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성동이론>에 대한 논평-생태적 인물성론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1998년 학술발표회, 1998년 6월 27일

최영진 발표 <인물성동이론>에 대한 논평

생태적 인물성론




일개미 군집에서 일개미 모두가 일만하는 것이 아니라 60%만 일하고 나머지 40%는 일을 안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읽었다. 그래서 60%와 40%를 분리해 놓으면 그와 동시에 분리된 일했던 일개미들과 놀던 일개미들 각각의 소군집에서 자동적으로 일하는 일개미와 노는 일개미가 다시 60%와 40%로 나뉘어 진다는 것이다.

그들 각각의 소군집에서 왜, 어떻게 동시적으로 나뉘어지는지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그들 사이의 화학물질 교환을 통해서 자동 역할 분담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현상은 미시적인 자연의 생태계를 보여 주는 한 실례이지만 거시적인 측면에서도 우리의 자연은 온통 하나로 묶여있는 생태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인물성동론의 자연학적인 해석으로 여겨진다.

20세기 서구의 환경위기는 단순히 물질적 오염위기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그 사상적 원인처방을 내리는 몇가지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약방의 감초처럼 끼는 데카르트의 이원론, 기계론적 자연관 그리고 인간중심주의라는 범주개념으로서, 환경위기의 사상적 주범으로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것들은 근대 서구의 과학문명과 시민사회의 꽃을 피우게 한 결정적인 사상적 배경이지만, 사람이 사람처럼 살고 자연이 자연처럼 살게끔 나두지 않는 요인을 만들어 준 것도 사실이어서 그렇게 무차별 공격받아도 싸다.

서구사상사에서 그 공격의 주체는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타났고, 그 중의 환경윤리학에서는 생태주의로 나타났다. 생태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주의를 부정하는 실천적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였고, 그 내용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된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서구인에게 포스트모더니즘과 생태주의는 처절한 자기구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유럽의 기독교계도 마찬가지로 자기구원의 방식을 하늘에 치우친 것을 조금씩 지양하면서 땅의 요소가 가미된 환경운동을 수용하면서 현실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7-28절에 대한 해석을 인간과 자연의 이원화된 권력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로 보는 시각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서구의 환경위기 혹은 문명위기 극복프로그램은 여전히 철저한 유럽의 자구책이며 이에따라 서구가 동양적 생태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조차도 중심을 찾으려는 시도이며 그중에서도 인간중심주의는 여전히 그들의 기반 패러다임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 그리고 생명중심주의 등은 철저히 산업화된 오늘의 인간위기를 극복하려는 서구중심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그래서 서구사상에서 보는 자연과 생명의 내포된 뜻은 동양철학에서 보는 것과 차이를 갖는다. 서구사는 인간이 그 안에 포함된 자연이거나 아니면 무생명의 기계성을 거부하는 생명이거나 대상화된 개념으로 남는다.

그러나 동양에서 말하는 자연과 생명은 대상화시킬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렇게 스스로 있는’ 아니면 ‘그로부터 그렇게 있는’ 자연한 것이다. 중심이 없지만 분수되어 항상 어디에나 나와 함께 있어 어느새 자연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생명인지 무생명인지 모르지만 바로 모든 것이 생명아닌 것이 없는 그런 자연함이다. 모습이 이러하니 서구 지향의 명사적 개념에 이미 물들은 우리들 조차도 동사적 기틀(機)을 이해함이 어렵게 된 이유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상적 불시착이 바로 오늘의 우리와 같이 무차별 잘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쳐댄 아시아 개도국의 환경위기를 자초한 연유가 되기도 한다.

유가의 프로그램은 중심이 없는, 그렇지만 중심이 주변에 모두 녹아있는 무중심의 중심을 찾아 나서는 인간학이라고 보고 싶다. 서구 근대철학의 전부인 경험론과 합리론의 논쟁은 멋있다고 보면서, 그에 버금가는 논쟁을 보인 성리학의 주요논변인 인물성동이론을 공리공담으로 돌리고 싶은 서구의 명사 지향적이거나 일제의 충실한 제자로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대충 이해하겠지만, 발등에 떨어진 환경위기의 불을 끄는데 다양한 대안 중의 하나로서 동양철학을 수용하는데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갖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인물성동이론과 생태론의 연대연구는 매우 독특하다고 여겨진다.

지금까지 환경과 동양사상의 연결고리는 주로 한결같이 주역, 화엄경, 원시유가, 노장자 사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전형화된 연결고리의 시작은 불행하게도 동양인이 한 것이 아니라 1974년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를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된 카프라에서 부터이다. 필자의 논문은 아마도 이런 카프라의 틀에서 벗어나 성리학의 주제를 갖고 생태주의를 다룬 처음의 논의라고 생각된다. 이 논평은 단지 그의 글을 보충할 뿐이다. 그래서 몇가지 더 이야기하려고 한다.

필자가 인물성동이론이 ‘物’에 대한 논쟁이라고 했듯이 물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차이를 낳는다. 여기서 물은 ‘things'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은 格物致知의 만남이다. 격물은 물을 대상화하여 대물렌즈에 놓인 피관찰체로 간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사람의 만남을 의미한다. 물과 사람의 만남을 바로 事物이라고 한다. 이 뜻은 물을 사하는 것, 다시 말해서 물을 대하는 사람의 동사적 장르를 말한다.

즉 1)사람과 2)대상적 물과 3)그들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틀로서 포괄하는 개념이 바로 사물이며 격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물성동론이거나 인물성이론이거나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 생각은 이미 필자도 이야기하였다. 이 문단에서 할 말은 인물성동이론 그 자체가 자기논쟁 이외에 서구 식의 인물격리 차원이 아닌 인물화해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心의 문제다.

필자는 ‘天地之心’을 천지가 만물을 낳으려는 목적의식으로 해석하였다. 물에도 이미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생명주의를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필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렇게 하면 심과 물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되므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전과를 다시 밟을 수 있다. 목적론의 시조라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목적은 분명히 물 안에 들어와 있지만 물과는 다른 격리차원의 존재자이다. 이를 보통 Unmoved Mover라고 한다. 자신은 운동하지 않지만 다른 모든 것을 제어하고 따르게 하여 운동시키는 존재를 뜻한다.

이렇게 또 하나의 존재를 양산하게 되어 형이상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서구의 역사를 보아 왔다. 이는 혹시 존재의 양산을 거부하는, 혹은 서구식의 저멀리 있는 (there is) 존재를 거부하거나, 하나의 이 혹은 기로 묶으려는 동양철학 일반의 논지전개와 약간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저는 필자의 다른 연구작품에서는 이런 입장이 아닌 것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에 대한 보충의 설명을 우리들에게 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진짜 물음은 다른 데 있다. 심을 이렇게 도입하면 필자의 원래 의도와 관계없이 필자의 심의 해석을 ‘옳다구나’ 하고 애니미즘의 신비주의로 해석하려는 반성없는 사람들이 많이 나선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교통정리를 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회생태학자로서 명심해야 할 경고를 던진 북친(Murray Bookchin)의 말은 이에 적절한 거울이라고 본다. 자신도 모르게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생태운동은 사회적 구원과는 관계없는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생태주의는 개인 보신주의일뿐 오늘의 위기상황을 더 부채질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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