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와 뒤르케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2017년6월28일)


인간적 사회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오늘의 책 : 김명희,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귀환, 한울, 2017

1.  이분법의 과학에서 통합의 인간과학으로

우리는 이분법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화로부터 벗어나 과학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신과 기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가치중립적이라는 구호 아래 객관적 사실을 추구한다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여겨왔던 사실들은 여전히 주관적 가치에 염색된 것들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덩어리이지만, 그 자체로 신이나 알파고도 흉내낼 수 없는 실존적 존재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분화된 것을 종합하고 통합하고 통섭하고 결합하고 융합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떤 책 한권을 집었는데, 이 책은 이런 이분법을 굳이 종합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서로에게 대화를 유도하여 새로운 노벨티를 발생하게 하는 변증법적 연합을 보여주고 있다. 그 책은 김명희의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이다. 저자는 사회과학자이지만 과학철학의 방법론을 흡입하여 소위 ‘인간과학’이라는 장르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과학이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통합의 소산물이다. 이는 정량적 결합도 아니고 화학적 종합도 아니다. 단지 있는 것을 그대로 둔 채 그들 사이에 갈등을 생태적 공존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19세기 들어 자연사실을 취급하는 지식방법론은 실증주의로 굳혀졌다. 실증주의는 자연주의와 환원주의 기반위에 과학에 대한 방법론적 해석을 시도한 철학적 방법론으로 정의할 수 있다. 20세기 사회과학도 그러한 실증주의에 기반한 방법론을 중시했었다. 인간이 배제되고 사물 중심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사회를 해석하려 했던 이러한 실증주의 분위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사회를 이해하려 한 도전이 일어났으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사회과학에서 이런 분위기를 루카치나 사르트르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원조는 맑스와 뒤르케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러한 도전을 저자는 인간과학이라고 표현했다.

2. 비판적 실재론 도입

이 책이 던지는 중심주제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데 있다. 여기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란 바스카R. Bhaskar가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으로, 실재 그 자체를 되찾아 사회적인 관점에서 실재론의 주장을 전개한 내용을 함의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본 실재론을 의미하는데, 자자가 의도한 비판적 실재론의 속 내용은 과학적인 논리와 사회문화적 구성이 종합되어야만 일상의 세계문제를 조명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 책은 사회과학에서 논쟁 중인 이분법적 딜레마를 저자의 특유한 종합법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다음과 같은 ①청년 맑스와 노년 맑스, ②초기 뒤르케임과 후기 뒤르케임, ③자연과학과 사회과학, ④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 ⑤사실과 가치,⑥과학과 비판이라는 이분법의 틀을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다. 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하여 저자는 맑스와 뒤르케임을 끌어왔다. 저자는 이 두 사람이 이분법의 통합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2쪽).

저자는 이런 종합을 두 문화의 통합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저자가 추구하는 통합적인 인간과학으로 가는 여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23) 그 여정으로서 첫째 이분법적 해석의 통합을 시도하며, 둘째 자연주의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실증주의와 낭만주의를 갈라놓은 기존의 사회과학방법론의 분위기를 벗어나서 제 3의 방법론을 정착시킨다는 점에서 정말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긴다.

통합의 이론적 도구로서 저자는 바스카R. Bhaskar의 비판적 실재론을 소개한다. 비판적 실재론이란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틀을 인정하면서도 물질로 환원불가능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고유한 관점을 덧붙이는 공존과 병합의 태도를 말한다. ‘가치’를 다룰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이지만, 사회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이라는 말꼬투리를 붙인 만큼 사실을 다루는 방법론을 안고가야 한다. 종래의 사회과학자들은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처럼 취급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이런 그들만의 자랑스러움이 오류였음을 처음으로 지적한 이가 바로 맑스다. 사회현상을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는 기존의 사회과학방법론의 한계는 역사를 관통하는 사회의 동력학적 맥동을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맥동이 실재하며, 그 실재가 역사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저자는 비판적 실재론을 도입하였다.

3. 맑스의 비판적 자연주의

비판적 자연주의는 맑스의 과학방법론이며 이를 통해서 실증주의 방법론으로 포섭되지 않는 삶과 사회의 영역까지를 포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연주의와 인본주의를 연결시킴으로써 구조와 행위가 이어지고 설명과 비판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과 경험의 이분법, 이론과 역사의 이분법을 통합하는 것은 바로 인간과학의 핵심이며, 저자는 그 원류를 맑스에서 찾는다. 그런데 저자는 맑스의 인간과학과 분석 맑스주의를 혼동하지 말고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석 맑스주의는 형이상학으로 변한 맑스 이론의 하나이다. 분석 맑스주의는 전통과학의 규범을 인정하며, 논리적 개념을 추구하며, 공식적인 모델을 정립하려 한다. 저자는 이런 분석 맑스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맑스의 언어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인간과학의 영역으로 들어 올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 맑스주의의 존재론은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분석 맑스주의는 방법론적으로 개인주의를 취한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란 존재론적 원자론과 이론적 환원주의를 합친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즉 사회현상은 개인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다는 것이다. 반면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이란 개인들 간의 관계가 사회전체를 형성하지만 개인의 정량적 통합이 전제사회로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런 환원주의에 기반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맑스를 조명했다.

