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상상력과 동아시아 인문학의 과제
001 논문 : 생태학적 상상력과 동아시아 인문학의 과제, 상지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인문학 연구 창간호(2001년 8월 1일) 283-299쪽

생태학적 상상력과 동아시아 인문학의 과제




1. 동서간의 차이와 종합

요즘 들어 동아시아 정체성 담론이 인문사회과학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담론의 내용들은 주로 동서간의 갈등과 조화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 기획들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헌팅턴 Samuel P.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Borchardt, New York, 1996
이나 사이드 같이 동서간 문명의 충돌에서 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강조하는 대립론적 기획이나 뮐러 Harald Müller, Das Zusammenleben der Kulturen, Fischer Verlag, Frankfurt.a.M. 1999
같이 문명의 공존을 주장하는 조화론의 기획 등에 나타난 문제들을 다루기도 한다. 이런 류의 담론들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담론들의 방향에서 철학적인 이해의 배경이 결핍되었을 때 자칫 투쟁이냐 아니면 종속이냐는 이분법적인 논리에 치우칠 수 있다. 그래서 정체성 담론 밑에 깔려 있는 담론행위의 문화적 배경 및 철학적 근거를 조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하기 위하여 동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구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를 들어 동양과 서양의 사유세계를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또 하나의 지식 파시즘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는 것이 이 글의 전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을 위한 방편으로 대자적 차원에서 각기의 고유성을 언어화하는 작업은 여전히 의미 있다. 정체성의 확보는 언어적 의미로 가능한 일은 물론 아니지만, 종합을 위한 여정으로서의 차이를 밝히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대자적 차원에서 동서 각기의 고유성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일도 중요하다. 상대적 평가라는 전제에서 먼저 동양사상의 상대적 고유성은 생태학적 자연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은 동양의 생태학적 사유에 초점을 두는 동시에, 동양사상이 다원문화의 미래세계에서 좀더 희망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쓰여졌다. 산업화와 소외의 시대에서 동양사상에 대한 문화적 접근이 서구 과학주의의 관점과 가치관에 대한 일편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현대의 문화적 풍조로까지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부정적 뉴앙스를 갖는 ‘풍조’라는 말을 사용한 의도는 최근의 동양사상 혹은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유행적 호기심이나 국수주의적 흐름이라는 일부의 비판이 많은 것에 무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서 사상간의 외형적 유사성을 통해서 형식적인 비교연구 작업은 심각한 곡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혹은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견강부회의 종합을 하는 경유가 늘어난 것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혹은 학문의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동서 세계관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가벼운 문화시대의 일조를 더하는 경우도 많다.

동서문화의 정체성을 따져보는 학문적 작업은 글쓰기를 위한 방편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또한 실천적 가능성을 고려치 않은 화려한 이론의 수사학으로 그쳐서도 안 된다. 나아가 대중에게 고급의 지식을 전달하여 대중들에게 지식의 향유를 누리게 하는 일에 그쳐서도 안 된다. 기본적 방향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명위기 그리고 인간위기에 대한 궁극적인 탈출 욕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실천적 행위로 이어질 수 있는 철학적 동기의식이 필요하다. 철학적 반성없이 그럴듯한 형식적 유사성을 통해서 동서간의 외적 연결을 피해야 한다. 내용이 분명하며 실천동기를 자극할 수 있는 동서간의 연대는 반드시 중요하며, 그러한 연대를 위하여 먼저 동서간의 차이를 인식하는 일이 요청된다. 동서간의 합리적인 차이와 구획의 필요성은 동서를 갈라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은 국수적 가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문화적인 대화와 연대를 위해서이다.

2. 자연관의 차이

2.1 서구과학의 전통적 자연관

서구사상과 동양 전통사상의 차이가 나타나는 사유의 틀은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 동서 자연관을 비교하는 일은 차이의 고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서구의 자연개념은 분절적, 물질적, 관성적, 정량적, 기계적인 패러다임의 원자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근대과학의 교조이며 실용적인 측면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말하는 문명위기의 원인들을 진단할 때, 고대 그리스의 원자-기계론적 이미지의 유산과 고전과학 그리고 근대 기술이 낳은 몇몇 병리적 현상들을 조명할 수 있다.

