야만 한다.

이 세 가지 요청에서 나타난 내용은 결국 ‘기호표상의 가설’(Hypothese der symbolischen Repraesentation) 의 규칙을 따른다. 이 가설은 결국 실재세계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가능성이라는 전제에 의존한다. 지능체계는 세계에 대한 어떤 유사-심적 모델이다. 대상들의 구성체와 대상들의 관계는 세계의 단위들을 표상해야만 한다. 물론 이 관계를 인간은 자연언어로 기술해야 한다. 즉 형식대수적 모델로 형식화시켜야 한다. 즉 지식은 기호조작을 통해 임의의 방식으로 두뇌에 저장된다. 이러한 표상체계의 기호는 인간에 의해서 해석된 부호로 나타나는 의미론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표상체계내에서 기호는 실제로 순수 구문론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기호표상에서 말하는 의미론은 기능조작주의 범주 안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여기서 구문론적 체계는 실재계에 대한 그림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비트겐슈타인이 정형화한 태도이지만, 철학사적으로 볼 때 플라톤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향방과 관련하여 기호표상주의 모델은 세계에 대한 이성적 재구성주의의 한 단편이다. 세계에 대한 이성적 재구성으로서의 인공지능 연구모델은 다음의 다섯가지 전제에서 시작한다.

1. 객관적 세계는 인간정신과 독립적이다.
2. 인간은 기본적으로 객관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3. 인간 두뇌의 인지결과는 실재계를 암호로 그린 기호형식으로 나타난
  다.
4. 인지 메카니즘은 이러한 기호들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5. 실재에 대한 인식과정은 이성적 방법을 따른다. -  이러한 생각은 미
  세규모의 인식단위의 존재를 전제하며 동시에 그러한 인식단위로 구
  성된 모든 지식의 재구성가능성을 전제한다.

재구성주의자들이 보는 기호표상 모델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의 입장을 고수한다. 여기서 환원주의는 개념 환원주의를 표방한다. 개념 환원주의는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본 정의(definition)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상위개념을 그 토대가 되는 하위개념을 통해 기술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환원주의는 인공지능의 기술과학적 연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 기술전문 연구에 필요한 철학적 연구는 존재론적 환원주의이다. 즉 뇌신경세포 구조에 대한 물리적 환원이 이루어져야만 과학기술전문가들이 만족할 수 있다. 물론 물리적 환원에 대한 연구는 개념 환원주의와 분리시켜 논의될 수 없다. 그러나 개념 환원주의가 물리적 환원주의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보충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끊임없이 연구되어 왔다. 즉 기호표상주의 모델로서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완전히 밝혀 낼 수 없다는 인식이 들면서 새로운 모델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모델은 인지 메카니즘이 기호들의 계량적 합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을 수정하였다. 그 새로운 수정은 기호단위 하나하나가 고유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으로 방향지워졌다. 기호단위 하나가 고유한 의미론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호군만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기호군 또한 다른 기호군과 연계성 속에서만 의미가 확보된다. 이러한 대안 모델을 우리는 연결주의라고 부른다.

기호표상주의 패러다임과 반대로 연결주의 패러다임은 최근에 논의되기 시작한 것으로 체계구성체의 구문론보다는 의미론을 중시한다. 두뇌의 기능과 관련하여 연결주의에서는 인지기능을  단위계산기의 보조로서 인지능력의 모델과 대응적인 표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위계산기의 연결망 체계에서 발생하는 자동확장 기능으로 간주한다. 그러면 연결주의는  요소환원주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연결주의 모델을 곧 옴살론적 인지모델(holistic cognitive model)로 보는 일반론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일반적인 논의와 다른 관점에서 연결주의를 보고 있다. 여기서 연결주의도 전통적 기호표상주의 모델에 대한 보조모델이라고 본다. 기호표상주의에서 연결주의로 발전되는 과정은 비트겐슈타인의 기호표상적 전기철학에서 실용주의적 후기철학으로 넘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개념 환원주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기체 상황에서 그 한계가 명백하다.

쉽게 이야기해서 컴퓨터를 아무리 많이 개량해도 작은 인간두뇌의 창조적 기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결주의는 인지시스템의 대응관계를 포기하고 기능과 인지조작 사이의 결과론적 해석을 실용적 관점에서 내린다. 따라서 현재까지 연결주의는 기호표상주의에 대한 소극적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서 자연과학이라는 행위패러다임 속에서 환원주의를 약하게나마 거부하는 연결주의의 입지는 아직까지는 약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연결주의를 비판한다거나 아니면 어느 하나를 옹호하려는 입장이 아님을 밝힌다. 필자는 오히려 연결주의 패러다임을 어느 선까지 옹호하지만 그 한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호표상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복제두뇌에까지 두고 있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만 어렵다고 말한다. 반면 연결주의자들은 상징표상주의의 기본가정을 비판한다.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는지 살펴보면서 그 비판적 대안이 타당한가를 검토한다.

