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서평의 위치와 갈 길

과학서평의 위치와 갈 길 : 편협한 지식의 선전자로 전횡하지 않으려면



교수신문 [다시, 서평을 말하다]

2008년 03월 31일 (월) 12:02:48
 

과학책 서평 : 인문학적 관심이 필요하다



 서평의 형식과 내용이 이래야 한다거나 아니면 저래야 한다는 등의 규정된 틀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싶을 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선 출판사에서 보내준 보도자료나 신간안내문을 적절히 재조립해 서평이라고 내놓으면 안 될 것이다.

둘째, 내용 중의 일부를 따다가 원고를 채우면서 서평자와 원저자 사이의 입장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도 서평이랄 수 없다.

셋째, 더군다나 멋들어지게 문장을 만든 것 같은데 실상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서평 대상이 되는 책을 서문이나 마지막 장만 대충 훑어보고 쓴 것도 제대로 된 서평이 될 수 없다. 이럴 경우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적당히 호의적으로 서평을 쓰거나 아니면 신문에서 본 신간소개란이나 입소문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저자에 대한 평으로 왜곡 해서는 안 된다. 이럴 경우 대부분 저자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혹은 칭찬 일색이 되는 감정적 응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나 역자의 권위에 밀려 비판은 근처도 가지 못하고 책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생하는 서평도 꽤나 눈에 띈다.

다섯째, 혹시나 이런 일은 아주 드물겠지만 오자와 탈자 등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용어 사용 등의 문제점만을 논의하고 끝나버리는 것도 서평으로서는 싱거운 일이다.

우리가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이라서 더 보태진 문제가 있다. 우리의 서평은 번역서에 대한 특성과 문제점을 반드시짚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과학도서는 어린아이 전용이거나 아니면 논술대비용 책을 제외한다면 90% 이상이 번역서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번역서의 일반적 문제란  다 아시다시피 번역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검토가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원본 대조를 일일이 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번역서 서평을 자주하는 나 역시 찜찜했던 일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고 말 것인가. 아니다. 서평을 하려면 대상이 되는 분야의 전문가가 서평을 해야 한다. 관련 전문가라면 원본을 일일이 대조하지 않더라도 잘못된 번역으로 인한 내용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역서 서평을 하려면 책을 꼼꼼히 읽어야 하고 관련분야에서 폭넓게 공부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말이다.

“인문학적 관심, 분류학적 개념 아닌 주체적 견해다”한국의 현실에서 인문사회 분야와 달리 과학분야를 서평 할 사람이 많지 않다. 과학분야 전문가는 많지만 과학을 통찰하는 인문학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과학서평 역시 글쓰기의 행위다. 글쓰기란 어떤 유형이든지 글쓰는 이의 주체적 견해가 먼저 세워져야 하고 그런 견해를 적절히 표현하고 수월하게 전달해야 하는 조건이 준비돼야 한다.

여기서 인문학이라 함은 자연과학과 대치되는 그런 분류학적 개념이 아니다. 핵물리 과학자이든 시를 쓰는 시인이든,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는 공학자이거나 붓으로 세상을 재창조하는 화가이거나 관계없이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배려하고 지식과 언어를 서로 나눠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인문학적이며 그런 태도를 인문학적 관심이라고 할 뿐이다. 자연과학자나 기술공학자 그리고 인문사회학자 관계없이 모두들 이런 인문학적 관심을 가슴에 담아 둬야 한다.

아무리 과학서평이라 할지라도 서평할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인문학적 관심이 결핍돼 있다는 뜻과 같아진다. 실험실 연구에 몰두한 일선과학자라고 할지라도 역시 그 자신의 성찰적 삶이 있고 그가 사는 사회가 있어서 바로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그는 실험결과에 의한 연구논문만 쓰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연구를 하며 왜 이 논문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물음이 요청된다. 이런 물음은 논문의 구체적 내용에서 탈피해 자기 논문이 위치한 총체적인 맥락을 묻는 메타과학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요청이 바로 인문학적 관심이란 뜻이다. 이제 자연과학은 우리들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향력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혹시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이 사실 자체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전문가만의 소유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같이 나눠야 할 공유지식의 영역이 됐다. 과학관련 출간물에서도 논문 중심에서 번역서를 포함한 일반 교양과학도서의 출판이 급격하게 늘었다. 교양과학도서는 과학서 중에서 일반인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책을 말한다.

과학이라는 대단한 위상 앞에 교양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그 저서의 수준이 급격히 낮아졌을 것이라는 편견이 정말 크다. 그러면 교양과학서 말고 다른 과학저술은 어떠하며, 실제로 어떤 책이 있을까. 과학저술은 겉보기에 3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소위 교양과학서이며 다른 하나는 강의 교재용 전공서적이며 또 하나는 말 그대로 전문 연구저서일 것이다. 그럴듯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책의 내용이 서술적으로 써졌는지 아니면 수식이 많아서 복잡해 보이는 책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전문연구서적의 수가 극히 적어서 그런 분류조차도 먹히질 않는다.