먼저 서양의 자연관을 살필 때, 근대과학적 세계관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뉴턴역학은 단순히 물리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자연계의 인식을 모두 포괄한 하나의 철학체계로 보아야 한다. 18세기 서구의 과학적 계몽주의 시기는 자연철학의 많은 부분들이 자연과학으로 전이되는 시기였다. 고대 그리스 초기 자연철학자인 데모클리투스의 원자론이 뉴턴의 입자론으로 쉽게 수용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수학적 도구를 통한 정량적 방법론이 서구 근대성의 기준이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도 바로 원자론적 사유이다. 이러한 정량적 관측의 표준규칙은 산업혁명의 철학적 시앗이 되었다. 20 세기 과학기술과 산업자본은 우리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인간소외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20 세기 산업의 폭발적인 발전은 소외와 고립의 원인으로 진단되고 있다. 현대문명이 낳은 인류의 인간소외는 환경위기를 수반한 문명위기의 바탕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의 위기는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소외 사이에서 온 삶과 자연의 부조화에 근거한다. 이러한 부조화는 과학적 자연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부조화에서 조화로 나가는 또 다른 자연관을 모색해야 한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운동방식을 철학적 인식론으로 설명하는 호모사피언스 최고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과학은 살아 있는 세계를 죽어 있는 세계로 환원시켜야만 그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체조직을 검사한다고 하자 그러면 살아있는 피부조직을 떼어서 그 다음 그 조직에 물감을 들인 다음 현미경의 대물렌즈 앞에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피부조직을 떼는 순간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세포가 되었고, 염색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다. 서양과학의 작업은 관찰을 위해서 대상을 더 이상 숨쉴 수 없는 유리병 안에 가두어 놓아야 한다. 이를 과학에서는 고립화와 이상화(idealisation)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철학에서는 이를 추상화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과학의 자연관찰은 결국 이렇게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과학적 관찰을 위하여 우리는 자연을 고립화시키지만 원래의 자연은 고립될 수 없는 모습일 뿐이다. 자연 자체는 결코 추상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고립화와 이상화의 과학적 작업의 다른 실례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은 두 물체간의 인력을 다룬 것이다.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을 관찰할 때, 지구와 달 이외의 천체 역시 이 두 물체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관찰 대상인 두 물체 외에 다른 물체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비로소 위의 만유인력법칙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고전역학은 두 개 이상의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운동법칙을 말할 수 없다. 이를 이체문제(二體問題;two-body-problems) 역학이라고 말한다. 과학의 운동방정식이란 실제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두 물체만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해야만 문제풀이가 가능하다. 이러한 가정을 물리체계의 폐쇄화라고 한다. 그래서 과학은 폐쇄화가 있어야만 한다. 이와 같은 폐쇄화를 앞에서 추상화 혹은 이상화(idealisation)의 작업이라고 한 것이다.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 그러했고 현대 열역학의 출발이 바로 추상화의 승리라고들 말한다. 이러한 추상화의 작업은 근대 자연과학혁명의 정신적 뿌리라고 볼 수 있으며 이로부터 서양의 자연과학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화의 작업은 자연의 원래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없었다. 자연을 추상화시키면서 원래의 생세포 조직의 모습이 사라졌고, 달과 지구 외의 다른 천체들이 미치는 힘들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자연과학은 추상화를 통해서 살아 있는 자연을 계산가능한 자연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자연현상 혹은 자연체 모두가 계산가능한 물체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환원되지 않는 것은 우연 혹은 무질서라고 과학의 탐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말하는 ‘노이즈(noise)’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노이즈 개념은 역학방정식을 푸는 데 장애가 되는 물리적 요소 혹은 요인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자연현상에 대한 운동을 기술하기 위하여 노이즈를 일으키는 요인들도 모두 포함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노이즈 요인을 운동방정식의 변수로 놓으면 그 방정식을 영원히 풀 수 없게 되는 역설이 생긴다. 결국 기존의 방정식은 노이즈를 그 말뜻 그대로 소음이기 때문에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노이즈를 무시하면서 근대인은 과학혁명을 완성시켰다. 자연의 노이즈를 무시하면서 우리는 자연물은 수학적 대상으로 환원시킬 수 있었으며, 자연의 연속적인 모습을 조각으로 잘라놓아 원자론의 과학을 완성시켰다. 따라서 힘의 전달방식은 오로지 톱니바퀴의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전달방식만이 과학방법론의 황태자로 되었다. 그래서 과학의 정신을 몇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 환원주의와 기계론 그리고 원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첨단의 과학문명과 고도 산업화에 따른 기술사회의 병리적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과학과 기술사회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하고 있다. 오늘의 문명위기의 책임을 과학에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의 핵심사상인 원자론과 기계론 그리고 환원주의 자체가 문명위기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오늘의 문명위기의 원인은 과학적 환원주의와 기계론 그리고 원자론 그 자체이기보다는 죽어 있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사용되어야 할 기계론과 환원주의 원자론의 과학방법론이 그 기세 등등한 위세를 등에 업고 살아 있는 자연물까지 설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생물학적 자연을 죽어 있는 물리학적 사유로 재단질하는 것이 오늘의 인간위기를 자초한 것으로 생각한다.