그 대안의 하나로서 비판적 자연주의가 있으며 이는 맑스의 과학방법론에 맞닿아 있다. 맑스의 과학방법론은 자연주의와 인본주의가 어울려 있으며, 구조와 행위가 이어져 있고, 이론과 실천이 합쳐져 있어서 세상과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

저자는 사회과학 안에서 과학활동의 몰이해를 지적한 이기홍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실재론적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실재론적 사회과학이란 피어스가 소개한 것으로서 비판적 자연주의의 기반을 갖고 사회를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관념적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동시에 환원주의에 갇혀 있지 않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보는 시선을 제공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실재론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그치지 않고 사회현상 이면에서 사회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있는 포괄성을 지닌다.

그 실례로서 저자는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아래처럼 설명한다.

1.뒤르케임의 실증주의는 환원적 실증주의가 아니라 자연주의에 가깝다.
2.뒤르케임 방법론의 핵심은 행위와 사유가 서로 이어져 있고 묶여져 있다는 데 있다.
3.뒤르케임의 <자살론>을 사회생물학의 전거로 보는 과잉 자연주의적 해석도 있지만 저자는 뒤르케임의 자살론을 전통적인 자연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 그리고 사회적 관점에서 생물학적 동력을 관찬한다.

자살론에 적용된 방법론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경험에 기초하고 있지만 경험을 불러일으킨 발생메커니즘을 중시한 것이다. 경험에서 원리를 추론하는 사유의 힘을 통해서 자살의 근원을 파헤친 것이다. 이런 추론법은 소위 역행추론retroduction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저자는 행위와 이론이 합쳐지고 사회와 역행추론을 통해서 자살을 설명했다.

저자는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의 틀에서 설명했다. 저자의 탁월한 설명법이란 전통적인 자연주의를 극복하여 소위 환원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윤리적 자연주의’의 틀을 마련했으며, 둘째 이런 윤리적 자연주의를 비판적 실재론과 연결하여 설명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저자는 뒤르케임을 통해 사회의 도덕적 가치가 자연의 원형적 사실위에 성립된 것임을 보여준다. 윤리적 자연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치와 사실, 나아가 도덕학과 경제학 사이의 통합을 말했다. 사회의 윤리적 규범조차도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합당하게 자연에 적응된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고 논증한다. 사회적 가치와 자연적 사실 사이에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매개체로 집어넣은 것이 바로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인 셈이다. 자연주의에 대한 오해에 바지지 않기 위하여 저자는 자연주의를 부연설명했다. 자연주의에는 통상의 유물론적 자연주의와 생물학적 자연주의 그리고 심리학적 자연주의가 있는데 뒤르케임의 자연주의는 이와 다르게 사회학적 자연주의라고 한다. 뒤르케임이 말하는 사회학적 자연주의에서 사회적 환경은 초월영성성hyper-spirituality을 포괄한다.

사회적 자연주의로부터 사회는 인간 개체들의 합 이상의 무엇이 발현된다는 생각이 정립된다. 뒤르케임에게서 이런 생각은 그의 <분업론>과 밀접하다. <분업>에서 우리는 개별 분업성과의 총합이 전체 성과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전체 성과가 개별 성과의 합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그 이상의 무엇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 이상 혹은 그 이하로 될 수 있다. 즉 개인의 총합이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집단은 개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자연에 속하지만 자연을 지배한다는 것이(Durkheim 1953, 97) 뒤르케임을 보는 중요한 관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윤리적 자연주의가 성립된다.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는 도덕적 사실이 자연의 현상의 일부라는 점을 말한다. 이로서 결정론과 자유의 대립을 해소한다. 이는 즉 개방적 결정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아가 뒤르케임의 윤리적 자연주의란 사실과 가치를 통합하려는 의지가 드러난 인식론적 통로이다. 통합하는 방법론적 논리로서 뒤르케임은 공변법method of concomitant variation을 사용했다. 공변법이란 동시에 발생한 사건들 혹은 현상들 사이에 내적 연관성을 찾는 방법으로, 두 사건(현상)이 동일한 원인을 갖거나 아니면 공통으로 의존된 제3의 조건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둔 방법론이다. 뒤르케임은 자신의 공변법을 통해 자연과 사회 사시의 내적 연관성이 있음을 밝히려 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뒤르케임은 이런 공변법을 통해 사회학과 자연과학의 태도를 연결했으며, 도덕론과 경제학을 합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그는 당대 칸트주의 도덕론과 공리주의 경제학의 이원론을 통합하려는 뒤르케임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생각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지만 같이 공존한다는 생각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은 동물적 요소에서 탈피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동물과 다른 발현적 속성을 갖는다고 한다.(Durkheim 1958, 197) (130쪽) 그렇게 발현된 것이 문화이며 종교기고 제도이다. 제도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고 정형화된 믿음체계와 행위양식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와 같은 정신현상은 사회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뒤르케임은 말한다.(Review of H. Spencer 1886)

