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 그런 권위에 눌리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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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11월24일 미디어스 원고 제출

이효리, 그런 권위에 눌리지 마시오


최종덕(상지대, 철학)


1. 권위는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에서 사자끼리 피까지 흘려가며 심하게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암컷을 차지하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숫사자 간 우두머리 경쟁을 하는 것이다.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죽지 않더라도 상처 후유증으로 나중에 죽는 경우도 있단다. 다 큰 숫사자들이 모두 피터지는 싸움에만 매달린다면, 정자를 전해 줄 숫사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면 집단 생식빈도도 줄어들 것이다. 보통 우두머리 경쟁을 하는 숫사자들은 이미 어느 정도 힘이 세고 등치가 큰 우성 유전자를 갖는 놈들이다. 우두머리 경쟁에 참여한 우성 유전자의 숫사자들의 수가 적어진다면 그 사자 집단의 생존 자체가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된다.

다행히 이런 상황에 자연스럽게 대처하도록 사자들의 행동형질은 적절하게 진화되었다. 우두머리 경쟁에 참여한 숫사자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물의 왕국 류의 프로그램 카메라는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치열한 싸움 장면만을 담아서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의 사자 집단에서는 서로 얼러붙어 가며 상대의 힘을 나의 힘과 견주다가 서로 쎄게 싸우기보다는 어느 한 놈이 물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쓸데없는 상처와 죽음을 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는 숫사자는 집단 내 암컷과 교미하는 대장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생존을 보장받거나 아니면 나중에 새로운 집단을 만들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유인원 종인 고릴라 집단에서는 우두머리 후보 사이에서 서로 견주는 행위는 더 정형화되어 있다. 서로 가슴을 치거나 부풀려 보이는 행위나 소리를 크게 질러서 상대를 위협하여 본격적인 싸움을 최소화한다. 몸싸움이 실제로 일어나면 부상 위험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부상이 클 경우 싸움에서 이긴 승자도 우두머리가 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서로 알기 때문이다.
우두머리는 집단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권력을 쥔 우두머리가 된 이후에도 다른 수컷으로부터 우두머리 자리를 지속적으로 위협받는다. 그때마다 매번 싸움에 얼러붙을 수는 없다. 현존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잦은 싸움에서 오는 부상을 입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싸움을 걸어오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권력유지를 위해 지나친 에너지를 사용할 경우 그 우두머리의 권력 유지 비축비용은 곧 소진된다. 그 이후 권력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부상 위험이 큰 싸움을 최소화하면서도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행동형질이 바로 권위 양식이다.

권위는 권력유지의 최소비용 양식으로 진화된 특이적인 동물행동 형질이다. 우두머리 혹은 지배그룹은 항상 권위를 만들어간다. 권위적 행동에는 다음의 네 가지 (1) 편가르기 (2) 서열짓기 (3) 도구적 베풀기 그리고 (4) 위세부리기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편가르기는 권력 유지 중요한 양식이다. 평소 집단 내 구성원에게 상과 벌을 내리며 상과 벌을 내리기 위해 편을 가르게 된다. 우두머리에게 절대 복종하는 편과 그렇지 않은 편을 나누어 상벌을 구분한다. 둘째 서열짓기는 권력을 경제적으로 유지하려는 양식이다. 집단 구성원에게 권력의 존재를 확신시킴으로써 우두머리 권력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권력지향 집단은 집단 구성원 사이의 서열을 만든다. 서열 구조는 우두머리 혹은 우두머리 소수집단의 안정적인 먹이+생식 확보를 위한 일종의 사회 시스템에 맞춰진다. 이런 점 때문에 권력유지 행동형질 혹은 권위 행동형질은 당연히 포유류 진화의 중요한 한 단면이 된다. 셋째 도구적 베풀기이다. 우두머리는 수혜적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상승시킨다. 일부 유인원 집단에서 이러한 권위 행동형질은 ‘어루만져주기’로 진화했다. 하위 서열 원숭이가 상위 서열 원숭이의 털을 골라주는 것은 서열구조상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상위 서열 원숭이가 하위 서열 원숭이의 털을 골라 주는 행위는 앞서 제시한 권위의 둘째 조건과 상충된다. 그럼에도 이런 행동이 빈번히 발생하는 이유, 즉 우두머리가 하위 서열자의 털을 골라주는 이유는 우두머리가 하위자에게 수혜를 베품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더 안정화시키려는 데 있다. 이는 수혜를 통한 권위 상승의 행동형질이다.

넷째 위세부리기다. 우두머리 자신의 위용을 만들어가야 한다. 위용을 보이기 위해 위세를 떤다. 위세에는 내적 위세와 외적 위세가 있다. 내적 위세는 풍채를 크게 혹은 화려하게 보이거나 혹은 포효하는 등 수없이 다양한 생물학적 표현양식을 통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개구리가 자신의 몸 크기에 가깝게 얼굴의 빰을 크게 부풀리는 행위나 짝짓기를 맞은 수컷 새들이 암컷 새들 앞에서 노래로 지저귀거나 사자 갈기를 곧추세우는 것에 해당한다. 반면 외적 위세는 우두머리 침팬지가 나무 작대기를 세게 두드리거나 먹이를 많이 모아서 쌓아놓는다거나 아니면 튼튼하고 화려한 집을 지어서 보여주는 일종의 사회적 행동양식들이다.