20세기 서구의 문명위기는 단순히 물질적인 위기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그 사상적 원인처방을 내리는 몇 가지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약방의 감초처럼 끼는 데카르트의 이원론, 기계론적 자연관 그리고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앞서 말한 환원주의 등이고 이들은 오늘날 문명위기의 사상적 주범으로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것들은 근대 서구의 과학문명과 시민사회의 꽃을 피우게 한 결정적인 사상적 배경이지만, 사람이 사람처럼 살고 자연이 자연처럼 살게끔 나두지 않는 요인을 만들어 준 것도 사실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부작용을 인간위기나 문명위기 혹은 환경위기라는 사회적 불안감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감은 새로운 대안을 요청하였고, 따라서 그러한 요청은 이성비판과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 혹은 환경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생태주의 등으로 연계되었다.

현대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에서 환경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생태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주의를 부정하는 실천적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였고, 그 내용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된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서구인에게 포스트모더니즘과 생태주의는 처절한 자기구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유럽의 기독교계도 마찬가지로 자기구원의 방식을 하늘에 치우친 것을 조금씩 지양하면서 땅의 요소가 가미된 환경운동을 수용하면서 현실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7-28절에 대한 해석을 인간과 자연의 이원화된 권력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로 보는 시각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서구의 환경위기 혹은 문명위기 극복프로그램은 여전히 철저한 유럽의 자구책이며 이에 따라 서구가 동양적 생태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조차도 중심을 차지하려는 시도이며 그 중에서도 인간중심주의는 여전히 그들의 기반 패러다임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환경문제와 연관하여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 그리고 생명중심주의 등은 철저히 산업화된 오늘의 인간위기를 극복하려는 서구중심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2.2 생태주의 자연관