첫째. 가능한 인공지능체계가 있다고 하자. 그 인지체계는 철저하게 기호표상 모델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고 하자. 여기서 그 체계는 무엇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인지의 주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이때 인지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인공지능에 있어서 그 주체는 아주 묘연하다. 물론 이 난제는 철학적인 문제로 국한될 수 있지만, 이해의 개념은 차제하고서라도 인지 혹은 인식주체의 문제는 컴퓨터의 자기복제 기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미래의 과제가 될 것이다.

로보트 인공지능이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대상을 인지하여 그 기능을 완수한다고 해도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지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인식주체는 의도된  프로그램 작성자이며, 그 인공지능은 과정적 인지체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상징표상주의는 근본적으로 과정적 부호주의(codinalism)일 뿐이다. 과정적 부호주의는 개념 환원주의의 필수조건이며 물리적 환원주의의 계량화를 위한 개념적 도구이다.

둘째. 문제는 물리적 환원주의가 유기체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데 있다. 생물학주의의 기본전제가 도입되지 않고서는 인지과학의 토대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19세기 중반부터 생물학주의에 대한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주의는 Elan vital의 생기론과는 다른 입장이다. 생기론은 이미 중세 때부터 있어온 신비주의 패러다임 안에서 논의되어 왔다. 반면 현대 생물학주의는 인지체계 운용의 논리를 추구하면서 과학의 범주에서 논의한다.

칸트 이후의 현대철학은 객관세계의 존재와 그 인식가능성을 비판적으로 문제삼고 있다. 마투라나(Maturana)는 인간의 인식능력이란 신경세포의 기능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해하려는 능력은 감각기관의 능력에 의존되며 객관적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한 유기체는  실재계에 대한 표상이라기 보다는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체계로서의 자기조직적인 체계이다.

세째. 연결주의는 기호표상주의 모델에 의한 인지체계를 닫힌 체계로 보면서,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열린 체계의 조작가능성을 시도한다. 닫힌 체계란 결국 연역체계를 직접적으로 함의한다. 그러므로 그 체계를 조작한 공리적 성격의 회로망에 의해서 이성적 추론에 의한 결과치를 획득할 수 있지만 외부의 환경변화를 읽어 낼 수 없는 약점을 지닌다.

두뇌의 인지구조는 당연히 연역체계가 아니므로 연결주의자들은 두뇌의 인지구조를 열린 체계로 간주한다. 이 점을 인정한다해도 두뇌의 인지구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즉 두뇌구조와 유사한 인공지능을 만들려고 할 때 유사 인공지능을 열린 체계로 시도하는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수 있다. 열린 체계의 기본구조는 기존의 기호표상적 전제로 만들어진 전기회로망을 통해서는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닫힌 체계와 열린 체계에 대한 좀더 세밀한 분석을 요청한다.

닫힌 체계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선형구조이며 다른 하나는 비선형구조의 닫힌 체계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을 때 혼동이 온다. 선형적 닫힌 체계는 일반적인 계산기능의 인공지능체계를 말한다. 전형적인 연역구조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환원주의를 따르는 구조이다. 반면에 비선형적 닫힌 체계는 외형적으로 열린 체계와 유사하나, 동일 조건을 스스로 반복하는 닫힌 회로이다. 즉 이것 역시 인과성이 조금은 복잡하기는 하지만 기계론적 결정론의 구조이다.

콤퓨터의 되먹임(feedback)구조가 그 전형이다. 그런데 되먹임 구조는 고정비율의 지수를 갖는 주기배가(period doubling)의 구조일 뿐이다. 최근 카오스 이론에서 논의되는 프랙탈 현상을 수학적 형식화를 이루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기능이다. 물론 카오스 현상은 고정비율의 지수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기 단계의 되먹임 구조로는 카오스 현상을 설명해 낼 수 없다. 다행히 최근에는 상위기능의 보조프로세서가 나옴으로써 카오스 현상에 대한 접근이 크게 용이해졌다. 이 문단에서 말하려는 요점은 대부분의 경우 닫힌 체계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면서 나온 열린 체계에 대한 인공지능이 실제로는 비선형적 닫힌 체계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다. 선형적 닫힌 체계와 비선형적 닫힌 체계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류이다.

그리고 열린 체계에도 두가지 방식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하나는 수렴의 열린 체계이며 다른 하나는 발산의 열린 체계이다. 수렴적 열린 체계의 대표적인 것이 생명을 갖는 유기체이다. 그리고 발산적 열린 체계의 대표적인 것은 자연이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우주이다.

