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아토포스-더 비기닝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2014. 에 대한 서평 중에서 일부 (책 철학자의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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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은 폐쇄적 자율성과 다르다

자율성의 태도는 “자율적인 그날이 오기까지” 한번 기다려 보자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유토피아의 허구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상실한 것을 오지 않을 미래에서 찾아가라는 주문과 같다. 신과 내세의 유토피아도 그렇지만 박정희의 잘살아보자는 오염된 치안과 안보의 논리가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그 치안과 안보는 우리 한국사회에서 영원히 작동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밝은 미래를 위해 지금 쫌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일해보자“는 의 허구는 유토피아 사유구조의 허구를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70년대 평화시장 봉재 노동자들은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한편 독재권력과 그들과 같이 춤췄던 봉재공장 사장님들은 그런 말을 열심히 외쳐댔다. 밝은 미래가 정말 오면 그들의 이윤이 절감되고 그들의 집권이 끝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의 고막을 터트려까지 소리를 질러댔고, 지금은 그 소리의 날카로운 주파수를 더 높여 서해안 해일을 일으킬 정도로 되어 배타고 가는 젊은 학생들의 심장까지 찢어가면서 소릴 질러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그런 밝은 진짜 미래가 오지 않도록 영악한 조치를 해놓고 있다.

유토피아 조작자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조작의 권력집단은 유토피아의 현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유토피아의 이상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신은 전지전능하여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신을 믿는 대중들은 지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고 오로지 믿음만을 갖도록 강요될 뿐이다. 권력자는 그들만의 기록을 갖지만, 대중들에게는 기록 대신 믿음의 환상만을 제공한다. 랑시에르도 감정의 분할, 감각의 분배를 믿음에만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누구 좋으라는 믿음인가? 이렇게 유토피아는 종교와 만나 사람들의 감각을 더 마비시켜 놓았다. 감각의 분배는 너의 감각, 나의 감각을 먼저 유연하게 연습해 놔야 한다. 현실에 순응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마비와 경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은영은 이 시대 너머 미래를 준비하는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권유한다. 진은영이 이 책 결론에서 말한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나는 이렇게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한다는 순간으로 이해했다. 진은영이 이야기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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