동양에서 말하는 자연과 생명은 대상화시킬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렇게 스스로 있는’ 아니면 ‘그로부터 그렇게 있는’ 자연한 것이다. 중심이 없지만 분수되어 항상 어디에나 나와 함께 있어 어느새 자연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생명인지 무생명인지 모르지만 바로 모든 것이 생명 아닌 것이 없는 그런 자연함이다. 모습이 이러하니 서구 지향의 명사적 개념에 이미 물들은 우리들조차도 자연운동의 동사적 기틀(機)을 이해함이 어렵게 된 이유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상적 불시착이 바로 오늘의 우리와 같이 무차별 잘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쳐댄 아시아 개도국의 환경위기를 자초한 연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남의 눈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물리학적 사유가 아닌 생물학적 사유를 도입하는 일은 생태주의 자연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오늘날 현대인이 처한 물질문명의 인간위기를 풀어내기 위하여 우리는 생물학적 자연의 이해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이해방식은 다양하다. 최근의 분자진화론에서부터 철학적 이성비판의 흐름 그리고 동양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동양적 자연관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특히 우리 동양인에게 경제적인 접근방식이라고 여겨진다. 우선 생물학적 자연계의 반원자론적이며 비기계론적인 모습을 보기 위하여 일개미 군집의 특징을 말해 보기로 하자. 다음의 생태학적 예를 통해서 동양적 생태주의에 대한 간접적 이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개미 군집에서 일개미 모두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60%만 일하고 나머지 40%는 일을 안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읽었다. 그래서 60%와 40%를 분리해 놓으면 그와 동시에 분리된 일했던 일개미들과 놀던 일개미들 각각의 소군집에서 자동적으로 일하는 일개미와 노는 일개미가 다시 60%와 40%로 나뉘어 진다는 것이다. 그들 각각의 소군집에서 왜, 어떻게 동시적으로 나뉘어지는지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그들 사이의 화학물질 교환을 통해서 역할 분담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현상은 미시적인 자연의 생태계를 보여 주는 한 실례이지만 거시적인 측면에서도 우리의 자연은 온통 하나로 묶여있는 생태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동양의 자연학적인 해석으로 여겨진다.

이제 이러한 생태학적 사유가 동양철학의 전통과 어떻게 고리 지워질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동양의 자연관이 갖는 사유의 지평선을 살피기 위하여 먼저 유가의 인물성론을 검토한다. 유가의 프로그램은 중심이 없는, 그렇지만 중심이 주변에 모두 녹아있는 무중심의 중심을 찾아 나서는 인간학이다. 성리학의 주요논변인 인물성동이론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해석공간에서 다루고 있다. 그것이 동론이든지 아니면 이론이든지 관계없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서구 철학적인 의미의 주객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배제되고 객체로서 자연을 다루는 서구과학의 자연관에 대한 반성을 일깨우는 새로운 해석으로서 인물성동이론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 고전에는 인간과 대자적이면서 객관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그런 자연의 개념은 없다. 그래서 여전히 자연을 명사화시킨 채 자연을 동양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일은 어불성설이 된다. 서구 근대철학의 핵심인 경험론과 합리론의 논쟁은 학술적인 연구가치가 있다고 멋있게 보면서, 그에 버금가는 치열한 논쟁을 벌인 성리학의 주요논변인 인물성동이론을 공리공담으로 돌리고 싶은 사람은 결국 객체 지향적인 서구학문의 주석가로 남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대충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발등에 떨어진 환경위기의 불을 끄는데 다양한 대안 중의 하나로서 동양철학을 수용하는데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히 문제는 있다. 지금까지 환경과 동양사상의 연결고리는 주로 한결같이 주역, 화엄경, 원시유가, 노장자 사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전형화된 연결고리의 시작은 불행하게도 동양인이 한 것이 아니라 1974년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슴.
를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된 카프라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서양의 눈이 아닌 동양의 눈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인물성동이론을 포함한 유가의 ‘物’에 대한 해석에서 주요한 것은 물은 영어의 사물(things)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물은 格物致知의 만남이다. 격물은 물을 대상화하여 대물렌즈에 놓인 피관찰체로 간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사람의 만남을 의미한다. 물과 사람의 만남을 바로 事物이라고 한다. 이 뜻은 물을 사하는 것, 다시 말해서 물을 대하는 사람의 동사적 장르를 말한다. 즉 1)사람과 2)대상적 물과 3)그들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틀로서 포괄하는 개념이 바로 사물이며 격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인물성동론이거나 인물성이론이거나 관계없이 유가의 기본적인 생각은 서구식의 인물격리 차원이 아닌 인물화해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天地之心의 마음은 천지가 만물을 낳기는 하지만 천지와 만물 그리고 마음이 하나인 자기회귀적인 성격을 지닌다. 천지와 만물을 하나로 봄으로써 초월적 지위를 지닌 생성의 창조자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단지 운동의 주재자만이 있고 그것도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을 뿐이다. 심과 물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나 물과는 다른 차원의 영원적 존재인 부동의 존재(Unmoved Mover)는 동양사상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서구에서 말하는 부동의 존재는 자신은 운동하지 않지만 다른 모든 것을 제어하고 따르게 하여 운동시키는 존재를 뜻한다. 부동의 절대존재는 정말 완전한 그 곳, 그리고 최고의 그 곳에 이미 도달된 존재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더 이상 완전할 수도 없고, 또 더 이상 최고가 될 수도 없다. 그래서 그 존재는 불변이며 정지성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에서 말하는 최고 진리를 담지하는 존재는 정지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 사실은 서양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생각이다. 그러한 초월자는 정지해 있으며 저기 멀리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 또 하나의 초월적 존재를 양산함으로써, 형이상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서구의 역사는 근대에 들어와서 과학혁명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과학의 세계관은 반드시 외적인 초월적 존재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초월적 존재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법칙의 지위를 지닐 뿐이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그 존재의 절대성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어울리지도 않지만 절대적이라고 하여도, 그 존재는 스스로 존재 안에서 변화가 쉼 없이 들끓고 있는 운동성의 동사적 그 무엇이다. 대상화된 고정성에서 벗어나 인식과 행위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운동력일 뿐이다. 그것이 태극이 되든지 성聖이 되든지 아니면 천天이나 도道가 되든지 관계없이 양의兩儀를 낳고 사상四象을 낳으며 만물까지를 이어 낳는 태극의 지위는 도저히 객관적 초월자일 수 없다. 一이 二를 낳고 二가 四(四象)를 낳으며, 四는 八(八卦), 그리고 16, 64로 나아가 만물의 생성과정 그 자체가 태극이어서 운동력과 운동자의 구분이 없어지게 된다. 선진유가의 우주분석에서 양의와 사상, 그리고 팔괘와 만물은 물론 그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일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태극의 임시적인 분화결과일 분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의 분화된 영역은 상호 침투가 가능하며 상호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이는 중국철학의 기본적인 우주론이며, 변화철학의 중심이 되어 왔다.

