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연 현상이 있을까?
대니얼 데닛 (지은이) | 김한영 (옮긴이) | 최종덕 해제 | 동녘사이언스 | 2010-05-17

신간 <주문을 깨다 : 우리는 어떻게 해서 종교라는 주문에 사로잡혔는가?> 원제 Breaking The Spell: Religion as a Natural Phenomenon

해제: 초자연 현상이 있을까?

1. 데닛의 <주문을 깨다>, 그리고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종교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종교현상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종교인류학이나 종교사회학 관련 책을 들춰보면 된다. 그런데 최근들어 사회과학 분야가 아닌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종교를 다룬 세계적인 대작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로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낸 진화생물학자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2006년에 다시 내놓아 또 한권의 베스트셀러를 추가했다.

그런데 같은 해 생물철학자 다니엘 데닛도 <주문을 깨다>라는 제목으로 종교를 비판하고 그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강한 논조의 이 책을 선보였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원서가 출간된 다음 해에 한국어판으로 나왔지만, 데닛의 이 책은 원저 출간 이후 4년 만에 한국에 선을 보이게 된 셈이다.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자로서 익히 유명해졌지만, 데닛은 도킨스에 비하면 대중적 지명도가 덜하다. 그런 이유로 책이 늦게 번역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닛의 <주문을 깨다>는 자연과학적 논증에 의존한 도킨스의 책보다 경험과학의 객관적 근거자료에 충실했다. 두 권의 책은 생물학과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 각각 속해 있지만, 진화론을 기반으로 쓰여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2. 종교의 진화론적 변형

특히 데닛의 책은 철학자답게 엄밀한 논증을 통해 종교 현상의 자연화를 시도한다. 오늘날 현존하는 종교들의 역사는 호모사피언스의 역사에 비교하여 백분의 일도 안 되는 불과 2000 년 안팎의 짧은 시간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짧은 역사의 기성 종교들이 오늘날처럼 형이상학의 배경을 갖게 되고 혹은 빠른 시간 내에 권위주의와 도덕주의로 승화하게 된 역사적 변형을 주목하고 있다.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자답게 유전자와 동등한 소위 ‘밈’이라는 복제자의 진화과정으로서 이런 변형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밈의 진화는 유전자의 진화보다 복제의 속도가 매우 빨라서 2천년의 짧은 역사에서도 그 변형이 크게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데닛과 도킨스는 의견을 같이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한다. 더욱이 데닛은 진화생물학적 근거와 더불어 다양한 각도의 인류학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좀 더 철학적인 냄새를 많이 풍긴다.

이 책은 위의 두 측면의 논증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두 논증방식이 하나의 챕터 안에서 적절한 보완관계를 이루면서 책의 주제를 끌어가고 있다. 이 점을 인지하는 것은 이 책읽기의 지름길이다.

3. '밈’ 대신에 ‘지향적 자세’로

이 책은 30년 가까운 데닛의 철학적 분석을 ‘종교’라는 현실의 문화적 현상에 적용한 종합적 성과물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진화생물학적 기본 개념을 미리 짚어 본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적 문화현상을 접하기에 더욱 수월해진다. 첫째 그의 ‘지향적 자세’ 개념을 요약해서 정리한다. 데닛은 도킨스가 제시한 밈의 개념을 수용하면서 그 보다 한발 더 나간다. 밈과 유전자가 다른 종류의 복제자이기는 하지만 두 종류 사이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데닛 철학의 특징이다.

데닛은 그 공통점을 지향적 자세intentional stance라고 표현했다. 데닛의 지향적 자세 개념은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계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최소 단위의 운동 개념을 찾아보려는 생물학적/ 철학적 시도에서 탄생되었다. 생명계가 아닌 무생명계에도, 즉 모든 자연종에 지향적 자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는 것은 해바라기가 해를 보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신진대사 활용율을 최대화하게끔 적응된 것이다. 호모사피언스가 피부에서 털이 없어진 이유는 이성reason적 인간이 되는 최적화 진화의 적응결과일 뿐이지, 인간이 스스로 털을 없애야겠다는 모종의 정신작용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벽녘 이파리에 붙은 작은 이슬방울은 어떤 감정이나 의식의 현상이 아니라 단지 기온 차이에 의한 물리적인 결과일 뿐이다.