(설명 주: 우리의 우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주도 발산적 열린 체계가 아니라 독특한 의미의 닫힌 체계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 이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논지와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지면에서 다루기로 한다.)

여기서 수렴의 열린 체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렴의 열린 체계는 외형적으로 보아서 비선형적 닫힌 체계와 유사하다. 물론 수렴의 열린 체계는 비선형 구조를 포함하지만 기본적으로 닫힌 구조가 아니다. 최근 생물학주의에서 말하는 유기체의 자기조직성(Selbstorganisation)은 수렴의 열린 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이다.

앞서의 세가지 문제는 결국 1)인간두뇌의 인지구조가 연결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여 실제로 그것이 내용적인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과 2)인간두뇌와 유사한 지능체계를 기술전문적으로 재구성할 때, 연결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여도 실제로 열린 체계가 아니라 비선형적 닫힌 체계를 시도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호표상주의와 연결주의는 매우 다른 철학적 입지를 갖지만, 기술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기호표상주의 모델과 연결주의 모델은 동일한 결정론적 닫힌 체계이며 단지 그 복잡성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그 둘은 결국 이성적 재구성주의의 범주 안에 있으며, 단지 후자는 전자보다 두뇌유사구조를 실용적인 측면에서 좀더 유사하게 기술(discription)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술과학에서는 그 장점의 차이는 매우 큰 차이를 낳게 될 수 있다.  인지과학에 있어서 철학의 위상은 원리만을 제시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인지과학의 철학은 기왕에 접목과학(interdisciplinary science)으로 나섰기 때문에 자연과학적 기술전문성의 문제상황을 비록 간접적이지만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앞선 세 문제를 철학적인 방향에서 종합한다면, 결국 연결주의 모델도 불완전한 기술체계이다. 그렇다고 그 시도를 포기할 것인가? 문제는 열린 체계에 대한 과학화가 가능한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칸트라면 불가능이라고 단정지을 것이다. 그의 입장은 이성적 재구성주의로 한계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가 서구과학을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성적 재구성주의에 머무르고자 하지 않는다.

현대과학의 패턴이 물리학주의의 패러다임에서 생물학주의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지과학이 그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생명계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지과학에 대한 연구를 기존의 물리학주의 패러다임에 국한할 필요가 없다. 같은 연결주의 탐구프로그램이더라도 물리학주의가 아닌 생물학주의 패러다임에서 시도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여기까지 이 글이 의도한 논지를 다 말한 셈이다. 이에 생물학주의 패러다임 안에서 연결주의 모델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유기체에 대한 기본특성을 부가하여 말함으로써 논지의 사족을 단다. 그러나 인지과학 연구에 있어서 앞으로는 사족에 그쳐서는 안될 중요한 연구프로그램으로 등장될 것이라고 본다.

3. 유기체의 복합성
     
부분과 전체 혹은 개체와 환경은 자체변화와 자기갱신을 통한 임의의 상호관계를 끊임없이 주고 받는다. 그러나 그 상호관계는 선형적으로 기술할 수 없으며, 개체를 하나의 닫힌 체계로 설정해서는 결코 그 상호관계의 본질을 찾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호관계는 관계가 다시 관계를 함수화시키는 자기복제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개체로서의 유기체는 닫힌 체계가 아닐 뿐더러 자기 스스로 변화와 생성을 찾아가는 열린 체계이다. 그러나 그 열린 체계는 개체와 외부와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계는 분명히 있으면서도 개방되었다는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물음은 수렴의 열린 체계를 이해하는 핵심이며, 자연과학에 근거하여 그 가능한 대답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대답은 생명체의 복합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유기체는 고도의 복합적이고 그 자체로 안정된 작용구조를 갖는다. 그중에서도 두뇌구조는  더욱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의 두뇌구조의 질서는 그것의 극단적인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복합성을 통해 나타난다. 종래의 과학적 인식론의 의미에 있어서는 그 복합적 현상을 완전히 기술해낼 수 없었다. 복합성의 연구에 있어서 자연과학은 물론이거니와 정신과학적 탐구방식도 부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합은 인지과학의 과제를 헤쳐가는 데 있어서 새로운 지표를 제시할 수 있다. 물론 복합적 현상은 과학철학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자연과학에 있어서 객관적 인식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한 질문과 관계된다.

