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원리

교수신문사 學而思 기고문 (2002년5월7일)

시장원리?



시장원리의 간판이 여기저기서 넘쳐흐른다. 경쟁과 도태라는 말이 거리낌 없이 새로운 가치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나온 우리 역사에서 하도 많이 남에게 치이고 부대끼다 보니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희망에서 나온 구호인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소수의 욕심이 다수의 희망으로 위장한 채 경쟁논리의 수사학이 너무 지나쳐 버렸다. 원래 욕망의 진자추는 지나치면 그 중간에 서질 못하고 저쪽 다른 편으로 또다시 지나침이 있게 마련이어서, 우리의 지나친 시장원리의 구호 역시 일시적인 지나침의 현상이라고 나를 위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장원리라는 말이 진짜 원리가 되게끔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시장원리를 공평하게 적용하자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애꿎은 노동자 서민에게만 시장원리니 구조조정 같은 칼날을 대기 전에 의사나 변호사, 판검사 그리고 교수의 수를 대폭 늘리는 것이 시장원리의 우선이다. 그렇게 늘리고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개인 수입이 줄어들고 독점권력이 배분되며, 그러면 말 많은 의료계의 문제나 시끄러운 정치판 그리고 권위의 학계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질적 수준의 하향을 우려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인데, 이는 당연히 예상되는 항변이므로 큰 신경 쓰지 말고 시장원리를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대학입시의 문제도 곁다리로 풀려진다.

지나온 대학입시제도가 변화무쌍(상)하게도 20년 동안 18번이나 바뀌었고 내후년에도 바뀐다니 교육부의 통제 정책은 참으로 무의미하고 그냥 시장원리에 맡겨 두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에 있어서 하는 말인데,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지원정책의 경우 지난 10년 전부터 특단의 조치라고 하여 ‘창의적 연구과제 지원’ 사업에서 21세기 프로티어의 표제어를 들고 나온 이공계열 대규모 사업 등과 얼마 전에는 ‘두뇌한국21’ 프로그램이나 인문학 육성지원책 등에서 시행하는 대규모 연구사업단이 있었다. 그런 사업단 형태의 연구지원 프로젝트는 2-3차 년도가 지나면서 귀 얇은 사람들의 바람을 탄 신규 사업으로 전환되는 통에 연구성과의 누적된 결과를 창출할 수 없었으며 결국은 그 아까운 많은 돈이 집중되지를 못하고 있다. 9년씩 계획했던 대규모 사업단이 제대로 되려면 연구결과를 끝까지 지켜보고 연구결과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완료하는 그런 시장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고교평준화를 폐지하고 입시부활을 하자는 경제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그 간단한 시장원리를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몇몇 입시전문 고등학교를 양산해서, 창의적 교육을 정말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학벌사회를 더 공고히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특목고인 과학고나 외국어고등학교도 이미 입시전문 특별학교로 전락되어 시장원리의 적용이 잘못 됐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 터인데, 입시부활의 소리를 연발하여 내고 있으니 시장원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시장원리의 칼등을 뒤집어서 약육강식의 칼날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한 표현이다. 시장원리라는 개념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고 언제부터 생겼는지, 그리고 정확한 개념정의가 무엇인지 경제학 교과서를 아무리 들춰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정체불명의 개념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아마도 아담 스미스나 다윈을 차용하여 자유주의 자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말인 것 같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는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를 않는데도, 툭하면 약육강식의 허울을 쓴 경쟁논리의 근거를 진화론에 갖다 대는 것과 비슷하다. 시장원리의 애매한 개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에서 시장원리가 궁극적으로 역사와 삶의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는 어떤 근거나 검증확인이 이뤄진 것이 아직은 없다. 이제 미국의 몇몇 자본행태만을 모델로 삼는 시장원리의 허울을 벗기고 진짜 시장원리의 적용을 제대로 하거나, 그렇게 못한다면 최소한 이미 철학적 근원으로서 검증된 삶의 평등원칙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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