그 변화의 세계에서 유가철학은 인간의 구실을 강조한다. 변화의 세계 안에 변화의 원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원리조차도 정지된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 접목방식에 따라서 변화의 모습이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이 유가에서는 이를 事라고 말한다. 유가에서는 事의 개념을 중시하여 존재보다는 인식의 폭을 넓혀 놓았다. 그리고 그 인식의 영역은 정지된 사유인식이 아니라 행동인식을 강조하였다. 주자학과 조선의 성리학 계통은 바로 이러한 행위인식의 중요성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물론 그 행위인식의 범주는 당송 이후 유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시유가와 도가 그리고 불가의 중심 주제이기도 했다.

유불도를 포함한 일반의 동양철학을 전일적 세계관을 지닌 철학이라고 말한다. 자연을 대상화시키고, 정적인 것으로 보고 추상화시킨 서구의 과학과 달리 동적인 자연에 대한 즉자적인 직관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동양의 자연해석은 앞서도 말했듯이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경험과 세계를 하나로 한 통일적이고 연속성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유가와 도가의 사상은 주관의 영역과 객관의 영역을 원래적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에 세계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되고 있다. 이를 사事라고 하였다. 유가와 도가는 정적인 인식론을 근저로 한 세계인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연적 도덕관의 설정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관이란 단순히 인간의 예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격물치지의 방법론을 일러 말하는 은 의미의 도덕관이다. 그래서 격물치지는 서구와 같은 분석적인 자연관찰법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와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인간을 대하는 총체적인 마음이다. 그래서 격물치지의 事는 단순한 진리 인식법이 아니라 행동의 준칙과도 같은 것이다. 넓은 의미의 수양론인 셈이다.