동물에서 권위의 네 가지 양식은 기본적으로 짝을 구하려는 짝짓기 행동과 연관되지만, 인간에게서는 짝짓기와 더불어 자기 개인의 풍요로운 존속과 후손 생산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도구가 된다. 특히 거대 문명사회를 이뤄낸 인간에게서 위세부리기 양식 중 ‘외적 위세’ 양식은 매우 특이하게 진화하였다. 인간 사회의 권력 획득 예비자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대단한 모험을 한다. 그만큼 한번 차지한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한다. 권력을 쥔 권력 획득자는 제일 먼저 편을 가르고 서열을 짓는다. 그 이후 권력을 장기화하기 위하여 벌과 상을 내린다. 그와 더불어 인간사회의 권력 획득자는 위세를 조장한다. 인간에게서 생물학적 위세는 한계가 있다. 인간사회에서 권력을 쥔 경우는 대부분 신체적 힘과 더불어 심리적 전략을 도모한다. 심리적 전략의 대부분은 ‘외적 위세’의 양식을 띈다. 특히 인간사회의 권력집단의 가장 튼 특징은 외적 위세를 확장하는 데 있다.

2. 이효리를 둘러싼 위세적 권위의 모습들

인간 사회 권력구조에서 볼 때 자연스럽게 유발된 외적 위세만이 귄력을 가장 오랜 동안 유지할 수 있다. 이 점은 다른 동물사회에서 한발 더 나간 인간사회의 가장 특이적인 진화형질이다. 자연적 외적 위세는 쉽게 말해서 자기 권력을 보여주려는 소위 자가발전하는 위세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스스로 권력을 인정해주는 현상이다. 불행하게도 호모사피언스의 권력 욕망과 자연적 외적 유세의 진화형질 사이에는 간극이 크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욕망은 자연적인 권위에 만족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권위를 창출하려는 데 있다. 그래서 집단 내 구성원들이 권력자 혹은 권력집단의 권력을 인정해 주지 않을 경우 권력자는 자기 스스로 자가발전하는 위세를 떤다.

인간 사회의 권력과 위세의 원형적 의미를 앞서 말했다. 자, 이제 우리 현실에서 나타나는 위세의 자가발전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지방자치제 이후 지방의원들은 그 위세가 당당하다. 지역 유지들이 지방의원에 많이 당선되었다. 지역유지라는 분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한 밑천 가진 사람들이어서 관련된 지역주민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방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은 주민 복지보다는 중앙 국회의원 특유의 거드름을 따라하는 데 온 힘을 다하기도 했다. 지방의원이 되자마자 어떤 이는 조선시대 임금을 생각하면서 용상이 새겨진 책걸상으로 의원실 가구를 바꾸기도 했다. 위용에서 시작된 그들의 거드름은 거의 동물적인 외적 위세의 원형 그 자체였다. 그런 거드름은 관공서의 건물 외형에까지 이르렀다. 많은 지자체 시청 건물을 호화롭게 건축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자체는 빚을 내서라도 위용있게 짓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지방사회가 한층 개방화되면서 그런 사람들의 그런 위세적 행위가 아무 영향력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살고 있는 원주의 지방의회를 예로 보자. 원주에서 최근 선거를 마친 신진 지방의원 의장이 나서서 권위의 상징이었던 시꺼먼 관용차 대신에 하이브리드 중소형 승용차를 선택했다. 원주지역 어떤 여성 시의원은 아예 승용차 없이 걷고 버스타고 다니면서 주민들의 소리에 귀기울인다. 사소한 일로 여길 수 있지만 실은 대단한 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권위를 부리지 않는 그런 일상의 변화만이 진정한 권위를 가져다줄 것이다. 외적 위세를 아무리 부려도 자연적인 권위는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권력자가 조금씩 깨달을 때 우리 사회는 진짜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여전히 위세를 통해서 자가발전의 권위를 지키려는 권력 유형이 아직 넘쳐난다.

