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 발표 <간화선의 화두 공부와 그 특징>에 대한 논평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차 가산포럼 (2001년12월15일, 월정사)

2001년 수행의 가치와 우리의 미래

김영욱 발표 <간화선의 화두 공부와 그 특징>에 대한 논평

최종덕의 논평문

<분별심 1> 우주 공상영화에 등장하는 외계 생명체를 머리 속에 그려보자. 그 외계존재를 그리는 영화 제작자는 최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엄청나게 괴기한 모습을 연출해 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도 역시 인간의 상상력이라 외계존재의 괴기성을 표현하는데 한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인간 언어로 괴기의 존재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기하더라도 인간이 갖고 있는 언어의 상상력으로 국한되어 재구성된 존재라는 것이다. 눈이 배꼽에 붙었고 다리가 새 개이며, 팔이 여덟 개를 갖고 있는 흉측한 존재라도 역시 인간의 눈과 다리, 팔이라는 기성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분별심 2> 해가 저가는 너스름한 저녁의 하늘은 여기서 볼 때 황혼이지만 서쪽으로 가면 아직 타오르는 붉은 태양이 있는 한낮이다. 황혼을 보고 조금 후에는 어두운 밤으로 점입되어 저녁을 끝이라고 하지만 더 먼 저기 서쪽에서는 처음일 수 있다. 저녁은 연속적인 해의 운동과정이지만 여기서 볼 때 저녁은 오늘 하루의 끝이라고 볼뿐이다. 그러나 저기 서쪽에서는 끝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하루의 끝은 아니다. 우리에게 오늘은 저쪽 사람들에게는 어제이며 내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저녁과 한낮은 서로 다른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한낮과 저녁은 주름잡혀 접혀진 그래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모르는 태양 운동의 두 가지 면일 뿐이다.

<분별심 3> 한 제자가 스승에게 언제 미륵이 이 세상에 도래할지를 질문하였다. 그 스승은 2만5728년 후에 올 것이라고 답해 주었다. 그래서 제자는 그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수양의 길을 밟고 있었다. 어느덧 2만5728년이 지났지만 미륵은 오지 않았다. 화가 난 제자는 스승을 찾아가 따졌다. 그러나 스승은 항상 지금부터(always from now) 2만5728년 후 라고 답했다. 스승은 화두의 의미로서 2만5728년을 말했는데, 제자는 어리석게도 분별적 의미의 미래를 기다린 것이다. 당시에 제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미륵이 함께 했는지도 모르고, 과거에 이미 와 있었는지도 모를 그런 시간을 제자는 깨닫지 못했었다.

<분별심 4>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조카 아이에게 집 앞 가게에서 양파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뿌듯한 얼굴을 하고 들어온 아이의 봉투 안에는 양파는 없고 양파깡이 들어 있었다. 아이는 어른이 시킨 심부름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지만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세계 안에서 한 최대한의 행위였다. 이렇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성곽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성곽 안에서 세계는 성곽 위에 비춰진 모습으로 제한될 뿐이다. 그러한 세계를 부정적으로 말하면 편견이고 선입관이 되는 것이며, 긍정적으로 말하면 인생관이나 역사관이라고 한다. 선입관과 인생관이라는 말의 뉘앙스의 차이는 엄청나기는 하지만, 그 둘 모두 분별지에 갇혀진 언어의 역사 안에서 탄생한 수많은 갈등과 질곡의 원천이 되었다.

위의 네 가지 분별심의 이야기들이 갖는 공통적인 것은 “무엇”을 찾는 마음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이 무엇을 찾기 위하여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에 대한 끝없는 의심을 하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런 의심을 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의심불가능성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이런 서구 합리론자의 의심은 필자가 말하는 화두의 疑情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 같은 사람도 알 수 있다. 문제는 필자가 말한 것처럼 화두의 끝없는 의심과정이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라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고 있는 점이다. 화두가 언어적 분별지를 타파해야 하고 또한 타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어떻게”라는 길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라는 길은 언어적 장르도 있지만 비언어적 장르도 있다. 데카르트는 언어적 장르를 통한 “어떻게”의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 “무엇”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화두의 “어떻게”는 끝까지 “무엇”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화두의 “어떻게”는 끝이 없는 것 같다.

필자는 의심의 과정을 “슬쩍 붙어있기‘와 ”확 뒤집기“라는 배촉관으로서 우리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제3의 길인 마음의 변증법적 귀추조차도 확 뒤집어 버림으로써, ”어떻게“만이 남는 - 그래서 지금 가고 있는 - 길을 잘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필자는 결론에서 화두의 돈오돈수적 성격을 은근히 말하고 말았다. 문제는 알량한 나의 논리적 분별심으로 볼 때 ”어떻게“라는 화두가 가려는 여정과 결론에서 필자가 잠시 내비친 돈오돈수적 특징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는 사람들이 선뜻 나서기를 꺼려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힘들고 어려운 논쟁에 휘둘릴 수 있다.

절에는 안 가지만 불교친화적인 세속의 사람이 꽤 된다고 본다. 특히 서양철학을 하면서 언어논쟁을 밥벌이로 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언어적 분별심과 화두의 언어 깨뜨리기 사이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은 현실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학술대회 토론에서 논문 문구를 물고 잡아 내용 비판을 하고 반격을 받는 둥 논쟁을 치르다 보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라는 자조적인 회의가 들 때도 있어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너 좋고 나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자니 학자연하는 나의 관습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있다. 오늘 자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분별지 타파의 주제일 수밖에 없는 도/불 수행론을 말하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분별지의 장르를 다시 빌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중층적 갈등들을 마음 속으로는 누구나 느낄 수 있다. 혹시 화두의 과정이 문제 풀이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화두의 종착지인 깨달음이란 “푸는 것”이 아니라 “끊어버리기”가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필자나 혹은 다른 참석자라도 이 문제를 이야기해주면 정말 경청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 화두의 방행과 파주의 태도들을 禪語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일상사에 과감히 적용해 볼 수 있다면 아마 관습, 권력, 질시, 자만, 경쟁 등의 키워드로 점철되어 가는 세간사의 문제들이 많이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세간사나 돈오돈수 논쟁의 문제는 필자의 원래 주제가 아니었으므로 논평자의 넋두리로 치면 될 일이지만, 그래도 논평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분별지의 질문을 필자께 드리려 한다.

1. 배촉관과 파주/방행의 방법론을 연결하였는데, 이를 연결하기 위하여는 파주의 경계 혹은 방행의 경계가 설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경계가 작위적일 때 자칫 空中幻花가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2. 마지막에서 “이렇게 무분별로 환원시키는 것만이 화두 공부의 최종적 목표는 아니다. 결국은 잘못된 분별을 타파하고 다시 분별의 세계로 나와 다양한 언어와 행위를 통하여 그 경지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데서 화두 공부는 완성된다” 고 했다. 그렇다면 분별지에도 우열이 있고, 그런 분별지의 반성을 거친 깨달음에도 우열이 있다는 논지로 자칫 이해될 수 있다. 필자가 그런 뉘앙스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는 있지만, 그래도 필자의 설명을 듣고 싶다.

- 끝 -
가산불교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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