동양사상의 궁국목표는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존재탐구도 아니며 절대 인식도 아니며 행위의 지혜를 찾아가는 것이다. 서구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자연적 도덕관은 하나의 사회의 윤리 혹은 법적인 범주에서만 다루어지지만 동양에서는 자연관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을 관찰하는 일은 서양에서 과학이론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동양에서는 인간이해를 위한 첫발이 된다. 자연의 이해는 곧 인간의 이해를 직접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해방식과 인간의 이해방식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서구의 세계관과 달리, 동양의 우주관은 자연과 인간의 일체를 강조하는 우주론의 일환이다. 예를 들어 도덕과 사회윤리의 문제를 중시하는 유가의 철학을 음양의 자연이치와 연관짓는 일이다. 선진유가에 있어서 음양론은 물론 형이상학적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실천적 사유라고 본다. 자연의 운동방식과 인간사의 운동방식이 동일하다는 관점은 송대에 와서 철학적으로 더욱 세련되는데, 대비되는 음과 양의 두 개념은 전체 속에서 서로 조화되며, 그 둘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힘의 운동성에 대한 상반적 관계를 표현한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현상은 자연뿐만이 아니라 인간사 역시 음과 양의 상호작용의 한 결과로 본다. 음양은 정지된 양극성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힘의 단초일 뿐이다. 음양의 대대관계에 근거한 자연관은 天人관계를 대우주와 소우주의 상응성으로 보는 복합체계를 그린다. 따라서 그것은 이원론적 원리가 아니라 한 실재의 두 양상일 뿐이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통일 속에서 있지만 아무리 작은 통일체 속에서도 두 양상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차원의 음양이 생긴다. 이는 상호 모순적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관계를 지니는 자연의 원리가 인간사에 투영된다는 기본적인 우주관의 표현이다.

3. 자연의 연속적 패러다임

물질적 원자론의 이성체계에 대항하는 자연관 중에서 우리는 유기체적인 과정적 사유를 선택할 수 있다. 과정적 사유는 인간소외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 반성을 유도한다. 특히 관계지향적인 과정적 사유는 인간의 가치를 확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과정적 세계관과 실체론적 원자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유기체적인 과정적 사유의 흐름이 심신론이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같은 전통의 실체론이 근거하는 철학적 이원론을 해체하고 있다. 관계의 과정 패러다임에서 볼 때, 자연은 고전과학에서 나타나듯 고립적인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론적 자연관은 결국 전일적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은 유기체적인 연대성을 갖는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원자론적 유물론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연속성의 체계를 보이는 뚜렷한 실례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관계론적 그물망 또한 연속성의 체계이다. 이성적 질서계는 원자들의 단순한 집합체와 같은 불연속성의 체계인 반면에, 자연의 역동성은 이성적 매개를 통해서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연속성의 체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무지하다.

우리는 동서의 종합을 추구하기 위하여 서구 중심의 분절된 대상중심적 사유와 더불어 생태주의적인 연속성의 자연관의 비판적 수용이 절실하다.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대상지향적인 원자론적 실재론 내에서 발전하였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곧 인간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과학의 불연속성의 패러다임에서 동양철학에 친화적인 연속성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된다.

유기체적이고 과정적인 사유의 주요 주제는 연속성, 전일성, 그리고 역동성이다. 자연이 연속적이고 그 구성요소들이 내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그 유기체적 단위체가 각 계층에서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자연의 연속적인 흐름은 변화하는 생동력으로 특징지워진다. 자연의 연속성은 그 자체로 복잡성을 띠고 있으며, 자연의 전일성이란 모든 하위계층들을 중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전체계의 최적의 기능성 말한다.

물리세계가 닫혀 있는 반면, 자연은 열린 계이다. 닫혀 있는 것과 달리 열린 계는 끊임없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한다. 열려진 그물망에서는 신이나 세계의 외부동력과 같은 외적 추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안에는 외적 동력은 없고 내적 관계만이 있다. 내적 관계성의 또 다른 특징은 대상과 그 내적 관계 사이의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전체 자연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은 전체의 자기발생적인 과정속에서 하나의 참여자로서 상호작용을 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과정은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과정으로서 관계 맺고 있다. 그래서 한 사물이 무엇인가를 것은 ‘자기발생적인 힘이 어떻게 모이는가’ 하는 의미와 같다.