5. 비판적 실재론: 바스카와 저자의 입장

이론은 사실을 기초로 하는 과학적 설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실천은 가치를 기초로 하는 도덕적 비판을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실증주의적 자연주의로 설명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사회는 반실증주의의 자연주의로 접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이는 저자가 말한 새로운 독해의 한 통로이며, 새로운 과학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더 자세히 설명한다.
1.과학의 자동적 차원 : 과학 내부의 독립적 논리를 갖는다. 과학이 타동적 차원은 과학과 사회의 상관성을 함의하다. 개별과학은 사이의 층화가 있다. (콜리어 2010, 161)
2.개인주의와 집합주의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한다.
3.자원론(환경론)과 물상화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한다.
4.정신과 물질 이분법 극복, 정신은 물질의 발혀적 히이다. (바스카 2005a, 21) 이는 철학적 수반이론과 비슷하다.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관은 통상 지식추구의 인식론적 절차로만 이해되어 왔던 과학의 암묵적인 존재론적 차원을 불러옴으로써 실증주의의 잘못된 과학관을 바로잡고자 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관에 기초할 때 경험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좀처럼 이해될 수 없었던 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과학관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60쪽) 다시 말하지만 과학과 비판, 사실과 가치의 이항대립에 멈춰있다면 사회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회과학조차도 설명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과학과 철학, 설명과 비판, 사실과 가치, 인간과 자연처럼 서로 분화되고 대립된 양면을 잇고 맞대고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저자의 시도는 충분히 호평 받을 만하다. 자연과학에서도 오해될 소지가 많지만 사회과학에서조차 가치중립적이라는 명분과 구호가 지배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통합시도는 새롭지만 힘든 학문적 도전이다.

인간과학은 자연과학과 별개의 차원이 아니지만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노벨티를 포함한다. 이런 인간과학의 조망은 비판적 자연주의의 핵심이며, 사회를 자연학적 총체성으로 설명하는 시도의 하나이다. 방법론적 개인주의 혹은 환원주의와 정반대의 설명법이라고 보면 좋다. 바스카를 인간과학의 입장에서 보려고 저자는 시도한다. 바스카에게서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들의 총합을 나타낸다”는 표현은 아마도 뒤르케임의 사회과학 조망론일 것이다. 바스카는 뒤르케임을 해석할 때 항상 집합주의 사회학과 실증주의적 (경험주의) 방법론을 결합한 독특한 방법론의 소유자로 말한다.(95쪽) 바스카는 맑스를 해석하 대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맑스 방법론의 핵심은 실재론과 관계적 사회학의 결합에 있다고 한다.(95쪽)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에서 전제된 철학적 존재론이 있는데, 그것을 바스카는 이중의 탈중심화라고 부른 것 같다. 저자가 표현한 탈중심화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인간 개인들의 총합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인 사회 속성이 있다.
2.사회는 개인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3.개인으로 설명할 없는 창발적 정신 속성이 있다.
4.인간은 개인의 심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정신을 갖는다.

결국 사회는 존재론적 고유성이 있는 구조라고 한다.(97-98쪽) 바스카에서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그것이 지배하는 행위와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행위주체들이 활동하면서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관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행위주체들이 활동하면서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관념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구조는 자연구조와 달리 오직 상대적으로만 지속된다.

