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서양근대철학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12인공동저서), 다시쓰는 서양근대철학사, 오월의봄 2012년7월
 

희극의 재탄생


한국 철학자의 시선으로 다시 쓴 서양 근대철학사. 서양 철학의 수용과 비판적 조명을 통해, 한국 사회의 삶을 주체적으로 반성하고, 우리 삶에 통찰력을 발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적으로 철학사 쓰기는 우리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의미가 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첫 권으로 서양 근대 철학을 다룬 까닭은, 서양 근대에 형성된 과학과 철학이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바로 서양 근대를 이해해야 우리 사회의 근간도 파악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다시 쓰는 서양 근대철학사>를 철학사 시리즈의 첫 권으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07.30(월)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닌 한국 대중의 현실적 삶에 연결되는 철학 고민” 2012.07.27 20:04

다시 쓰는 서양근대 철학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12명의 철학자들이 내놓은 <다시 쓰는 서양 근대철학사>(오월의봄)에서 ‘다시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책의 첫머리를 여는 글을 쓴 최종덕 상지대 교수(57·사진)는 지난 25일 전화 인터뷰에서 두 가지 문제의식을 꺼냈다.

“우선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과 호흡하는 철학을 추구했습니다. 나아가 서양의 근대가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지를 찾아보는 재해석에 초점을 뒀습니다.”이를테면 한때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칸트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사적인 사용’을 구별했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이 자신의 직무와 직업에 따라 개별적이고 사적인 조건에 제한된 상황을 전제로 한다면, 공적으로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에 대해 공평무사한 이성의 소유자로 사유하는 것이다. 즉 특정 지역, 직업, 인종, 가문, 성별을 떠나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사유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의 처지는 각자 달라서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지만 보편적인 차원에서는 이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예컨대 월가 점령 시위와 유럽 재정위기에서부터 희망버스와 노동자 파업, 선거 등을 생각하고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이렇듯 ‘이성의 공적 사용’은 현대에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가 ‘공론장’이라 부른 것, 한나 아렌트가 ‘정치의 공적 영역’이라 부른 것의 원형이 된다.칸트 분야를 집필한 박지용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 어떤 매체를 통해서건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정치적인 의사소통의 기능을 활성화할 때 정당정치 일색의 기존 정치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 공론장의 공간이 열릴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꼼수다>의 인기는 그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투표를 통해 정치인을 선출하는 것도 정치지만, 시민의 자발적인 논의로 ‘무상급식’을 사회적 의제로 확산시키는 것도 정치적 행동이라고 본다. 칸트가 말한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시민적 정치 담론의 공간을 조망해 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칸트의 세계시민은 결국 현실 국경을 철폐하자는 얘기라기보다 이렇게 세계사적, 전체 인류적 관점으로 넓어진 사유의 지평을 뜻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국가들이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고, 각 국가들은 모든 구성원들이 ‘목적’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최근 불거진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의 문제도 철학적으로 보면 특수와 보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세계시민적 관점에서는 특수와 보편이 충돌하는 게 아니라 공존할 수 있다는 게 칸트의 얘깁니다. 우리가 애국심이라고 말하는 것의 진짜 정체가 뭔지, 이런 것들을 한 번 살펴볼 수도 있는 사유죠.”철학자들은 근대의 탄생에서부터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비롯해 홉스, 로크, 흄, 루소를 거쳐 칸트와 헤겔에 이르는 사유를 탐험했다.

책은 서양 근대철학자들의 인식론 계보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타의 ‘서양철학사’들과 달리 인식론 계보와 동반되는 정치철학적 논의를 함께 살펴봤다. 이는 철학자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총아’라는 맥락에서의 접근이다. 그들은 신교와 구교의 갈등, 절대왕정과 도시국가의 형성, 봉건제 해체로 인한 자유도시와 무산계급의 출현, 경제적 좌절이 낳은 혁명 등을 겪으면서 정치와 철학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겠다는 시도다.“칸트나 헤겔이 제시하는 개념들은 그들이 역사를 헤쳐가면서 현실을 풀어가는 도구였습니다. 당대의 사회적 문제와 접속하기 위한 통로였죠. 그렇게 살아있는 철학이 오늘날에는 근대철학이나 인식론이란 이름만으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책을 덮으면 그걸로 끝나는 철학이죠. 그들의 문제의식을 살펴보는 것은 시대도 역사도 지리적 위치도 다른 한반도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다시 재생산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특히 최 교수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피폐함, 전 지구적인 경제불황 이면에 깔려 있는 자본의 권력, 물질 권력이 근대 정신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본다. 서양 근대철학자들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사회계약론의 토대가 소유권의 보장이라고 봤던 로크가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대의 지명수배자였던 로크가 당대에 제기된 문제들 속에서 그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투쟁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의 사유가 좌초된 곳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새로운 과제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의 경우에도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자연 회귀는 아닙니다. 당대 귀족 세계의 불평등이 결국 소유와 연관돼 있고, 자연으로부터 많이 착취한 이들이 많은 걸 소유하고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이 상태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추상적 주장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최대한 내놓을 수 있는가, 포기할 수 있는가라는 구체적인 문제죠.”이번 책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지난해 진행한 강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오는 8월부터 이 책을 갖고 다시 2차 근대철학사 시민강좌가 열린다.<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원고 중 일부