서구 원자론적 실재론은 모든 관계가 외적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서구의 이성적 속성은 내적 관계 상상력을 자아낼 수 없다.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근원적인 차이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 차이 때문에 불행하게도 내적 관계를 서구과학의 용어로서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영어의 ‘liver'를 뜻하는 ’간‘이라는 한의학적 정의는 현대 해부학의 문맥과 많은 차이가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간은 단순히 신체상의 위치를 점하는 간과 다르며, 간과 그 부속적 기능을 하는 어떤 기능적 체계를 지칭한다. 생명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의학적 기준은 심장의 정지 혹은 숨의 멈춤이다. 그러나 전통 한의학에서는 죽음을 기氣, 정精, 신神의 막힘이나 분산으로 이해한다. 의학 용어에서와 같은 그러한 문제들은 사실 인문학 전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4. 우리 인문학의 과제

우리는 동서의 공분모나 공통의 가치기준을 찾기 위하여 서구철학이 동양사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들, 그리고 거꾸로 동양이 서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은 동양 특히 한국에서의 인문학의 주요과제일 수 있다. 철학적 기획의 공통된 이해는 획득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철학의 범주 안에서만 즉 서구의 논증과 주장의 기준을 통해서만 동양의 인문학을 구성하고 판단하는 일은 편협한 것 이상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구 기계론적 세계관이 낳은 부정적 요인 이 있다하여도, 현대과학적 사유를 동양사상을 가지고 장식하는 것 역시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렇게 의도적이거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맞추어진 동서양 결합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을 신비화시키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생태주의에 대한 지나친 환경심리학적 해석의 부작용이다. 서양의 관점에서 객관화시킬 수 없는 기(氣), 신(神), 도(道), 심(心), 음양 혹은 오행의 관계성 등의 동양의 의미기호들을 산업사회의 부작용에 대한 강한 해결책으로서 반성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적 부작용을 일러 말한다. 서구과학이 보이는 분화적 사유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으로서 동양의 의미를 신비주의의 눈으로 보는 주술화된 생태주의가 주변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적절한 교통정리를 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회생태학자로서 명심해야 할 경고를 던진 북친(Murray Bookchin)의 말은 이에 적절한 거울이라고 본다. 자신도 모르게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생태운동은 사회적 구원과는 관계없는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있다”. 머레이 북친, 사회생론의 철학, 솔, 1997 136쪽
이런 생태주의는 개인의 심리적 안일을 위한 보신주의일 뿐 오늘의 환경위기 나아가 인간위기를 더 부채질 할 뿐이다. 전통적으로 서구의 과학은 하나 속에 서로 다른 두 개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점 때문에 서구과학은 그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심각해진 문명위기의 주범으로 주목받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과학 자체의 원인이기보다는 과학의 탐구방법론을 갖고 인간을 해부하려는 무모한 모험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곧 동양철학을 반성 없이 수용하여 지나치게 치장하고 신비화시키는 주술적 생태주의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서구과학과 산업기술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잉여의 시간과 함께 그리고 만족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만족감은 서서히 불만족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특히 기술사회의 확산으로 인한 환경위기의 위협을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불만족의 정도는 커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러한 인간위기는 단지 서구사회의 현상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동양사상이 현대문명의 대안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철학적 치료제를 찾아야만 한다. 오늘날 동서간의 차이는 단순히 지리적인 차이가 아니다. 오늘의 인간위기는 서구문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화된 동양사회에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대안은 혁명적인 해답이 아니라, 작은 문화적 진보의 누적이다. 그래서 획기적인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서간의 우위비교에 의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며, 두 문화를 조율시키기 위한 전제로서 상대적 차이를 냉정하게 인식할 뿐이다. 그리고 동서양을 구획하는 획일화된 이분법적인 마음에서 과감히 벗어나 동양을 서양의 눈이 아닌 동양의 눈으로 볼 때가 되었다. 그 때 비로소 서양을 바르게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터전이 정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서양의 만남에서 그 사이의 차별이 아닌 차이가 먼저 부각되어야 진정한 종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가능성을 학문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문학의 과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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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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