가수 이효리와 연관한 이야기다. 이번 가을 국정감사장에서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이효리는 어느 한우 브랜드의 광고홍보대사 모델로 활동한다. 그런데 이효리의 한우브랜드 모델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국정감사에서 나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우 브랜드를 광고하면서 노랑 머리의 이효리는 적절하지 않다는 모 국회의원의 발언이 있었다. 또한 그 의원은 “광고는 모델의 영향력이 큰데 한우 광고에서 표절 논란이 있던 모델을 캐스팅해 국민들이 한우광고를 볼 때마다 표절을 떠올려 결국 원산지 허위표시 등 한우의 부정적인 면을 생각나게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술 더 떠서 2009년 한우 홍보 모델이었던 배우 최불암은 광고모델료가 9천500만원이었으나 이효리는 3억3천만원을 받았다고 공개하며 공익적 성격의 한우광고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 그런 발언에 대해 어느 누구도 콧방귀도 안 꾼다. 국정감사장에서 행한 의원의 발언에는 권위의 둘째 양상인 ‘서열짓기’와 넷째 양상인 ‘위세부리기’ 행동형질을 은연중에 포함한다. 최불암과 이효리 사이에 일종의 문화적 서열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여기에 언급된 연예인들은 권력자의 서열짓기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또 하나의 서열이 숨겨져 있다. 대중은 감사 혹은 감시의 대상이며, 감시자는 피감시자와 다르다는 서열의식을 보여준다. 위세부리기는 그 다음이다. 월급 받고 살아가는 어느 서민에게 월급을 공개하라고 하면 그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아픔이 된다. 마찬가지로 대중연예인에게 당신이 이번에 받은 광고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하면, 그런 일은 그의 자존심을 무시한 강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감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외적 위세의 행동형질이다. 표절 문제 역시 작품에 대한 진정성있는 지적이기보다는 다른 본류를 지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핵심을 빗겨갔다.

대중은 이효리를 좋아한다. 나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하기 쉽지 않다. 이효리에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이효리를 좋아하는 대중의 주체적 감성이 첫째가는 이유다. 대중의 주체적 감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소위 정치적 권력집단에 해당한다. 그들은 대중의 주체적 감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대중을 감시와 제어의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도덕, 그들만의 윤리 잣대로서 대중을 바라본다. 하물며 대중의 시선에 맞춰진 그런 무대에 올려진 이효리쯤이야 쉽게 그들의 윤리 그릇 안으로 재배치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쉽게 생각한다. 이효리도 알고 이미 대중들도 다 아는 일이지만, 대중은 그들만의 권위를 가속화하는 권력형 대중 감시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데 말이다. 사람 알아보는 대중의 눈이 많이 섬세하고 밝아졌기 때문이다. 사람 알아보는 눈이 밝아졌으니, 이제부터라도 선거할 때 사람다운 사람 고르는 투표 맛도 세질 것 같다. 이효리는 그런 위세에 눌릴 만 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권력자의 권위적 형태 안에 묘한 차별적 권력이 숨겨져 있었음을 이효리는 감지했을 것이다.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일종의 캐릭터로서의 이효리이기는 하지만, 이효리는 기존 혹은 관성적 권력구조와 위세에 눌리지 않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준다. 그런 그녀의 태도 때문에 대중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연예인으로서의 권위를 그녀에게 부여한다. 연예인과 정치인 사이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다. 정치인은 자신의 권위를 자가발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려하지만, 연예인은 그런 인위적 자가발전으로는 자신의 권위가 애초부터 생길 수 없음을 원초적으로 알고 있다. 혹시나 일부 인기 연예인들이 대중적 권위를 얻은 후에 소집단 내 권력구조 향취에 중독되는 경우가 있다. 돈을 얻은 다음에는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권력변화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 권력에는 인위적인 권위만이 도사려 있다. 마치 정치인의 권력과 같아진다는 뜻이다. 그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연예인은 마치 정치인인양 행세하게 된다. 거기서 자생적 권위는 더 이상 없다. 그런 정치적 권위는 대중으로부터 어느덧 소외되고 만다. 연예인이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이유는 대중의 주체적 감성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연예인이 정치인처럼 대중의 주체적 감성을 제어하려 하거나 믿지 않으려 한다면 그의 대중적 권력은 한때의 거품이 되고 만다.

이효리는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그런 권력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다 말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복잡하고 얽혀있지만 남들에게 겉으로 보여주는 것은 매우 단순하게 하고 싶어 한다. 대중은 복잡하지 않고 심각하지 않게 보이는 이효리의 캐릭터를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그렇지만 많은 대중들은 이효리의 내면적 복합성을 느끼고 있다. 복잡하지 않은 그녀의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녀에게 내면적 복합성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이효리의 솔직해 보이는 모습 때문이다. 이효리의 솔직함이 정치인처럼 전략적 솔직함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솔직함이라는 것을 대중은 직감한다.

나는 이효리를 잘 모른다. 다만 매체에 드러난 이효리의 캐릭터만 알 뿐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내면적 복합성은 상당한 그녀 자신의 인간적 부담감을 동반할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에서 대중은 이효리를 더욱 좋아한다. 그리고 이효리의 그런 내면적 얽힘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소중한 무기가 된다.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자신이 권위를 만들기 위하여 자가발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자나 여자나 이효리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나도 나서서 이효리를 좋아한다. 자가발전하는 권위에 익숙해진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나서 나는 오늘도 이효리의 텐미닛과 겟차를 듣는다. 그들의 윤리기준으로는 이효리의 텐미닛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이효리를 그냥 그대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면, 권력이 짜놓은 편가르기, 서열짓기, 도구적 베풀기와 벌주기, 그리고 위세부리기의 권위로부터 우리 모두 탈출할 수 있다. <끝>
미디어스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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