이런 현상 모두를 하나로 꿰어서 지향적 자세라고 부른다. 앞서 말했듯이 지향적 자세 개념을 착안하게 된 데닛의 철학적 동기는 모든 생명체 나아가 모든 자연체에 대하여 공통분모를 찾아내고자 함에 있었다.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성이 바로 그 공통분모이며, 그것을 지향적 자세라고 본 것이다. 그러한 공통분모의 특성은 실체적인 모종의 양상을 갖기보다는 일종의 ‘성향 혹은 경향’의 수준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데닛은 이런 경향이 단순한 성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향 자체가 실재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벌써 이런 수준까지 논의가 이어진다면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철학적 논증이 필요하므로 본 해제에서는 그만두기로 한다.

4. 지향적 체계로서 종교

논의의 초점은 따로 있었다. 데닛의 이러한 지향적 자세 개념이 왜 종교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개념적 도구인지를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종교 현상이 다른 문화 현상과 별도로 다른 최상의 지위를 가질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점을 설명하려는 데 있다. 예를 들자면 음악을 듣는 문화체계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체계, 건강을 지키려는 생활체계 등은 종교 체계와 동일 수준의 지향적 체계라는 점이다. 종교 체계는 무수히 많은 인류의 문화체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나아가 종교 체계는 자연적인 지향적 자세가 누적적으로 진화해 온 결과이며 앞으로도 진화할 것이라고 데닛은 강조한다. 물론 그 진화의 방향과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화학적인 자연법칙을 위반하지 않는다. 자연법칙을 따르지만 어디로 진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를 데닛은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free-floating rationale라고 표현했다. 이 책에서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이 개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책읽기가 아주 편해진다.

5. 철학자 콰인의 영향

과거에서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종교체계는 어떻게 변형될지 모르지만 어디론가 진화한다고 말한다. 생명 유전자가 진화하듯이 문화체계인 종교도 진화한다. 생명계이건 문화체계이건 간에 공통적으로 진화의 특성을 갖는데, 그 근거가 바로 두 체계 모두 지향적 자세를 기본 성향으로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지향적 자세 개념은 데닛이 처음 생각해 낸 것은 아니다.

그 원형은 이미 스피노자와 베이컨, 데이비드 흄과 윌리엄 제임스 및 버틀란트 러셀에서 비슷하게 찾아진다. 좀 더 가까운 개념적 근연관계로서 데닛의 하버드 대학 스승인 언어분석철학자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은 데닛의 철학적 사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을 믿는다’ 혹은 ‘무엇을 원한다’ 라는 식으로 무엇을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표현의 관용구들을 의지의 측면을 전부 제거한 채 외연의 행동주의 언어로 재해석한 것을 콰인의 업적이라고 보통 평가한다. 이런 환원적 재해석을 유물론적 제거주의eliminative materialism라고 부른다. 데닛의 지향적 자세 개념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콰인의 유물론적 제거주의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런 둘 사이의 철학적 관계를 이해한다면 데닛의 생물철학 내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6. 진화론 논쟁들의 재구성