6. 비판적 유물론

인간과학을 위한 유물론을 저자는 강조한다. 비판적 유물론은 이론적 이분법에서 탈피하자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과학을 물질주의 과학의 제한에서 탈피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면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환경론 나아가 과학과 철학의 이분법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뒤르케임의 통합방법론을 맑스의 통합론과 동일한 지평에서 다루었다. 비판주의와 과학주의, 자연주의와 문화주의, 실증주의와 역사주의를 하나의 틀로 묶어내었다는 점 이상으로 맑스와 뒤르케임을 공통의 사유틀로 엮어낸 저자의 학문적 조망력은 더많은 독자의 시선을 끌 것 같다. 그런 시선은 인간과학의 범주를 끌어내고 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가 블로흐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맑스 엥겔스 1997, 508) “경제의 변화는 유물론이지만 결정론이 아니다. 생산과 재생산들의 계기를 다루는 경제적 계기는 매우 복잡한 상황들의 연관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한 인과법칙으로 환원되거나 결정론적이지 않다.” 이 편지 내용은 유물론이면서 어떻게 인간주의 과학이 가능한지를 시도하는 데서 시작된다. 저자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새로운 유물론이 바로 이러한 인간과학의 옷을 입은 유물론이라고 매우 의미있는 주장을 전개했다. 서평자는 저자의 주장을 아래처럼 요약했다.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
•환원주의가 아닌 과학적 유물론, 즉 사회적 실재에 대한 과학적 믿음의 내용이 중요하다.
•사회적 형태의 재생산과 주체적 인간의 구성적 역할을 강조하는 실천적 유물론이다.
•자연은 단지 인간에 대립적인 감각경험의 대상만이 아니다.
•자연은 인과적으로 상호의존하는 실천적 관계의 장이다.
•경험주의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를 비판적 자연주의 관점으로 맑스와 뒤르케임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가시적 인과론을 밝히려는 일반경제학과 달리 경험계 밖 인과관계까지 다루는 과학의 근저이다.(219쪽)
•물신주의에서 탈출하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리카르도 경제학의 “환원주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요강 III, 22)
•역사와 가치 이분법, 비판과 과학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유물론이다.

7. 맑스와 뒤르케임에 대한 “새로운 독해”

인간이 배제된 채 자연과 사회를 해석하려 했던 19세기 실증주의 분위기를 거부하고 탈피하려는 사상적 도전이 바로 20세기 중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회과학의 루카치에서 프랑스의 사르트르 나아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그 포스트모더니티와의 공조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사조의 원조가 맑스와 뒤르케임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 사회과학을 저자는 인간과학이라고 표현했다.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난 인간과학으로서의 사회과학은 방법론적 개인주의 혹은 계량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며, 관념적인 추상의 연역법칙이 아니라 실재하는 자연주의를 무시하지 말도록 우리를 설득한다. 저자는 비판적 자연주의를 더 확장하여 사회과학적 실재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실재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저자는 “새로운 독해”를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독해”란 첫째 형식적 이분법에서 탈피하며, 둘째 과학을 재조명하는 데 있다. 과학과 비판, 사실과 가치의 이항대립에 멈춰있다면 사회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회과학조차도 설명하기 어렵다고 역설한다. 이 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과학과 철학, 설명과 비판, 사실과 가치, 인간과 자연처럼 서로 분화되고 대립된 양면을 맞대어 잇고 하나로 묶으려는 저자의 시도는 충분히 호평 받을 만하다. 자연과학에서도 오해될 소지가 많지만 사회과학에서조차 가치중립성의 구호가 팽배해진 오늘의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통합시도는 새롭지만 아마도 힘든 학문적 도전으로 될 것 같다.

새로운 독해의 구체적 사례로서 저자는 소이어의 <발현이론>을 들었다.(Sawyer 2002, 227) 발현이론이란 주어진 부분들의 합으로부터 전체가 구성되지만, 전제 안에는 부분들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전체가 부분들의 합과 똑같지 않고,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전체는 부분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결정론과 자유론(환경론 혹은 자원론)이 서로 공존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정신은 물질의 창조적 발현이라는 점을 저자는 논증한다. 인간과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무엇에도 환원되지 않고 스스로 고유한 노벨티를 머금고 있다고 한다. 개인들 하나하나를 설명한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설명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물 안에는 없었지만 사물 사이에서 새롭게 창출된 관계항까지가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러한 파악은 정적인 사물을 촬영한 한 컷의 사진기로 가능하지 않다. 관계의 창출을 파악하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사물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복수의 사진컷을 필요로 한다. 연속의 사진컷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를 보지 못하는 사진사는 인간과학의 살아있는 장면장면들을 생생하게 촬영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8. 청중을 위한 사회과학, 독자를 위한 사회과학서

이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었다. “사회과학은 주제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청중을 위한 것이다”.(292쪽) 이 책은 저자만의 고유한 주제의식과 창의적인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용이 전문적이라서 읽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적 내용이라도 독자들이 읽어 내지 못하면 책의 의미가 반감된다. 사회과학은 청중을 위한 것이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했다. 그만큼 독자가 다가갈 수 있는 글쓰기로 책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이 책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의 홍수 속에서 그렇게 분열된 것들을 공존시킬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보려는 독자들은 이 책 구석구석에서 대단한 읽을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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