논문이 아니라면 그리고 대학강의용 교재가 아닐 바에야, 과학의 내용을 서술방식으로 쓴 책은 거의 교양과학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양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선입관을 버린다면, 과학저서를 구분하는 기존의 기준은 불필요하다. 결국 과학서평은 교양과학저서에 대한 서평으로 국한한다고 해도 좋다. 그만큼 교양과학서의 범위와 수준이 의외로 넓고 깊어서, 말은 교양이지만 그 교양도서를 평가하려면 해당 전문분야를 넓게 아우르는 총체적 안목을 가진 서평자를 요청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안목이란 곧 인문학적 관심이다.

오히려 과학출간물은 서평과 논평으로 구분하는 것이 좋다. 과학이라 할지라도 서평은 그 대상의 장르와 무관하게 일반인이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써야한다는 점이다. 글쓰기란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좀 더 합리적 통로라고 본다. 서평의 글쓰기 역시 원저자의 뜻을 진단해 더 많은 사람들과 책의 내용을 음미하는 장르이다. 그래서 서평자는 원저자가 의도한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우리는 비평적 작업이라고 말한다. 전문지식을 발표하는 논문에 대한 논평이나 일반인을 염두에 둔 서평 모두 이런 비평의 내용이 전제돼야 한다. 또한 과학서평은 적극적 비평과 더불어 저자가 혹시 빼놓았던 과학적 개념과 용어를 친절하게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국에서는 과학저서를 쓸 사람이나 그 서평을 쓸 사람이 매우 적어서, 인문사회 계열이나 문학과 예술 부문과 같은 일반도서 서평과 달리 번역 도서에 대한 특성을 인정하고 과학서평론을 이야기해야 한다. 일간지 신문 1면을 과감히 할애해서 일 년에 걸쳐 날마다 좋은 책들을 소개해 많은 호평을 받았던 <경향신문>의 ‘책읽기 365’ 연재는 정말 괜찮은 기획이었다. 그 기획연재를 통해 소개한 책 252권 중에서 과학 관련 책은 겨우 15권에 지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 고유의 식물생태계를 주제로 한 2권의 책을 제외하면 13권 모두 번역서였다.

번역서였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과학도서에 대한 서평이 별로 없었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것이다. 대단한 분량으로 번역돼 나온 교양과학 번역서에 대해 많은 일간지들의 신간소개는 매우 적극적이고 그 기획의지도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해당 과학분야의 내적 평가 혹은 문화적 비평을 다루거나 나아가 번역 문제를 세밀하게 논의하는 등의 치밀한 서평은 드물었다는 점이다.

과학서평의 또 하나의 문제는 서평에 대한 응답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신간소개와 달리 전문가에 의한 서평은 어떤 방식이든지 답변이 돼야 한다. 번역서의 원저자로부터 직접 답변 받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번역 자체에 대한 번역자의 대답은 반드시 필요하다. 번역자가 전문 전공자가 아닐 경우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쳐도, 번역자가 관련 전문가인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과학서평, 다양한 응답 없다면 맹신 쉽다서평은 다양할수록 더 좋다. 편협적인 서평이 간혹 있어서 일반인들의 판단을 획일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나온 『이기적 유전자』와 최근에 나온 『만들어진 신』 두 권으로 이미 유명해 질대로 유명해진 도킨스는 그의 논적인 굴드로부터 사회생물학자라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인격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굴드와 생각이 같았다.

도킨스는 유전자 결정론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한편 최근 인간게놈프로젝트 책임자였던 벤터 교수와의 논쟁에서 유전자 만능의 실험과학 맹신론자들을 크게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책 내용의 전체를 못보고 권위와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켠의 서평이 혹시 있다면, 그 서평은 일반 독자들을 또 다른 선입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다.

윌슨의 유명한 저서인『Conscilience』가 『통섭』이라고 번역되면서 마치 윌슨이 인문학 찬양자라는 매우 오도된 인상을 주는 것도 원문을 제대로 읽지 않은 관련 국내 서평계에 책임이 크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요즘 쏟아져 나오는 진화심리학 관련 한국어 번역서들은 한결 같이 진화이론 중의 하나인 적응주의 이론을 채택한 사회생물학 계열의 책들이지만 다들 그 책에 나오는 배경이론이 진화생물학에서 잘 정립돼 확실하게 정착된 진화이론으로 오해하고 있다. 『욕망의 진화』, 『거짓말의 진화』, 『이웃집 살인마』, 『섹슈얼리티의 진화』, 『승부욕』 등 책 제목부터 유혹적인 진화심리학 과학도서들은 정말 잘 쓴 책들이지만 그 책의 내용이 갖는 문화사적 의미를 총체적으로 보는 인문학적 관심이 결여됐다면 그런 책들 모두 편협한 지식의 선전자로 전횡될 수 있다.

최종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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