하나 더 예민한 문제를 거론해야 할 것 같다. 데닛의 <주문을 깨다>는 종교비판서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닛은 생물철학자답게 이 책에서 진화생물학 논쟁의 다양한 해석들을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진화종합설 이후 진화론 논쟁의 중심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적응주의 논쟁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선택의 수준이 개체에서 일어나는지 아니면 집단에서도 일어나는지 아니면 도킨스처럼 유전자 수준에서만 자연선택 과정이 일어나는지를 따지는 치열한 논쟁이다. 이 두 논쟁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내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진화 적응주의를 고수하려면 집단 수준의 선택 논점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집단 수준의 선택이론을 주장하기 위해 적응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적응주의 논쟁의 핵심에는 하버드 대학의 진화생물학 노선을 이어가는 윌슨 교수와 일찍 죽은 굴드 교수 사이의 논박이 있었다. 생명체의 모든 형질들이 과연 적응의 결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론을 굴드 교수가 제기한 것이다. 이 논쟁점을 이 짧은 해제에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핵심에는 적응의 결과만이 아니라 단지 적응하는 과정에서 부산물의 형태로 생겨난 형질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어디까지 용인하느냐의 문제이다. 어쨌든 적응주의와 부산물 이론, 더 나아가 이런 논쟁의 틀에서 벗어난 발생학적 계통이론들 모두를 데닛은 적절하게 조화하고 종합하여 기성 종교의 허상을 비판하는 개념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택 수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슬론 윌슨의 <종교는 진화한다> (국내번역)라는 책이 있는데, 데닛은 슬론 윌슨과 생물철학적으로는 갈라서 있지만, 종교비판이론에서는 슬론 윌슨에 동조하는 면이 많다. 즉 평소에 집단 수준을 주장하는 슬론 윌슨의 선택이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데닛도 종교 비판을 위해서는 집단 수준 선택이론을 개념적 도구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진화생물학과 생물철학에 걸쳐진 다양한 담론들을 흡수하고 재탄생시키는 학문적 기질과 원리주의 교회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비판적 용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7. 이 책의 전개논리를 정리한다면

2006년도 과 함께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미 충격을 받을 만큼 받았다. 기성종교를 비판하는 그의 용기도 용기지만, 엄청난 역사적 근거자료와 단단한 진화생물학적 기초, 그리고 합리적인 논리전개를 통해 저술했다는 점을 긍정한다. 이 책을 전개하는 서술논리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문화적 체계이다.

문화는 지향적 자세의 양상이다.

인간 문화양상에서 종교는 대표적인 지향적 자세이다.

생명유전자가 진화하듯이 지향적 자세도 똑같이 진화한다.

진화의 방향에는 목적이 없으며 마찬가지로 지형적 자세도 목적이 없다. 그러나 자연의 물리-화학법칙의 재한을 받는다. 이를 데닛은 “부유하는 합리적인 근거들”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적응주의, 비적응주의, 발생계이론, 개체선택이론, 집단선택이론 등의 다양한 진화이론을 통해 종교현상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종교도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들의 조건을 받는 지향적 자세이다.

그래서 종교의 원리들은 자연적인 변형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체계일 뿐이다.

종교에서 선험적 절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라는 지향적 체계는 도덕적 원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 도덕적 원리는 절대적인 선험성이 아니고 인간사회의 최적화를 위한 자연적 체계일 뿐이라는 점을 데닛은 강조한다. 그래서 종교 역시 도덕적 숭고함을 갖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그런 숭고함이나 절대성은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밈의 진화역사 속에서 인간사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8. 안 읽어도 되는 조금 복잡한 이야기

여기서 종교적 도덕주의를 형성한 과정도 역시 ‘지향적 자세’의 반경 안에 들어오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종교의 도덕적 방향을 어떻게 정위시켰는지를 데닛은 논리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향적 자세는 진화하며, 진화는 방향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방향 없이 부유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종교의 진화 방향이 부유한다고 했는데, 도덕성이라는 문화적 밈이 형성되게끔 어떻게 방향 지워졌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데닛은 분명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발생계 이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 가능하다. 그리고 데닛도 그런 발생계 이론의 강점을 잘 안다. 그러나 데닛은 원래 비적응주의 이론 및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해본다.

데닛은 몸이 장대하고 기질 자체가 아주 다혈질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주장에는 종교에 대한 강한 문화적 저항감이 실려 있다. 그러나 데닛은 지나치게 강하게 보이는 자신의 이런 주장조차 실은 현실의 종교 현상을 제대로 들춰내지 못했다는 언질을 한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따져보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야 할 듯하다.

주문을 깨다

되돌아가기

전체목록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