2) 이데아의 비극적 존재

플라톤은 질료와 물질을 통해서는 영원하고 독립적이며 무모순이며 일관되며 불변의 항상성을 지닌 존재의 진리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다수적이고 움직이고 의존적이며 모순으로 가득한 바로 이 현상의 세계를 넘어서 저기 저 넘어 완전한 존재가 실재하는 세계를 설정하였다. 그 완전한 실재의 세계는 불변의 영원, 무모순과 일관, 정지하고 있으며 자기독립적인 존재의 세계라고 했다. 그는 그런 세계를 이데아라고 했다. 바로 그런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비극은 탄생한다는 것이 본 이야기의 출발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나의 현상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며 독립적이다. 현상계는 다수적이며 흔들리어 움직이며 모순적이지만, 이데아의 세계는 그런 현상의 나와 무관하게 굳건하게 중심을 흔들리지 않고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제어한다. 비극은 그런 정지된 이데아의 세계가 나의 인간적 현존과 무관하게 운행된다는 사실에서 탄생한다. 나를 포함한 인간의 세계는 따듯하고 축축하며 화려한 색깔로 가득 찬 곳이다. 이곳에서는 온기와 습기 때문에 존재들은 썩고 부패하기도 하며 상처받는다. 또한 이곳에서는 색깔 때문에 착각과 억측, 오해와 거짓이 난무하기도 한다. 반면 이데아의 세계는 차갑고 건조하며 색깔이 없는cold, dry and colorless 냉정한 정지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그 냉정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억측과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의 희망과 욕망이 투영되지 않는다. 존재의 세계는 그냥 인간과 무관하게 완전성의 법칙에 따를 뿐 인간의 감정과 인식구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우리와 무관하게 운행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비극의 탄생이다.

엄연한 저기 저 존재의 세계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도 않으며 나의 애원을 받아주지도 않는다. 나의 인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어서, 나는 저 세계를 알 수도 없다. 불완전이 완전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아픔 고민과 우연들에 섭동하거나 공조를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이라고 한다.

비극의 존재는 인간에게 경험적인 인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칙의 세계, 절대 신의 세계, 완전 이데아의 세계는 너무나 완전하여서 현상에 얽매인 인간의 경험으로는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없으며 단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저 세계의 완전성에 접근하기 위하여 경험의 도구를 일체다 버리고 엄격한 수학적 이성의 지배를 받도록 요청했다. 수학적 이성은 그나마 현상의 지배를 덜 받는 독립적 사유를 조금 허용한다고 생각했다. 수학적 사유가 완전한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로서 가능한 이유가 나름대로 있다. 수학적 사유만이 오로지 완전하며 불변하여 독립적이며 유일하며 정지적이며 무모순의 실재reality가 불완전하며 다수적이며 의존적인 이 세상에 투영된 흔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3) 희극을 엿보다가 곧 봉쇄되었다

플라톤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도 완전 실재의 저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보았다. 실재가 이 세상이 투영되는 흔적의 정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차이가 약간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이 비춰진 투영 흔적을 아주 강하게 여겼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강하게 보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이데아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가능성을 매우 높게 상정하였다.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경험적 노력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분류의 방법이었다. 경험대상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구분함으로써 존재의 진리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이것이 분류학의 시초이며, 바로 과학 탄생의 맹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과학은 저 세계를 엿보는 인간의 인식도구였다. 플라톤에게서 저 세상의 진리를 엿볼 수 있는 사유의 도구가 형이상학이었다는 점을 비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간이 진리 접근하기 더 쉬운 통로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희극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플라톤에게서 형이상학이 기초되어졌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과학의 기초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에게서 비극이 형성되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희극의 그림자가 비춰질 여지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희극은 곧 끝나고 말았다. 중세로 접어든 신의 역사는 겨우 씨앗이 트기 시작했던 희극의 극장을 봉쇄하였다. 희극을 봉쇄한 권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체의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넘보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였다. 경험적인 인식통로를 차단했으며 나아가 합리적 이성을 통해 세계존재의 비밀을 캐는 일을 금지했다. 오로지 신념으로만 저 세상의 모습을 느끼도록 강요받았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 자연을 관찰하거나 과학을 통해 세계를 알고자 하는 행위 자체는 신의 절대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희극을 봉쇄한 중세의 신의 역사는 비극도 아니었다. 기도를 통해 인간과 신이 섭동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신의 세계가 인식의 영역 안에서 설명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희극을 봉쇄했을 뿐이다.

2. 우상의 타파

1) 베이컨의 과학적 방법론

여기까지 원고 일부를 실었습니다.


전체 원고는 여기 관련 강의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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