유기체의 복합성은 두 국면을 보여준다. 구조적 복합성과 기능적 복합성이다. 생명체의 구조계층 즉 세포에서 기관을 거쳐 개체에 이르는 구조의 각 계층은 그 상위의 계층에 의해 하위계층이 질서화된다. 물론 그 구조계층이 보여주는 질서는 고정적인 반면에 세포의 질서는 역동적이다. 세포의 역동적 질서는 다양한 생명기능을 견지하는 목적을 갖는다. 우리는 밑에 깔린 역동적 질서를 기능적 질서로서 설명하며, 그것의 다양한 구조계층의 복합성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기능을 기능적 복합성이라고 한다. 유기체에 있어서 특별한 것을 구조적 복합성으로 기능적 복합성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기체의 기능적 질서는 분자적 구조와 초분자적 구조(hypermolekularen Struktur) 간의 위상적 상호작용이다. 이 상호작용을 내재적으로 보지하는 정보는 자기생산적 방식을 통해 유지된다. 이 정보는 특별한 방식으로 생물학적 거분자에 의해 입력된다. 그것이 핵산이다.

핵산은 긴 사슬구조로 뉴크레오티드라는 기본구성물로 성립된다. 그 화학적 명칭은 첫자를 따서 A,G,C,T로 구성된다. 이 네 구성체로서 한 단위 유기체의 기능이 설명되는데 여기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구성체들로 된 유전자적 정보는 단지 구성체의 환원적인 구문론적 합성(syntaktischen Aspekt)에 의한것이 아니라 의미론적 측면(semantischen Aspekt)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즉 구조를 통해 기능이 설명되지 않는다라는 점이다.

보통 최소의 유전자 정보를 갖고 있다는 박테리아의 유전자 정보의 경우 그 수가 대략 400만 이상의 기본구성체이다. 이러한 엄청난 수의 기본구성체는 동시에 자신의 변이의 폭(variationsbreit)을 갖는다. 그 변이의 폭 N = λ≃ 이 적용되는데 여기서  핵산 λ=4 의 경우 N은 4의 4백만승이며 대략 10의 240만승 정도이다.

결국 박테리아 유전분자 속의 잠재적인 정보가능량은 상상을 초월한 크기이다.  그것은 전역사적인 진화적 선택을 통해서도 결코 다 써볼 수 없는 큰 양적 크기이다. 우주의 기본입자의 숫자의 수는 10의 80승 정도이고 우주의 나이는 10의 40승 초(sec) 정도이다. 그러면 우주 시초부터 존재가능했던 모든 과정의 수는 10 의 80 승 곱하기 10의 40승 해서 10의 120승 정도이지만 10의 240만 승에 비교하면 아주 미세한 일부밖에 안된다.

결국 생물학적 경계조건 즉 의미론적 조건들은 물리적 경계조건의 순수물질적 측면을 넘어서 있다. 이 점을 인지과학 연구자들은 분명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유기체의 생물학적 경계조건은 DNA와 같은 생물학적 거분자에 의한 물질적 구조와 더불어 기본구성체의 특별한 배열을 통해 생긴 정보를 포함한다. 특히 두뇌구조와 같은 생물학적 정보는 물리적 경계조건이 도달될 수 없는 연속적 연장선 위에 놓여져 있다. 이 사실을 필자는 수렴적 열린 체계라고 한 것이다.

정보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해야 한다. 정보개념은 복잡성 개념을 위한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한 생물체의 뉴클레오티드의 배열에 의한 정보는 4가지 뉴클레오티드의 구조적 배열에 의존된다고 지금까지 믿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구조정보를 갖는 두개의 거분자가 완전히 다른 생물학적 행태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뉴클레오티드 A와 같은 단 하나의 뉴클레오티드로 구성된 DNA는 동일한 유전자 사슬의 길이를 갖어도 상이한 구조정보를 갖는다. 그 상이성은 다른 유전자 배열로 생긴 정보의 상이성 이상으로 다를 수 있다. 정보자의 비규칙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물질대사를 야기시키고 그것이 다른 정보를 낳게한다. 이 점이 바로 당연히 기호표상주의 모델로는 두뇌의 인지구조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다. 

물리학주의 혹은 작게 말해서 기호표상주의의 의도는 현상 속의 자연의 보편적 질서원리를 법칙 혹은 인과율로써 재구성해보려는 데 있다. 자연현상의 법칙적 파악은 현상에 의존된 관찰자료의 복합성을 그 일차자료로 한다.  즉 그 복합적 현상을 가능한 한 대수적으로 환원시키는 작업이다. 자연과학은 그러한 대수의 환원을 목표로 한다. 대수화된 자연의 현상은 근본적으로 복합성의 예측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푸는 열쇠를 준다.

이러한 대수적 환원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은 오히려 그러한 시도가 필요하며 전통적인 측면에서 본 과학은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두뇌와 같은 극단적인 복합구조에 대한 연구프로그램에 있어서  대수적 환원의 한계는 분명하다. 기호표상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물리학주의 영역 안에서의 연결주의도 수렴의 열린  체계를 향한 방법적이고 과정적인 단계로서 그 역할의 의미를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 위에서 생물학주의라는 진보적인 상위의 연구프로그램을 수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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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I 94 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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