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정치를 아시나요 -조희연 글에 대한 소평
민주사회정책연구원 주관

<우리 안의 보편성> 출간기념 심포지움 2006년6월22일

조희연 "우리 안의 보편성" 논평문

<우리 안의 보편성> 심포 논평문(06년6월22일)

무위의 정치를 아시나요
-조희연을 중심으로-




무위하면 노자를 떠올리는데 무위에 대한 통상의 이미지는 은둔과 죽림칠현, 소요와 관조, 혹은 제 분수대로 살아가기 등의 청정무위 개념으로 모아진다. 이런 이미지가 과연 타당한지를 따져 보려 한다. 무위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실은 노자가 아니라 공자인데 어쨌든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이 낳은 역사적 개념임을 주지해야 한다. 무위는 단순한 도덕론이나 청정의 자연합일론 혹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단순구조를 약간 말할 필요가 있다. 상부계층과 권력의 관계는 몇 가지로 나뉜다. 권력을 계속 장악하거나 아니면 장악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거나 혹은 같은 편의 권력지속을 위해 충언을 하는 적극적 나섬의 행위와, 아무 소리 않고 숨어 살거나 혹은 지금은 아니다싶어 때를 기다리는 소극적 물러섬의 행위가 있다. 여기서 권력에 아부하는 행위는 적극행위와 소극행위의 중간형태로 보면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때는 혼란과 난전의 춘추전국시대라, 적극적 권력참여는 자기보존을 매우 위협하는 행위였다. 여기서부터 유가와 도가의 구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유가 쪽은 덕화의 무위를 강조하였다. 덕의 강조는 군왕의 통치행위 스타일을 간섭하는 행위로서 일종의 참여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유가의 근본이다.

반면 정치적 제왕술과 주도술主道術로서 양생의 도를 강조하는 도가 프로그램이 크게 전파되었다. 특히 전국시대의 난전과 진대의 강권형 정부를 호되게 겪은 권력 주변부는 도가의 양생 정치를 매우 선호하였다. 양생이란 결국 내 몸을 보존하는 것으로서, 신체보존의 일차 목표는 정치적 숙청을 당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위는 소극적 물러섬의 有爲였다. 유방이 정권을 잡은 뒤 그런 호된 시절을 무마하고자 도가와 유가를 혼합한 제왕술의 황로학을 선호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현재의 입장에서 도가와 유가를 혼합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유가와 도가가 그렇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정확한 말이다.

당시에는 유가의 현실참여 지향성과 도가의 무위자연 지향성은 참여방식의 정도 차이일 뿐이었다. 19세기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신비주의 일색의 서양적 노장자 해석과 일제시대 정치참여 방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관된 일본식 노장자 해석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되면서, 현재는 청정자연의 소요와 목가적 관조가 마치 무위 해석의 주역처럼 바뀌었다.


그래도 유가지향의 나섬과 도가지향의 물러섬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섬은 직접 동기로부터 구체적 목적을 실현하려는 참여의 방법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계급불평등, 물적 불평등, 성적 불평등이 동기가 되어 민족저항, 민중연대, 장외정치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런데 나섬의 프로그램은 집단의 규범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본성적 측면을 놓칠 수 있다. 그래서 임지현은 박정희가 박정희 내부집단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음을 말했다.

인간의 본성을 연대 프로그램 안에 삽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개인의 직접 동기가 집단의 구체 목표로 이어지기도 전에 흐지부지해질 우려가 매우 크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평천하하려면 먼저 치국해야 하고, 치국하려면 제가해야하고 제가하려면 먼저 수신해야 하니 언제 치국평천하 할 수 있겠냐.

당대 이후 중앙집중형 정부에서부터 박정희 세력과 같은 무단정치의 권력유지의 도구적 이론으로 전락된 단계적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원래 단계적이 아니라 병행적이었거늘.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물러섬의 모습이다. 서글픈 물러섬은 나 안의 내부부터 내 안에 도사려진 박정희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집단적 박정희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서글픔을 단칼에 베어버리기 위하여 우리 안에 보편성을 찾는 일은 나섬의 필연적 과제이며 너무나도 행복한 우리의 미래이지만, 혹시나 규범적이고 당위적인 유토피아가 될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희연은 물러섬의 지향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자기 긍정”의 실천적 미래를 제시한다.

“과잉특수화”된 현실을 비판하면서 “보편적 독해”를 해내는 조희연은 “발견적 구성”이라는 아주 멋있는 방법론을 내놓기도 했다. 독해의 길이 이 정도 왔으면 이제 내가 제대로 아는 건지 모르나 내가 아는 조희연은 전의 조희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나 “우리 안의 보편성”이나 그 내용과 향방이 거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에 답을 주실 것이다.

방법론적으로 전자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어떻게 깨부수냐라는 자기파괴적 성찰을 보이지만, 우리 안의 보편성은 내 안의 보편성을 어떻게 찾아내느냐라는 자기긍정적 성찰을 갖는다는 차이일 뿐이다. 조희연은 자긍적 내부로 시선을 돌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참여지향적 나섬의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 그 미소 차이는 결국 우리 안의 파시즘과 우리 안의 보편성이 분리된 이미지가 아니라 결합형 이미지임을 알려 준다. 여기서 우리가 서구에 대한 과잉보편을 경계하는 동안에, 서구는 그들만의 보편을 과잉특수화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나섬의 참여와 물러섬의 성찰은 앞에 놓여진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점은 사실 인류사적 현상이며, 그래서 더욱 2500년 전 전국시대부터 유가와 도가가 같은 정치적 뿌리라는 점은 곧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확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섬과 물러섬은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배중율의 관계일 수 없다. 흔히 하는 말로 배중관계가 아니라 종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종합적이라는 말보다는 이중적이라는 자기성찰적 용어를 더 즐겨 사용한다.

지리적 공간을 탈피한 아시아적 보편가치, 이슬람 문명의 보편적 이해 등을 거론한 것은 충분 이해하지만 붉은 악마까지 보편적으로 독해한 점은 더 설명이 필요한 듯 하다. 지금 한창 길거리에 태극기 휘날리는 때라서 시점도 좋다. 그리고 한마디 더하자. 조희연은 이 글을 쓰게 된 개인적 상황으로서 아리기 교수가 “그것은 나에게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나 한국의 노동가들이 스스로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25쪽)라고 한 말에 대하여 지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아리기의 말에 너무 수치심을 가질 필요 없다.

이 책에 등장한 하버마스나 스피박 역시 그런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다 괜찮은 서구 지식인이기는 하지만 원래 보편을 그들 스스로 과잉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서구 지식인의 한 전형이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자기 과잉보편으로 동조화 될 수 있는 수순인데, 실제로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나는 이 책의 개별논문들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과학의 성과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말 그대로 “지적/학문적 주체화로 가는 창”이었다. 철학적 성찰을 직업으로 하는 나는 이런 실천적 글쓰기 모드가 부럽기만 했다. 그리고 서로 잘 아시는 분들을 넘어서 새롭고 폭넓은 필진을 찾아 다음 책을 만든다면 더 넓은 창이 될 것 같다. <끝>
우리 안의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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